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33화 (1,521/1,794)

76권 14화

기억의 시작은 환한 빛과 함께였다.

처음으로 눈을 뜯 가리온은,아름답다는 개념부터 이해했다.

토지를 일궈라.

수풀이 뿌리를 내리도록,맑은 물이 흐르도록,길짐승이 노닐고 날짐승이 쉬어가게끔.

황금색 구름을 타고 내려오신 어머니의 마음이, 미소가 아름답다고,가리온은 생각했다.

“당신은 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군요.”

어머니의 표정이 문득 슬퍼졌다.

하지만 가리온은 의문을 품지 못했다.

그녀는 마침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었다.

자아와 이치를 깨우친 부작용으로 머릿속에 범람하는 정보를 수습하기 바빴다.

이번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했던 어머니의 말씀을 자연히 기억 저편에 묻고 말았다.

희미한 음성 탓에 더욱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다니.’

신력을 모조리 잃었다.

템빨신으로부터 비롯한 신력을 포함해서다.

이젠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수준을 넘어서 존재의 성립조차 힘들게 됐다.

이때야 비로소 떠오른 기억의 파편들이 조립 된 것이다.

이 중요한 기억을 봉인해온 원흉이 다름 아닌 신력이었음을 깨닫고 슬퍼졌다.

‘그랬구나.’

나는 늘 버려졌던 거구나.

이전 세계에서도,그 이전의 세계들에서도.

또한 이후의 세계에서도,나는 오늘과 같은 순간을 매번 맞이해왔고 맞이하게 되겠구나.

가리온의 흰 빵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투명한 연두색과 분홍색으로 점멸하는 긴 머리카락.

태어난 날 보았던 대천사 가브리엘의 구불거리는 장발이 여전히 아름다움을 확인하면서,그녀가 변한 게 아니라 한결 같았음을 눈치채고 하염없이 울었다.

“가브리엘... 그대가 매번 나를 해쳐 왔나요?”

“네,당신의 죄목은 항상 같았습니다. 천상이 아닌 지상을 우선시 하여 신들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점이죠.”

“그게 나의 의무니까요. 어머니께서 내게 땅 위의 존재들을 지키라고 부탁했으니까요.”

그리고 땅 위의 존재들을 사랑하게 됐으니까.

뒷말을 삼키는 가리온이었다.

자신의 이런 마음이 땅 위의 존재들에게 해가 될까 저어해서였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의 올곧은 영혼에게 융통성을 바라는 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파악했습니다.”

무수한 경험을 통해서다.

가리온의 목을 벨 때 품었던 망설임도 버린 지 오래였다.

헤아리기 힘든 오랜 과거부터 가브리엘은 가리온의 목을 베어왔고 이 행위에 충분히 익숙해졌다.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데 이번엔 달랐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많이 특수하군요. 가리온,이번 세계에서 당신이

범한 죄는 여신을 배반했다는 겁니다. 역사상 최악의 중죄죠. 템빨신과 협력하다니요?”

템빨신.

여태껏 없던 존재가 많은 걸 바꿔놓고 있다.

여신께서 그의 행보를 몹시 흥미롭게,때로는 흐뭇하게 지켜보셨음을 기억한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두문불출하시는 여신의 태도에 의문을 품지않은 이유는,

여신의 상태 또한 특수했기 때문이었다.

해소되지 않을 의문을 품어 심력을 낭비하느니 자연히 받아들였다.

리파엘은 드디어 여신께서 우리를 신뢰해 주신다며 기뻐했지만,글쎄…

내가 여신이라면 리파엘을 신뢰할 리 없다.

“대체 템빨신에겐 어떤 매력이 있지요?”

가브리엘이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가리온의 가녀린 목에 겨눈 창을 거두지 않은 채다.

창날의 좌측에 초승달처럼 뻗은 극이 가리온의 피부를 조금씩 파고들었다.

“매력...? 너무 많아서 설명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그 때까지 나를 살려두실 건가요?”

템빨신은 가리온의 이상형일 수밖에 없다.

인간일 때도,신이 되고도 땅 위의 존재들을 지켜온 자니까.

빙글,가브리엘의 입매가 휘었다.

습관일 뿐이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는 처음과 변함없이 차가웠다.

무심 (無心).

가브리엘은 언젠가부터 감정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배제했다.

반복되는 세계를 체험하면서 마모된 걸 수도,리파엘을 통제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노력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그녀의 자애를 바라고 있을 인간들만 가여울 따름이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가브리엘이 대화를 끝냈다.

가리온의 신격을 박탈하고 영혼을 봉할 게 아니라 완전히 죽여없애야겠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도 계속 대지의 신 역할을 맡기기엔 결점이 많았으니까.

영혼에 심어둔 '씨앗’도 충분히 자랐을 테니 회수할 겸,신살의 기운을 발전시킬 기회로 삼는 게 좋을 듯했다.

스윽.

가브리엘의 길고 고운 손가락이 살짝 휘었다.

파지법의 미세한 변화가 창에 극적인 변화를 안겼다.

멈춰있던 창이 순식간에 반월을 그리더니 가리온의 목을 베었다.

창날엔 창백한 기운이 맺혀있었다.

신살의 기운이다.

스아악...

한 발 늦게 몰아치는 폭풍에 흔들리는 숲이 잔인할 정도로 푸르렸다.

여태껏 자신을 돌봐준 신에게 위기가 닥쳤음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가리온의 죽음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됐다.

과연 대지는 충분히 다져졌다.

가브리엘이 검지와 중지로 창대를 지그시 밀치자 반월을 그리며 솟구쳤던 창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퍽!

가리온의 작은 머리가 박살났다.

앞서 베인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의 입자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그녀의 깨진 머리에서 빛이 폭포수 같은 기세로 쏟아졌다.

신의 죽음은 반드시 유예되며,신은 그 유예 된 시간 동안 반드시 퇴각하는 권리를 지녔으나,신살의 기운 앞에선 일부 권리를 상실하는 것이다.

애초에 가브리엘은 리파엘이나 제라툴과 완전히 달랐다.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으므로 가볍지 않다.

합리적이고 철저했다.

지상에 강림함에 있어서 템빨신이라는 존재를 경계해야한단 사실을 인정하고 공들여 채비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당연히 삼위일체를 이룬 상태였다.

심지어 탄생 이후 쭉 함께해온 신물(神物)을 무장했다.

미약하나마 신살의 기운을 구사하는 수준으로,거의 만전에 가까웠다.

물론 천상에 머물 때와 비교하면 손색이 컸지만 지상을 기준으론 이보다 더 좋기 힘들었다.

“어째서 버티려고 노력하는 거죠?"

가브리엘이 고개를 가웃거렸다.

콰득,콰드득...

가리온에게 원기를 나눠주며 썩어가는 대지와,그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연명하는 가리온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땅은 충분히 다져졌습니다.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질 은 없어요. 또한 당신이 살아간다고 해서 땅 위의 존재들에게 이로을 것도 없죠.”

가리온 본인이 가장 잘 안다.

그녀의 쓰임새는 더 이상 많지 않았다.

이제 대지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설령 검성에게 베일지언정 느리게나마 회복할 재생성도 갖췄다.

여태까지처럼 땅 위의 존재들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따위의 바람을 품은 거라면 그건 더욱 무의미했다.

지금 막 가리온은 대부분의 신력을 잃었다.

자신이 보살펴온 땅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무력함을 증명한 탓에 신격마저 떨어졌다.

한데 왜 굳이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걸까.

‘여태껏 이런 적이 없는데.’

이전 세계들에서.

가리온은 항상 죽음에 순응했다.

본인의 무가치함을 알기에 저항하지 못했었다.

“당신,설마 템빨신을 기다리는건가요?”

지금의 가리온은 레베카가 아닌 템빨신의 신력을 근원으로 삼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템빨신도 가리온의 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다.

딱 거기까지다.

템빨신은 가리온을 돕지 못한다.

몇 달 전 제라툴을 패퇴시킨 까닭이다.

충분한 방비를 못한 제라툴이 비록 볼품없이 패배하긴 했지만,템빨신은 분명하게 승리했고 격이 올랐다.

가브리엘과 힘의 차이를 명확하게 실감할 수준이 됐을 텐데 어떤용기를 내어서 가리온을 구하러 올까?

물론 올 수도 있다.

템빨신의 지난 행보를 생각해보면 이성과 거리가 먼 존재였으니까.

감정에 치우쳐서 오기를 부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상대가 안 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가브리엘은 충분한 채비를 갖춘 상태이므로 템빨신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템빨신이 상위룡을 거느리고 와야 그나마 작은 승산이 생길 거예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템빨신이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드래곤은 없죠.

당신이 구차하게 버터서 템빨신을 끌어들인다면,템빨신은 당신 때문에 신격을 크게

잃을 겁니다. 자칫 죽을 수도 있죠. 저한테요. 그걸 바라시나요?”

“…아니요.”

대지가 진동했다.

기운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시작한 가리온에게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느낌이었다.

푹!

급기야 파도처럼 출렁이기 시작한 대지에 창을 꽂아 억누른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래요,잘 생각했어요.”

가브리엘은 그리드의 개입 가능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뒀다.

충분한 대비를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리드의 개입을 환영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가리온을 징벌하는 것이다. 구태여 방해 받고 싶지 않았다.

뜻밖의 사태를 즐기는 리파엘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선호했다.

“잘 가요.”

“..."

이번 세상을 망각한 채 또 다시 이용당하게 될 다음 세상의 자신을 동정하면서,가리온은 눈을 감았다.

템빨신이 도착하기 전에 어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괜히 시간을 끌어 자칫 템빨신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으니 죄책감이 컸다.

‘미안해. 나도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아.’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리온은 지상에 홀로 고립 된 채 살아왔다.

오직 의무에 충실하며 땅 위의 존재들에게 의지가 되어주었다.

단지 그뿐인 삶이었다.

쓸쓸했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게도 후회가 없었다.

스윽

창날의 차가운 예기가 목을 스쳤다.

가리온은 자신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잃고 쓰러진 자신의 몸을 마주하게 될까봐 무서워서 눈을 뜨지 않았다.

한편 가브리엘의 손가락은 악기를 연주하듯 바삐 움직였다.

약지로 창대를 튕긴 뒤 검지로 당겼다. 곧바로 놓고 중지로 받쳐 들었다.

크게 선회하였다가 머리 위에 펼쳐진 그녀의 장창은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무구의 비를 모조리 차단하여 범접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그녀가 딛고 선 땅에 은은히 번졌던 신성은 좌우로 영역을 확장시킨 상태였다.

삼위일체를 이루기 위해 데려온 아기 천사들을 보호하는 결계로 작동했다.

“결국 이렇게 됐군요.”

푸른색과 금색으로 교차하는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지근거리로 향했다.

무구의 비로 시선을 끌고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접근해온 그리드.

투명후드짚업을 입고 가리온 곁에 다가온 그는 자신의 작전이 성공했다고 믿었으나 이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함정.

가리온의 발밑에서 솟구쳐 오른 빛의 기둥이 가리온과 그리드를 동시에 집어삼켰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가브리엘의 기감을 속이려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던 것이다.

‘지나치긴 개뿔.’

이곳에 오기까지 최고 속도를 유지한 그리드는 뇌신 상태를 활성화시켜놓고 있었다.

벼락처럼 튀어 올라 빛의 기둥을 회피한 그가 가리온을 등진 채 물었다.

“그 상처,신전에 가면 회복되는거지요?”

그리드는 가리온의 모습을 굳이 눈에 담지 않았다.

처참한 몰골이 보기 흉해서가 아니라 배려였다.

가리온은 위대한 신이기에.

그녀의 위엄을 지켜주고 싶었다.

실제로 가리온은 그리드가 나타난 시점부터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인데 흉한 꼴을 보이기 싫었다.

“여긴,여기는 내게 맡기고 피해.”

가리온이 그리드의 등을 밀치며 말했다.

애원하는 투였다.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토록 작은 손으로 여태껏 세상을 지탱해온 건가.

그리드의 머리가 차갑게 식는 그 때였다.

마침 무구의 비를 소멸시킨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댔다.

“그래요. 템빨신 당신은 돌아가도록 해요. 오늘 나의 목적은 당신이 아닌 가리온이니까.”

“지랄하지 마. 내 목적은 너니까.”

그리드의 양손에 드래곤 웨폰이 쥐어졌다. 아이템 합체를 이룬 상태였다.

사람들이 구해달라고 애타게 기도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천사놈들.

꼭 원치 않을 때마다 나타나 선한 존재들을 표적으로 삼는 놈들에게 그리드는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다.

대악마보다 못하다는 확신을 품었다.

악마들은 야탄교인들의 부름에 호응하기라도 했지,저 빌어먹을 천사 새끼들은 도무지 답이 없다.

살심이 마구 솟구쳤다.

감정이 무형지기로 표출됐다.

그리드를 중심으로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쯤 되면 성역을 가동하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그리드의 수준을 가늠한 가브리엘이 창을 세웠다.

그리드를,정확히는 그리드가 등지고 선 가리온을 겨냥했다.

“혼자만이라도 살아남을지,아니면 둘이 함께 죽을지 선택하세요.”

경고는 짧았고 행동은 즉시였다.

투창.

태초부터 사냥을 상징해온 동작으로,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대상에게 반드시 적중하며 필멸을 유도했다.

가브리엘의 권능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심지어 신살의 기운마저 담겼다.

드래곤들의 브레스와 제라툴의 검력을 체험해봤던 그리드는 오싹한 공포에 휩싸였다.

날아오는 창을 보는 순간 죽음이 뇌리를 스쳤다.

자연히 살고자하는 욕망이 피어 올랐다.

본능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성역이 열렸다.

금의 성역.

촤르륵!

강철의 협곡이 빚어낸 수백 개의 갑옷이 그리드에게 덧씌워졌다.

그리드는 가리온을 감싸 안았다.

움찔 놀라며 고개를 푹 숙이던 가리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력의 교감을 통해서 그리드의 마음을 읽은 까닭이다.

상처를 입었어도 흉하지 않다고,오히려 너무 예뻐서 놀랐다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는 위로가,갈기갈기 찢어진 그녀의 마음을 조금 치유해주었다.

꽈아아아아앙!!

"...?"

가브리엘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숫제 놀란 반응이었다.

투창을 몸으로 막아내고도 멀쩡한 그리드의 모습에 적잖게 당황한 것으로,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은 건 탄생 후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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