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17화
‘역시 지금 상태로는 한계가 있다.’
후발선지 (後發先至).
늦게 칼을 내어도 상대방을 먼저 친다는 뜻으로,선수필승의 법칙을 부정한다.
하수를 상대로는 쉽게 통하는 묘리였다.
피지컬과 컨트롤로 압도하는 대상의 기술쯤이야 늦게 박도 대응이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동수를 이루는 상대에겐 쓰기 힘들다.
컨트롤과 피지컬뿐만 아니라 통찰과 운까지 뒷받침 되어야했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았다.
여태껏 그리드를 상대로 후발선지를 보여준 플레이어는 크라우젤이 유일했을 정도다.
심지어 크라우젤조차도 두어 번 보여준 게 한계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는 후발선지의 개념 자체를 최근에야 알았다.
지난 몇 달 동안 플레이어들의 PvP 영상을 수집하고 분석하던 도중.
크라우젤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습관처럼 반복해서 재생하다가 뭔가 이질적인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집중해서 파헤치는 과정에 깨달은 개념이었다.
과거에는 직접 체험해도 규정하지 못했던 기술.
단순히 뛰어난 컨트롤이 일으킨 기적쯤으로 치부했던 묘리를 이해한 순간,그리드는 매료되고 말았다.
완벽하게 습득해서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됐다.
그리고 오늘.
그리드의 열망은 더욱 더 강해졌다.
가브리엘이 불을 지폈다.
풀버프 상태로 시전한 6융합 검무의 첫타를 피해버리다니.
그리드보다 명백히 우월한 반응속도를 보여준 격이었다.
그리드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그리드
레벨:719
직업: 템빨신
종족: 신
칭호:드래곤 나이트 외 다수
★근력:8,900 ★체력:7,500
★민첩:7,500 ★지력:9,250
...
..
아름다운 숫자의 배열이 눈길을 끈다.
그리드는 신이 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에겐 성장 과정에서 벌어들인 스탯 포인트가 무지막지하게 많았고,아이템을
제작하거나 칭호 등을 얻을 때 부분 상승하는 스탯에 반응하여 포인트를 분배했다.
레벨 구간마다 비율이 다른 '황금비'를 놓치지 않고 유지했단 말이다.
그리드의 상태창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레벨이 기형적으로 높다고?
헛소리다.
그리드는 레벨을 정당하게 올렸다.
매번 감당하기 힘든 적들과 싸우면서다.
신이 되고 한동안은 진짜 패배만 반복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신화가 된 아이템들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리드는 자신의 레벨에 떳떳했다.
오늘 가브리엘을 격퇴하고 얻은 19개의 레벨이 오히려 작게 느껴졌다.
‘정작 들어온 경험치는 제라툴을 격퇴했을 때보다 많았는데 말이지.’
700레벨이 되고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 요구량이 늘어난 여파다.
400레벨 이후 큰 변동이 없던 경험치통이 급격히 커졌다.
300레벨대에 겪었던 헬 구간이 떠오를 지경이었는데, 그리드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최후의 안전장치겠지.’
그리드가 300레벨 후반이던 시절.
네임드 NPC 들의 평균 레벨이 500대였다.
그때 만약 헬 구간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드는 반드시 네임드들의 레벨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지금 초네임드들의 레벨은 평균 900대라고 봐야 옳겠어.’
여전히 선구자의 권한을 지닌 것으로 모자라 신이 된 그리드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선.
아무래도 그 선이란,그리드가 대적해야 할 상대와 레벨이 좁혀지지 않는 걸 뜻하는 듯했다.
그리드는 괘념치 않았다.
그에겐 레벨의 개념을 무효화하는 칭호들과 격,그리고 치우의 가호가 있었으니까.
현재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힘과 속도가 쉽게 최대치에 도달
그리드는 격이 오를 때마다 한계를 넘었다.
플레이어에게 허용 된 상한선을 몇 번이고 돌파했다.
그 결과,언젠가부터 그리드의 상태창 하단엔 위와 같은 문구가 상시 떠올라 있었다.
이프리트의 팔을 착용한 뒤로 최대의 악력을 내는 게 당연해졌듯,
그리드의 힘과 속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최대치의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6융합 검무를 전개할 때가 대표적인 예였다.
구젤의 도를 발도한 시점부터 그리드의 공격 속도는 극한에 도달했다.
더할 나위 없이 빨랐다.
한데 가브리엘은 피해버렸다.
‘지상 버전 가브리엘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라고 하면...’
천상의 신들과 리파엘,지옥의 바알과 아모락트,환국의 신들...
어림잡아도 스무 명은 넘었다.
그들 중 전투에 특화 된 존재들의 감각과 육체능력이 대개 오늘 본 가브리엘의 수준을 초월할 터였다.
그리드보다 우월하단 의미다.
억울할 건 없었다.
어떤 온라인게임을 봐도 보스가 플레이어보다 약한 경우는 적으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예전부터 욕심이 많았다.
자신이 적보다 강하길 바랐다.
그간 해온 노력,주변 사람들의 도움,잇따라 찾아온 행운 등등.
그 모든 걸 감안하면 강해지는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후발선지에 집착하는 이유다.
후발선지가 시스템이 재차 만든 상한선을 극복할 수단 중 하나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수단은...’
당연히 렘빨의 강화다.
그리드는 갓 핸드의 업그레이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본래 갓 핸드의 최대 강점은 적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는 점에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서 그리드와 갓 핸드가 동시에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때 적이 둘 중 하나를 반드시 막게끔 만들어야 갓 핸드의 가치가 극대화됐다.
하지만 최근의 적들을 상대로 갓핸드는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초에 갓 핸드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점이 문제였다.
오늘 가브리엘과 싸울 때도 갓핸드의 공격은 단 한 번만 적중했다.
기껏 빼앗은 가브리엘의 창을 뜻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건 브라함이 해결해줘야 할 문제인데.’
그라비아늄.
언제쯤 탐욕은 진화를 맞이할까.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대지의 신께서 회복을 마치셨습니다. 모셔올까요?”
“아니,내가 직접 가지.”
***
사람들이 분주했다.
가리온의 석상을 다시 만들고 벽화를 새로 그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하나 같이 표정이 밝았다.
갑자기 늘어난 일거리에 불만을 품는 기술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순히 위대한 신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수준이 아니라 행복해하는 눈치였다.
'이래서 외모가 중요하다니까.’
최고의 개연성은 외모라는 말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이성이 쉽게 꼬이는가?
그건 그 주인공이 예쁘거나 잘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소 중년 이상의 아저씨인 줄 알았던 가리온이 사실은 젊은 여성이었다.
커다란 눈동자와 끝이 처진 눈매.
풍만한 육체와 맞물려 온화하고 포근한 인상을 준다.
어머님 같기도, 큰 누님 같기도해서,사람들로 하여금 자연히 의지하게 만드는 어떤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마망...”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이 된 느낌이다.
일부 플레이어가 가리온을 부모님 취급하고 있었다.
벽화를 그리며 마망,마망 거리는 화가 플레이어들을 지나치던 그리드가 새삼 깨달았다.
‘프랑스 출신 플레이어가 이렇게 많았구나.’
과연 봉드레 등의 하이랭커를 배출한 나라답군.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쯤.
“어서 오세요.”
그리드는 목적지에 도착했고,노크를 하기 전에 방문이 스스로 열렸다.
문 너머엔 가리온이 서있었다.
그리드의 기척을 느끼고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가지런한 몸가짐하며 태도가 몹시 공손했다.
“갑자기 왜 존대를...”
“구명의 은혜를 입었으니 극진히 섬겨야 옳지요.”
위기 상황에서 그리드를 만났을 땐 가리온도 경황이 없었다.
필담을 나눌 때 존대를 생략했던게 습관으로 남기도 했었다.
하지만 무사히 구줄되어 치료를 받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부담되는데.’
그리드는 가리온을 존경한다.
가리온은 몹시 오래 된 신 중 하나로 그리드보다 연배가 훨씬 높았다.
최소 수천 년 연상이다.
게다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머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조만간 만인의 대모라도 될 기세였는데,그런 존재가 자신을 섬기겠다고 하니 부담이 컸다.
노에사건 때처럼 안티 팬이 늘어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굳이 태도를 바꾸라고 지적하진 않았다.
그조차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드는 가리온을 존중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길 바랐다.
“게다가 당신은 저의 주신이기도 하죠.”
그리드의 복잡한 표정을 읽은 가리온이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 그녀의 신력은 그리드의 신력을 근원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드는 신이 섬기는 신이 되었고,세상은 이를 주신이라고 한다.
주신.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생각해본 그리드가 기대를 품고 물었다.
“제 신격이 크게 오를 여지가 있는 겁니까?”
“네,당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신이 늘어날수록 당신은 더욱 더 위대해지실 겁니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대답한 가리온이 힐끔,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색하게 있던 드비리온이 그리드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 혹시 이곳에 나의 신전 또한 세워주실 순 없겠소?”
몸시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정작 목소리엔 망설임이 없고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 나는 신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몰랐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신이 됐을 뿐이고,한때는 이런 내 신세를 원망하기도 했소이다.”
신화 찬탈자에게 한창 쫓길 때였다.
어째서 나는 이런 시련을 겪는가.
늙지도,죽지도 않게 된 나는.
타의에 의해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게 된 나는,단순히 불쌍한 괴물이 아닐까.
드비리온은 그런 의심과 회의감을 품었었다.
대다수의 인신들이 초창기에 겪는 증세로 일종의 사춘기였다.
하지만 오늘.
그는 다른 신들을 보았고,그들이 짊어진 책임과 자부심을 보았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됐다.
함께하고 싶었다.
속내를 읽은 그리드가 드비리온의 두 손을 힘껏 붙잡았다.
“기쁩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아홉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막 탄생한 작은 신계에서 비롯합니다.]
‘신계...?’
[그는 두 신의 존경을 받았다.]
[대지의 신 가리온은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의 위대한 무력을 숭배했다.
그가 쌓아온 업적에 매료되었다.]
[사냥의 신 드비리온은 그의 숭고한 책임감을 승배했다.
그가 앞으로 쌓아갈 업적을 보고 배우길 희망하였다.]
“우리가 당신께 도움이 되기를.”
[그와 함께하길 바라는 두 신의 열망이 의식이 되었다.]
[속세에 거룩한 신성이 도래했다.]
[모난 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좌초시킬 성벽의 주춧돌이 놓였다.]
...
..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신위가 10 올랐습니다.]
[신격 상승의 영향으로 <금의 성역>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제 당신은 ‘한 세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크기는 라인하르트의 신전 규모와 비례합니다.]
[더 많은 신을 영입할수록 세계의 규모와 영향력이 확대되고 다양한 기능이 추가됩니다.]
[새롭게 태어난 신계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이럴 수가…!
그리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감격한 것이다.
아스가르드와 환국에 이은 새로운 신계의 탄생.
심지어 이 세계의 주인은 그리드 자신이었다.
국가를 세웠을 때완 다른 형태의 감동이 밀려왔다.
“우리의 세계는 어떤 이름인가요?”
우리의 세계라.
참으로 듣기 좋은 울림이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묻는 가리온에게 그리드가 대답해주었다.
“...템빨계,입니다.”
떨리는 음성이 그리드의 감정을 대변했다.
그가 느끼는 감동이 가리온과 드비리온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서,세 신은 정답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