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16화
[템빨신 ‘그리드’가 제2위 대천사 가브리엘을 격퇴하였습니다. ]
천사에게 육신이란 옷이다. 쉽게 버리고 갈아입는 개념으로,그들의 육신을 해친다고
해서 고통이 나 죽음을 선사할 순 없다.
물론 성녀가 곁에 있을 땐 이야기가 달랐지만 현재 루비는 지옥 원정대에서 활약 중이었다.
처음부터 그리드는 가브리엘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그녀를 어찌지 못한단 사실에 아쉬움을 품기보다 가리온을 지켜냈단 사실에 만족하고 기쁨을 느꼈다.
“우선 신전으로 가지요.”
그리드가 가리온과 드비리온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등 품행에 예의가 있었는데,두 신을 존경하는 그리드의 속내가 자연히 그를 공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두 신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여신의 걸작.
대천사 가브리엘의 위계는 지상의 신들을 한낱 잡것으로 만드는 높이에 있었다.
천상에 있을 때와 달리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고려해도 범접하기 힘든 존재였다.
태생부터 워낙 고결했다.
한데 그리드가 짓밟았다.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느니,뭐니.
드래곤조차 그를 높이 평가했단 사실을 소문으로 어럼풋이 듣긴 했지만,설마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드가 제라툴을 격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가리온이 도리어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드의 실력이 제라툴과 싸웠을 때와 비교해도 몹시 고강했으니까.
파직!
어색한 침묵 속에서,그리드가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가브리엘이 퇴각함과 동시에 허물어지기 시작한 결계를 비집고 들어선 마력이 신들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어떤 작용을 일으키진 못했다.
귀환 주문서는 인간 마법사가 개발한 것이라는 설정이 발목을 붙잡았다.
귀환 주문서는 인간 출신인 그리드,드비리온과 달리 태생부터 신이었던 가리온의 생리에 간섭하지 못했다.
주문서가 작동시킨 마법 진의 구조가 가리온에게 닿는 즉시 허물어졌다.
‘이런.’
그리드가 눈살을 구겼다.
가리온은 목과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실시간으로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고작 귀환주문서 따위에 발목을 붙잡힌 것이다.
뇌신과 순보를 연계한다 해도 라인하르트까지 당도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터였으니 초조했다.
‘가리온의 신전을 더 많이 세웠어야 하는데.’
미약한 경계심이 남아 제대로 존중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때늦은 후회를 품는 순간이었다.
콰앙!
빛이 떨어졌다.
운석이 충돌하듯 강력한 파괴력 을 품은 그 자색의 빛줄기는,단순히 마력의 파장에 불과했다.
텔레포트의 잔재란 말이다.
한데 가브리엘이 남긴 흔적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가브리엘이 결계를 만들 때 도구로 삼았던 나무나 바위들.
즉,가브리엘의 신성이 조금이라도 담긴 형상들을 특정해서 파괴했다.
고작 텔레포트 한 수에 담긴 묘리가 엄청났다.
경악해서 할 말을 잃는 그리드 앞으로 브라함이 다가왔다.
텔레포트를 탄도미사일마냥 운용해놓고 태연한 얼굴이 신들의 눈길을 끈다.
“한 발 늦었군.”
새로운 마력의 성능을 제대로 확인해볼 참이었는데...
아쉬움 섞인 말을 중얼거린 브라함이 사방팔방 날뛰는 마력을 갈무리했다.
가브리엘의 신성이 재림할 수 있는 요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직후였다.
가리온과 드비리온은 사색이 되었다.
브라함을 무슨 사신 보듯이 했다.
브라함의 어럼풋한 신격에 담긴 광오함을 느낀 탓이다.
사신으로 오해할 만했다.
뭐든지 죽여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깃든 마력과 신성의 혼합은 그리드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브라함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귀환진의 술법을 무력화시키는 가리온의 신격을 확인하고 가리온의 상처를 빤히 바라보더니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서두르도록 하지.”
“…네…”
마침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한 다른 사도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들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가리온과 드비리온은 불안 속에 마법을 받아들였다.
“폐하…!”
브라함 다음으로 현장에 도착한 사도는 지크와 메르세데스였다.
지크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는 반면 메르세데스는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굼벵이들.”
막말로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한 주제에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지껄이는 브라함 때문이었다.
늘 냉정침착하고 담대한 지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지만,메르세데스는 크게 울컥했다.
그녀의 멘탈이 유별나게 약해서가 아니다.
본래 브라함이 타인을 열 받게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리드와 관련 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그리드의 호출에 즉시 응답하지 못했단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는데,
브라함이 도발까지 하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도발이 통하지 않는 지크가 오히려 특이한 것이었다.
‘인형 같은 놈.’
지크의 무심한 표정을 보고 혀를 찬 브라함이 텔레포트를 전개했고,
“저,저...!”
현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메르세데스는 황당해서 치를 떨었다.
지크가 보기엔 무의미한 감정 소모였다.
묵묵히 귀환 주문서를 찢은 그 또한 그리드와 브라함의 뒤를 쫓아 라인하르트로 향했다.
전투의 흔적을 토대로 가브리엘의 무위를 파악한 뒤였다.
칠악성 시절에 보았던 가브리엘과 지금의 가브리엘을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기에 조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많이 늦었군.”
마침 피아로가 현장에 도착했다.
장거리 이동 스킬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였지만 본인은 아쉬운 눈치였다.
브라함과 달리 겸손한 그를 보고 마음을 정학한 메르세데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먼저 황도로 귀환하셨어요. 저희도 돌아가도록 하죠.”
“음,잠시 기다리게.”
피아로가 호미와 쇠스랑을 꺼냈다.
전투의 흔적이 남은 땅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가 이 흔적들을 토대로 그리드의 무위를 가늠하게 될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
이후 두 사람마저 떠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내가 일등이로구나.”
현장에 가장 늦게 도착한 네펠리나가 기고만장하게 웃었다.
고롱의 딸인 그녀는 무지막지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당장은 헤출링에 불과했다.
사리엘이 강림과 함께 펼친 결계를 모조리 인지한 반면 결계의 기능 일부는 해석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도중에 잠시 미로를 헤매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로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브라함과 피아로에 의해서 말끔하게 정리 된 현장.
사리엘의 신성이나 전투의 흔적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 그 곳에서,네펠리나는 스스로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그리드와 사리엘.
아직 사건의 당사자들조차 도착하지 않은 현장에 자신이 가장 먼저 도착했으니 감탄할 수밖에.
‘...어떻게 이러지?’
뒤늦게 사태가 잘못 됐음을 깨달은 네펠리나가 민망해서 얼굴을 붉혔다.
설마 부친이 앓고 있는 광증이 내게 영향을 준 걸까.
그래서 순간적으로 잠시,막말로 아주 잠깐만 명청해진 게 아닐까.
순간 그런 의문을 품게 될 정도로 그녀는 부끄러웠다.
* * *
천사는 신과 다르다.
그들이 쌓는 신성은 차라리 인간 성직자의 신성과 닮았다.
신을 믿고 섬김으로써 얻는 것이다.
즉,스스로 신격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불사의 가호를 얻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문제는 없다.
천사는 대악마처럼 영혼의 윤회를 통해서 삶을 영구히 지속한다.
게다가 대악마와 달리 갈아입을 육신을 수백수천 개씩 보유하고 있었다.
육신을 잃는 즉시 다른 육신을 통해서 재탄생했다.
“얼마 만에 갈아입는 거예요? 탄생 이후 처음 아닌가?”
말끔한 모습으로 신전에서 걸어나오는 가브리엘을 리파엘이 맞이 했다.
아기의 것처럼 부드러운 가브리엘의 살결을 콕콕 찌르는 행동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제라툴이 패퇴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
가브리엘의 격이 훼손 된 것을 패념치 않는 눈치였다.
천사의 격은 금방 복구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가브리엘의 격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천사는 신의 종이다.
천사가 신에게 패배하는 건 큰 흠결이 안 됐다.
무위의 고하와 관계없이 적용되는 세계의 법칙이었다.
게다가 가브리엘이 약해질수록 리파엘은 자유로워진다.
솔직히 말해서 리파엘은 기뻤다.
앞으로 당분간 뜻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됐으니까.
“템빨신은 어땠어요? 내 말대로 아주 괘씸한 놈이죠?”
“글쎄요. 당신과 비교하면 몹시 훌륭하던데요.”
“응? 아하하,왜 맨날 나한텐 심한 소리만 하는 거예요?”
싱글벙글 웃으며 지껄이는 리파엘에게 가브리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증오,살의.
리파엘을 마주할 때면 천사가 품어선 안 될 감정이 자꾸만 샘솟았다.
감정을 잃었다고 믿어왔는데도 그랬다.
그녀는 눈치 채고 있었다.
리파엘이 이번 일을 자신에게 맡긴 이유.
템빨신을 경계하고 그 힘을 가늠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철저히 이용당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만약 이번 일에 리파엘이 나섰다면,가리온은 내게 겪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수모를 겪었을 테니까.
리파엘은 그녀가 현생과 전생에서 대지를 다지기 위해 해온 모든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모욕적인 언사를 쉬지 않고 지껄였을 것이다.
과거에 이미 한 번 그랬던 적이 있다.
그 후로 쭉 가브리엘이 가리온을 담당했다.
‘이번엔 정작 나도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가리온이 여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괘씸했다.
그것이 분노라는 감정까지 연결되진 않았지만 고운 말이 나오기 힘들었다.
“당신,신난다고 너무 날뛰지 말아요.”
“아무럼요. 나중에 여신께 혼날수도 있으니까 저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죠.”
“그 전에 템빨신에게 혼쭐이 날지도 모르죠.”
“응? 아하핫,일은 제대로 못해놓고 농담만 배워오셨네.”
한쪽 눈을 깜빡인 리파엘이 신성으로 하트를 그렸다.
가브리엘에게 전하는 마음이었다.
‘죽일까.’
진즉부터 마모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이 오늘따라 재차 자극을 받고 꿈틀거린다.
사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리파엘을 노려봐준 가브리엘이 곧 등을 돌렸다.
여신의 신전에 들러 배신자를 벌하지 못한 죄를 고한 뒤 기도를 올릴 생각이었다.
“어서 이쪽으로.”
사리엘은 보통의 천사와 입장이 많이 다르다.
타천사.
천상에서 추방당한 그는 많은 권한을 잃었다.
그에게 육신이란 유일한 것이었고 죽음은 끝이었다.
게다가 무저갱에서 축적한 마기를 내재하고 있어 언제 폭주할지 몰랐다.
하여 사도 중 유일하게 라인하르트에 대기하고 있었는데,놀랍게도 가리온의 상태를 예측하고 모든 준비를 끝내놓았다.
가리온의 신전으로 신도들을 최대한 불러 모아 그녀를 위한 기도와 찬가를 부르게끔 만든 것이다.
템빨국에서 사도의 권한은 절대적이었고,사리엘은 사도 중에서도 아름답고 상냥하기로
유명해서 인기가 많았으며,가리온 인지도가 높은 신이었기 때문에 인파가 정말 구름떼처럼 모였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와 찬가는 가리온을 위한 신력이 되었고 가리온은 금방 상처를 회복하는 듯했다.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지만 않았어도,가리온은 곧바로 완쾌됐을 것이다.
“근데 저분은 뉘신지...?”
신전의 석상과 벽학에서,가리온은 넓은 등판과 근육질의 팔로 대지를 지탱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한데 실제로 현현한 신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으므로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고 기도와 찬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본래 가리온에게 쏟아져야했던 신력이 대상을 종잡지 못하고 허망하게 흩어져갔다.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핀잔을 주는 라우엘에게 그리드는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날 밤.
가리온은 무사히 신력을 회복하고 건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