76권 18화
[템빨신 ‘그리드’가 지상에 신계를 건설하였습니다.]
새벽녘에 떠오른 월드 메시지가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신계.
그것이 아스가르드와 같은 개념의 차원임을 사람들은 즉시 이해했다.
앞서 떠올랐던 그리드의 19번째 서사시가 이해를 도왔다.
가리온과 드비리온.
위대한 두 신이 그리드를 섬기길 청했고 그로 인해 지상에 거룩한 신성이 도래했다지 않았나.
모난 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좌초시킬 성벽의 주춧돌이라고 했다.
바로 직후에 그리드가 신계를 건설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메시아...”
라우엘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경악,희열,감동.
온갖 거센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서 회오리쳤다.
신들이 기거하는 세계.
아스가르드와 환국에 이은 또 다른 신계가 설마 지상에,그것도 그리드의 손에 의해 탄생할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아니,예상은커녕 상상조차 못했다.
그게 플레이어에게 허용 된 범위의 일일 거라고 추측하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했었으니까.
라우엘 입장에선 아무런 전조 없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폐하 본인도 예상하지 못하셨을 거다.’
S.A는 예전부터 불친절했다.
라우엘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플레이어 최초의 ‘영주’가 탄생했던 날.
그때도 세상이 뒤집혔고 라우엘은 경악했다.
S.A그룹 측에서 사전에 제공했던 정보엔 플레이어가 귀족이 되고 영주가 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귀족이 된 크리스가 얼마 후 한 도시의 주인이 됐다는 소식이 세상에 퍼졌을 땐 정말로 커다란 파장이 발생했다.
마치 신세계를 접한 원숭이처럼 사람들이 흥분해서 날뛰어댔다.
당시까지만 해도 플레이어 위에 당연히 군림하며 기고만장했던 NPC 귀족들.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 권력과 재력을 거머월 수 있단 사실에 수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품었었다.
정작 귀족이 되고 영주가 된 플레이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아무튼 그런 시대가 있었다.
모든 플레이어가 귀족이 되겠다는 목표를 품었던,바야흐로 대 귀족 시대.
크리스가 연 시대였다.
지금은 상식이 된 시스템을 당시 크리스가 처음으로 개척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야 그리드가 왕의 시대를 열었고,지금 이 순간엔 신의 시대를 열었다.
말 그대로 신(神)세계였다.
귀족의 시대와 왕의 시대를 겪고도 상상 못했던 시대...
스케일이 남달랐다.
“과연... 제가 선택한 분답군요.”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웃는 라우엘의 손 위로 흑염룡이 점멸했다.
검은 기운에 섞인 불꽃의 기세가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오늘따라 거셌다.
지상의 신계.
지금부터 인류 최대의 보루가 되어줄 그곳은 라우엘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불안을 희석시킬 정도로 커다란 의미를 간직한 것이다.
‘아스가르드와 환국에 이은 세 번째 신계...’
어떤 멋진 이름일까.
라우엘의 사고가 당연하게 연결됐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름이 궁금해졌다.
동시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어어? 아니겠지?
애써 믿어 보았지만.
[새로운 신계의 이름은 ‘템빨계’입니다.]
현실은 가혹했다.
라우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혈색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템빨단.
처음 그 이름을 접했을 때,라우엘은 그리드를 원망했었다.
앞으로 평생 소속되어 활동 할 길드의 이름이 템빨단이라니?
라우엘은 무려 반 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손가락질 당하는 악몽이었다.
‘쟤 템빨단이래.’
‘실화? 어떻게 길드 이름이 템빨?’
‘템빨단원 킥킥.’
악몽 속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라우엘을 하찮다는 듯이 비웃어댔다.
그들의 태도가 마치 대중의 속내를 대변하는 듯했기에 라우엘은 늘 부끄럽고 슬펐다.
그리드와 템빨단의 명성이 오르고 세상이 템빨이란 이름에 적응할 무렵부터야 라우엘의 악몽도 끝났었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얼마 후 그리드는 템빨인력소라는 2군 길드를 창설했다.
라우엘은 그때부터 또 다시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급기야 그리드가 국호를 템빨로 지정했을 때는 잠시 눈 뜬 채 기절했을 정도였다.
템빨국...
의외로 대중은 빠르게 그 이름에 적응했지만, 정작 라우엘의 악몽은 2년이나 계속됐다.
닭이 된 심정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템빨국 재상’이라고 부를 때마다 팔뚝에 닭살이 돋았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적응해냈다.
라우엘은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그리드의 작명 센스 덕분에 멘탈이 암석보다 단단하게 단련되어서,앞으론 어떤 시련과 역경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 자부했다.
한데 그 굳건한 믿음이 지금 깨졌다.
“템빨계...?”
꼬끼오...
마침 동이 트고 닭이 울었다.
라우엘은 한글을 열심히 공부해 온 자신을 원망했다.
머릿속에서 영어가 자연히 한글로 번역 됐는데,템빨계의 어감이 오골계 따위와 닮았단 생각이 스친 것이다.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 * *
< 템빨계 >Lv.l
등급: 신화
종류: 차원
대지의 신과 사냥의 신,그리고 템빨신의 신성이 강림시킨 차원입니다.
★ 차원 효과(현재 레벨 기준)
-템빨계의 규모는 라인하르트에 있는 템빨신,대지의 신,사냥의 신의 신전 규모와 비례합니다.
-템빨계 내에서 템빨신,대지의 신,사냥의 신은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제거됩니다.
-템빨신이 허락하지 않은 대상이 템빨계에 진입할 경우 격이 대폭 약화되고 모든 능력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템빨신이 허락한 대상이 템빨계에 진입할 경우 격이 보존되고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상승합니다.
-템빨계가 자리 잡은 '라인하르트’ 지역 전체에 이 효과의 일부가 적용됩니다.
-‘천사’를 임명할 수 있습니다. 단,천사의 속성은 주신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템빨계의 천사를 임명하기 위해선 대상이 최소 3개이상의 신화급 아이템을 무장해야하며,
대상이 템빨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합니다. 현재 임명 가능한 천사 숫자 10.
★ 새로운 신을 영입할 때마다 템빨계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차원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차원 효과가 강학되거나 추가됩니다.
‘이런 미친...’
모난 자들의 시기와 질투.
그건 신들과 악마들의 침략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템빨계가 적의 침략을 좌초시킬 성벽으로 작용할 거란 의미였다.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행사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설마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가히 천혜의 요새가 아닌가.
장담할 수 있다.
앞으로 라인하르트가 침략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센 척하길 즐기는 제라툴 놈도 두 번 다신 라인하르트 근처에 얼씬 못할 것이다.
또한 신계의 레벨을 꾸준히 올린다면,언젠간 지상 전체가 안전해질 터였다.
감탄을 거듭하며 기뻐하는 그리드에게 가리온이 설명했다.
“주신이 독립해서 새로운 신계를 만드는 건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어요.
태초신들께서 만드신 아스가르드라는 표본을 참고하면 쉬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여태껏 존재했던 주신들은 모두 태초신들을 어버이로 섬기므로 감히 별도의
신계를 만들지 않았죠.”
태초신 레베카가 만든 아스가르드와 태초신 한울이 만든 환국.
그 두 곳을 제외하고 주신이 만든 신계는 템빨계가 최초라는 의미였다.
“당신께서 마지막 선마저 넘은 셈이니 지금쯤 천상의 신들은 크게 분노했을 거예요.
오늘날의 사건을 지상을 침공할 빌미로 삼자는 신들도 적지 않겠죠.”
절망을 논하면서도 가리온의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리드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장담컨대 당신께서 템빨계를 만들지 않았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신들은 언젠가 반드시 지상을 침략할 빌미를 만들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잘 하셨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들과 신들은 이미 몇 번이나 지상을 위협했다.
그들이 두렵다고 고개만 조아리는 건 하책이다.
그들을 자극할지언정 맞서 싸울 힘을 갖춰야 옳았다.
자주국방을 위해선 핵무기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대한민국 국민인 그리드는 국방의 의무를 마쳤다. 국방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템빨계의 탄생이 새로운 위기를 초래할 거란 사실을 사전에 알았어도,미래를 위해선 반드시 템빨계를 만들었을 거란 말이다...
“...”
그리드의 표정이 문득 굳었다.
아스가르드.
자신이 그곳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찾아갈 때 겪게 될 페널티가 치명적일 거란 사실을 정확히 실감했기 때문이다.
고작 1레벨의 템빨계가 침략자의 격과 능력치를 대폭 하락 시킬 정도였으니 아스가르드에서 발생할 페널티는 어느 정도일지 감도 안잡혔다.
그러다가 금방 다시 침착해졌다.
절망적이지 않은 상황이 어디 있었나?
늘 그랬듯이,나는 해답을 찾을 것이다.
★ 새로운 6융합 검무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드가 첫 번째 해답을 꺼내들었다.
<템빨신의 검무〉상세 정보에서 점멸하고 있는 알림창.
조금 전 얻은 10개의 신위가 발생시킨 효과였다.
그리드는 후발선지에 초점을 맞췄다.
* * *
“당신의 도움이 무척 컸겠지요.”
소별왕.
그는 언제나 미소 짓는다.
제 형을 지옥으로 떠밀었을 때도 웃었다.
그러므로 치우는 그의 미소를 곱게 보지 않았다.
짤랑.
치우는 입을 열지 않는 반면 방울이 소리를 내었다.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는 가벼운 방울.
그것은 절대적인 무력의 상징이자 오만의 상징이었고, 죽음을 바라는 자의 희망이기도 했다.
저 방울은 치우의 위치를 식별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다.
치우에게 도전하고 싶은 자는 언제라도 저 방울소리를 쫓아 그를 습격할 수 있다.
그것이 죽음을 열망하는 치우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 어떤 자도 감히 치우에게 도전한 적이 없다.
그에게 도전하는 순간 소멸이라는 역풍을 맞이할 거란 사실이 세계에 상식으로 새겨진지 오래였다.
“지상에 도래한 신계 말입니다. 템빨신이 여태껏 죽지 않고 살아남아 급기야 새로운 신계를 만든 것은 전부 당신의 도움 덕분이지 않습니까?”
빛에 눈 먼 놈들도 지금쯤이면 눈치 했을 것이다.
궁극의 무.
치우의 가호가 템빨신에게 깃들어 있단 사실을.
아마 모든 원한이 치우에게 쏟아지고 있지 않을까?
템빨신이 태초신들을 욕보이고 신계를 만든 배경엔 치우가 있는 셈이니까.
“여태껏 본 자살 방법 중에서 가장 참신하군요.”
치우는 자신이 죽기 위해 템빨신을 이용했다.
빛에 눈 먼 놈들이 곧 이곳을 향해 천사대군을 보낼 것이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겠지.
이건... 엄청난 기회다.
안 그래도 이쪽의 전력은 아스가르드에 한참 못 미치는데,저쪽에서 이쪽을 침략해주면 유리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다.
신에게 영역만큼 중요한 개념도 드무니까.
점차로 짙어지는 소별왕의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치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템빨신을 도운 적이 없다.”
궁극이란 개체별로 다른 법이다.
치우가 그리드에게 쥐어준 궁극의 무는,치우의 궁극이 아닌 그리드가 언젠가 반드시 도달하게 될 궁극을 뜻했다.
상대방의 격을 무시하고 제압하는 궁극.
치우에게도 위협적일 그것은 순전히 그리드의 잠재력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뜻을 이해한 소별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는데,마침 불어온 바람 탓에 요란하게 떨리는 방울이 그를 비웃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