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34화 (1,522/1,794)

76권 15화

성역은 신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척도다.

고강한 신일수록 더욱 강력한 신성을 쌓고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독립적이기에 범접하기 힘들다.

‘이곳이 템빨신의 성역.’

천사들은 여신의 성역에 익숙했다.

쫓겨난 신들과 전쟁을 치렀을 때도,칠악성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도,천사들은 여신의 성역 안에서 가호를 받고 싸웠다.

안목이 높다는 의미다.

가브리엘은 템빨신의 성역을 쉽게 파악하고 평가했다.

‘뛰어나다.’

강철의 협곡.

템빨신의 심장에서부터 번지는 열기에 녹아 흐르는 강철이 수백개의 갑옷을 빚고 템빨신에게 덧씌운다.

어지간한 공격은 피해 없이 흡수할 법했다.

수호의 개념에 최적학 된 공간.

인류를 지켜온 템빨신의 성향이 잘 반영된 성역이었다.

리파엘이었다면 겁쟁이의 영역이라며 비웃고 깔보았을 테지만...

가브리엘은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고귀한 심상이야.’

강철의 협곡은 높고 고요했다.

협곡을 이룬 강철은 차갑고 강철을 녹이는 열기는 뜨거웠다.

굳이 따지면 지옥의 일각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풍경에 숨은 본질을 엿봤다.

온갖 괴물들과 같은 인류,악마와 천사들,심지어 신들과 드래곤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수많은 존재들이 지상을 위기에 빠뜨렸고 그때마다 템빨신이 구원했다.

이 높은 협곡은 지상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고자 하는 템빨신의 바람이오,

협곡에서 샘솟는 무수한 갑옷들은 템빨신의 업적들이 형체를 이룬 것이리라.

‘진정한 신.’

가브리엘의 시선이 그리드와 가리온,그리고 그들 뒤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드비리온을

차례대로 살폈다. 그들이 비록 미약할지언정 성격만은 여신과 닮았음을 간파했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감상이 그들을 돕고싶다는 바람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가브리엘의 마음은 식을 대로 식은 지 오래다.

어떤 열망을 품기엔 너무 차가웠다.

“이제 막 얻었을 성역치곤 무척 훌륭하군요. 하지만 단순히 지키기 위한 힘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템빨신은 자신보다 강한 적들과 싸워왔다.

무엇보다도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을 터.

방어에 특화 된 성역의 성질이 쉬이 납득됐다.

하지만 단순히 지키기만 해선 끝이 없다.

진정한 승리를 거두고 싸움을 종결 짓는 방법은 적을 멸하는 것이다.

방어보단 공격이야말로 더 상위의 개념이란 의미다.

애초에 여신의 성역처럼 전능했다면 완벽했겠지만,탄생한 지 얼마 안 된 템빨신이 그런 성역을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어디,언제까지 버티나 보죠."

가브리엘이 던졌던 창을 회수했다. 손가락이 아닌 손아귀에 쥐었다.

이 창은 그녀의 상징이다.

물아일체를 이루어 굳이 손에 닿지 않아도 자유롭게 움직였다.

손가락에 품은 의도만으로 가히 천지를 진동시키는데 손에 쥐고 휘두르면 세상이 멸망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템빨신의 성역이므로 멸망시켜도 괜찮았다.

쿠르릉!!

가브리엘로부터 샘솟은 기파가 협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녀가 무장하고 있는 금색 갑옷과 창이 그녀의 의지에 동조하여 밝은 빛을 폭사시켰다.

태초에 여신께서 하사하셨던 갑옷과 창이다.

탄생 시점부터 쭉 함께해왔으므로 가브리엘의 상징이었다.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가리온은 사색이 되었다.

성역을 통째로 뒤흔드는 가브리엘의 힘에 놀란 것이다.

이대로 성역이 무너졌다간 그리드의 신격이 크게 하락할 것을 눈치 챈 그녀가 설득했다.

“전심전력을 다하는 가브리엘을 상대로 굳이 힘 싸움을 해줄 필요는 없어.

우선 성역을 거두고 물러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한 번.

딱 한 번만 공격을 흘리면 기회가 올 것이다.

제아무리 가브리엘이라고 해도 지상에서 저만한 힘을 끌어 쓴이상 후폭풍이 클 테니까.

아마 곧 삼위일체의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을까 싶었다.

가리온은 생각했지만, 그녀의 의견은 그리드에게 채택되지 못했다.

전투의 흐름이 빨랐다.

가브리엘이 이미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차륜처럼 회전하는 창날이 매서웠다.

금색 휘광을 어지럽게 퍼뜨려대는데, 빛의 입자에 닿은 공간들이 허망하게 녹아내렸다.

성역에 뻥뻥 구멍이 뚫렸다.

가브리엘의 창과 갑옷이,의지가,행동이,가브리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템빨신의 성역을 실시간으로 무너뜨려갔다.

'늦었...'

코앞까지 다가온 창날이 가리온의 커다란 눈동자에 투영됐다.

소멸을 직감한 가리온이 그리드의 망토를 꽉 쥐었다.

그리드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적어도 그리드만큼은 구하려고 필사적인 애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잃은 신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너무 약했다.

그녀는 사력을 다했건만 그리드의 몸은 꿈쩍도 안 했다.

“아…”

가리온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녀를 절망하게 만드는 건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기 직전에 목격해야 할 그리드의 고통이었다.

신살의 기운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는지 그녀는 경험한 바 있다.

그리드마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

가리온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짝 다가와 확대 된 가브리엘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무심했던 눈동자를 물들이는 경악이 낯설게 다가왔다.

가리온이 한 발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가브리엘은 얇은 흰 천만을 걸친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 위풍당당하게 무장했던 갑주를 벗고 반쯤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째서?

제대로 된 의문을 품기도 전에,가리온은 가브리엘의 창이 높이 솟구치는 광경을 보았다.

마치 창이 가브리엘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손이 창백해질 정도로 손에 힘을 주는 가브리엘의 의지와 달리,

창은 제멋대로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드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가브리엘은 모든 무장을 벗은 상태로 그리드에게 도달한 형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애꿎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모양새.

빈틈투성이라는 표현 외엔 그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펄럭一

가리온이 힘껏 쥐어도 꼼짝 않던 그리드의 망토가 뒤로 솟구쳤다.

어느새 휘장처럼 번진 주황색 극광이 앞서 찢겨나갔던 성역을 실시간으로 수복 중이었다.

콰르르륵!!

이도류로 검무를 펼칠 때,그리드는 대부분 구젤의 도를 첫 번째로 휘두른다.

발도를 장점으로 삼는 도의 특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가속력을 얻는 까닭에 대부분의 적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하물며 현재 그리드의 레벨은 700이었다.

스텟이 7차 각성을 맞이한 까닭에 제라툴과 싸울 때와 비교해도 몇 배는 강했다.

한데 가브리엘은 그리드의 첫 번째 공격을 피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번진 빛이 감각으로 대체되는 듯했다.

그리드가 애용하는 인공 감각의 명백한 상위 버전이었다.

‘대단하군.’

그리드가 자연히 감탄했다.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로 기습에 반응하는 가브리엘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났다.

향후 감당해야 할 절대자들의 실력을 재차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괜찮다.’

그리드는 위축되지 않았다.

뒤에 선 가리온과 드비리온의 기척을 느끼면서다.

사도들과 인신들.

내 곁에도 조만간 절대자가 될 동료가 많다.

지금쯤 지옥에서 구르고 있을 템빨단 또한 든든했다.

그들이 전설이나 초월자가 되면 향후 엄청난 도움이 될 테니까.

콰앙!!

핑음이 번졌다.

크란벨의 뿔이 쏘아진 여파다.

무형검과 합체한 상태였는데,염룡검과 합친 구젤의 도에도 반응했던 가브리엘이 이번 공격은 제대로 못 피했다.

구젤의 도를 피할 때 쏟았던 심력을 채 복구하기 전이었던 것이다.

기이한 각도로 휘어진 검에 찔린 가브리엘의 상황을 갱신해서 인식한 그리드가 왼손의 엄지를 길게 뻗었다.

구젤의 도의 손잡이를 보다 짧게 쥐었다.

“낙룡극연살파(落龍極聯殺派).”

균형이 무너진 가브리엘의 상단으로 순보를 써서 위치를 옮긴 그리드가 수직 낙하했다.

짧게 쥔 구젤의 도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크란벨의 뿔을 앞으로 우겨넣었다.

가브리엘이 두른 빛을 헤집는 낙룡의 동작은,안 그래도 혼란한 가브리엘에게 어떤 환영을 보여주었다.

드래곤의 강림.

검무와 크란벨의 뿔이 합쳐져서 연출하는 광경이었다.

‘맞붙으면 진다.’

가브리엘이 즉각 판단했다.

창을 잃고 팅 빈 손이 빠른 판단을 도왔다.

설마 무기를,하물며 평생을 함께해온 끝에 신물이 된 무기를 빼앗길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파앗!

가브리엘이 순보를 썼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은 못 박힌 듯 꼼짝도 안 했다.

그리드의 6융합 검무가 발생시킨 힘의 파장 탓이었다.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주변을 블랙홀처럼 끌어당기고 있었다.

흠칫 놀란 가브리엘이 문득 그리드의 두 눈을 보았다.

위기에 빠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작은 희열도,분노도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마주한 눈빛이었기에,가브리엘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대적 불가.

태초신과 고룡들,그리고 유일신 치우를 마주했을 때나 느꼈던 감상이 그녀를 지배했다.

이곳은 천상이 아닌 지상이며,무기와 갑주를 잃었다,따위의 핑계거리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원인들이 없었다고 해도 가브리엘은 그리드에게 감탄하고 말았을 것이다.

드래곤의 기세와 성격을 재현하는 그리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으니까.

마침 감상에 호응하듯 들려오는 방울소리가 짓궂게 느껴졌다.

‘...치우?’

가브리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위기 앞에서도 고요했던 그녀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이 생겼다.

그리드를 향한 치우의 집착이 소문보다 크다는 사실을 느낀 탓이다.

치우가 누군가에게 이런 큰 집착을 보였던 적이 있던가?

설마 그는 템빨신이 완전한 신살을 이루게 될 거라고 믿는 건가?

신은 완전한 신살을 이루기 힘든 것이 세계의 법칙일 텐데,무엇을 근거로?

‘...이겨야 해.’

승산이 적음을 눈치 챈 이후.

적당한 기회를 노려서 퇴각할 심산이던 가브리엘이 생각을 고쳤다.

치우의 성격을 떠올리면서다.

예로부터 그는 허언 따위를 몰랐다. 노망이 들 정도로 하찮지도 않았다.

그가 템빨신을 ‘자신을 죽일 존재’ 즉,신살자로 점찍었다 함은,템빨신에게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 됐다.

그러므로 패배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을 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템빨신의 검격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신성을 갑주로 둘러서 템빨신의 검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창으로 삼은 신성을 마구 쏘아댔다.

그녀의 몸에 급격히 상처가 늘어났고,템빨신이 두른 갑주들도 무참히 박살나기 시작했다.

동귀어진의 각오.

일방적인 패배를 겪어 템빨신의 격을 올리느니 차라리 함께 격을 잃자는 속셈을 품은 가브리엘의 저항은 몹시 거셌다.

하지만 그리드는 춤사위를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기세를 올려서 6융합 검무의 전개를 속행했다.

가브리엘의 의지와 무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그리드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상대방에게 금의 성역을 무력화하거나 상쇄시킬 수단이 없는 이상,그리드에겐 오직 승리의 근거만 쌓일 뿐이다.

푸욱!

"...!?"

거세게 저항하던 가브리엘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앞서 잃었던 창.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것에 등을 찔리고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여파였다.

‘어찌,이런...?’

홀로 떠도는 흑금색 손이 재차 휘두르는 자신의 창을 다급히 회피하는 가브리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마침 성역이 변화를 일으켰다.

기껏 힘들게 부순 갑옷들.

템빨신이 둘렀던 그 갑옷의 파편들이 성역의 신성에 호응하여 수백 자루의 무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템빨신의 검무를 온전히 감수하는 동시에 감당하기엔 숫자가 너무 많고 고강했다.

“황당한...”

가브리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단순히 방어에 특화 된 줄 알았던 템빨신의 성역.

그것은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전능한 것이어서, 여신의 성역을 얼핏 닮았을 정도였다.

xpa빨신이 쌓아온 업적이 자신의 예상보다 아득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지상의 절대자.’

템빨신을 규정한 가브리엘이 전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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