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12화
“뭐?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그런 놈들이 있어?”
군신 아레스.
실력이 명성만 못하다느니,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높지 않던 시절에나 통하던 거품이라느니.
그는 꽤 오램 세월 동안 대중의 조롱과 비난을 받아왔다.
비교 대상이 하필 그리드였던 탓이다.
어쩔 수 없다.
플레이어 중 유이하게 국가를 세운 인물.
상당수의 하이랭커를 부하로 거느린 그는 당연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비슷한 입장에 있는 그리드와 행보를 비교 당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상대적으로 초라하기만 했다.
제국에게 발이 묶였다는 핑계를 댈 것도 없이 그리드의 업적들이 너무 대단해서였다.
애초에 그리드였으면 제국에게 발을 묶일 일도 없었을 거다.
아무튼 옛날 일이었다.
인마대전 이후 아레스에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었다.
발할라의 군대는 악마들과 마물들을 말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전차처럼 짓밟고 행군했다.
군신의 권능은 군대를 몇 배나 강력하게 만든다고 하더니 그 소문에 결코 과장이 없었다.
하물며 아레스 일신의 무력도 엄청났다. 20위대 대악마들을 단신으로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10위대 대악마의 표적이 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퇴각해버렸지만,그때쯤 대중은 아레스에게 콩깍지가 씌어있었다.
판단력마저 훌륭하다는 둥,적 주력의 턴을 피해 없이 넘긴 전략이 신묘했다는 둥,사람들은 볼품없이 퇴각한 아레스를 보고도 칭찬하기 바빴다.
그때 쌓아올린 명성이 지금의 발할라를 있게 만들었다.
템빨제국을 상국으로 섬기는 왕국 중 가장 많은 플레이어가 유입됐다.
제국 다음가는 강국으로 도약한 셈이었다.
그만큼 큰 책임도 짊어졌다.
적해로 진출하는 최단의 항구를 대거 건설 중인 이 동쪽의 국가는,적해 곳곳의 무인도에서
힘을 쌓고 돌아온 무신의 추종자들을 격살하는 한편 쫓겨난 신들을 경계하는 최전방의 요새로 작용하고 있었다.
지옥 정벌을 코앞에 둔 제국에 여력이 적음을 알고 제3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무신의 추종자 중엔 하이랭커급의 강자가 적잖게 있었고,혹시 모를 양반의 난입을 경계하느라 항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애초에 적해로 진출할 항구를 건설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해수가 날뛰고 날씨를 종잡을 수없어 매일 재해가 발생했다.
무지막지한 자본과 인력이 투입됐고 덩달아 심력도 소모됐다.
동대륙 출신이며 초네임드 등급의 책사인 사마천.
온갖 근거를 제시한 그가 항구의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면,아레스는 적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장의 적은 지옥에 있고 향후 적은 천상이 될 것 같은 마당에 뭘 벌써 동대륙 진출을 대비한단말인가.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영토를 확장 하느라 이민족들과 전쟁하며 병력을 소모한 아레스는 골치가 아팠다.
'이 와중에 PK 범들까지 활개를 치다니.’
벌컥벌컥.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만든 극상급 물약.
레이단이 박살났던 여파로 인해 당분간 수급이 힘들어진 그것을,그래서 인벤토리 구석에 넣고 아껴온 그 귀중한 물약을 아레스가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콜라의 상위 호환이라 스트레스를 풀기에 좋았다.
드래곤이 레이단을 침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요즘은 값이 너무 올랐다.
쩝,빈병을 탈탈 털어놓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아레스가 한숨 쉬었다.
“야탄교나 삼신교의 잔당들도 아니고,일반 플레이어들이 난리를 피우는 중이라 이거지?”
인마대전은 위기 이상의 기회로 작용했다.
그리드와 템빨국을 보다 강력한 구심점으로 만들고 플레이어의 화합을 유도했다.
백요와 흑요 자매 등,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악명이 높았던 다크플레이어들조차 세간과 협력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지옥이라는 공통의 적이 수면 위로 드러난 덕이 컸다.
플레이어들은 최소 지옥을 정벌할 때까진 하나로 똘똘 뭉치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엔 수많은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인류가 완전한 화합을 이뤘던 적은 없다.
전쟁이 끝나고 채 1년이 안 된 지금.
평화가 지겨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혹은 평화는 돈벌이가 안 되는 까닭인지 새로운 다크플레이어들이 출몰했다.
안 그래도 지옥에 전력을 집중해야하는 상황에 지상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판단력은 있는 건지 템빨제국의 영토보단 다른 왕국들을 활동 지역으로 삼았는데,그중 하나가 바로 발할라였다.
물론 발할라엔 그들을 진압할 정도의 여력이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죽지 않는다.
죽어도 부활한다.
당장 놈들을 잡아 족쳐도 잠시 뒤에 다른 곳에서 부활해서 또 사고를 치기를 반복했다.
법령에 의거해서 감옥에 가두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감옥에 가둬봤자 일주일이 한계였다.
시스템이 주는 제약이다.
플레이어의 권리를 위해서라나,뭐라나.
애초에 바보가 아닌 이상 순순히 감옥에 갇히는 놈도 없었다.
잡히면 차라리 자살을 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자살조차 불가하도록 사지를 제압하는 게 썩 쉬운 일도 아니고,미리 독약을 먹어두면 답도 없다.
예로부터 야탄교의 짭짤한 부수입원이 독약의 제조와 유포였으므로 독약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플레이어들의 소란을 손쉽게 진압하는 방법은 반복해서 죽이는 게 최고죠.
집요하게 랩따를 시켜서 소극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놈들의 위치를 찾는 즉시 출동해서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하이랭커를 투입할 필요가...”
“그야 나도 안다만. 럭,스캇,봉드레 등의 주력은 지옥에서 활동하는 중이고 다른
장군들은 전선에서 무신의 추종자를 막고 있잖나. 그렇다고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건
사마천 공이 반대할 거고.”
“마침 오아시스가 해수를 잡고 귀환했습니다.”
“오아시스…? 그 아이는 좀…”
아레스가 달갑잖단 반응을 보였다.
오아시스도 하이랭커의 범주에 들어가긴 했지만 막말로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수준의 레벨에 불과했고,무엇보다 페널티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는 패배해선 안 된다. 집단으로 활동하는 랭커들에게 고립 되서 죽기라도 했다간 이번에야말로 무패왕의 칼집에게 버림받을 터였다.
“PK와 사냥은 분야가 완전히 달라. 몬스터의 인공지능엔 한계가 있는 반면 플레이어의 행동 양식은 예측이 힘들잖나. 굳이 경험이 적은 오아시를 파견해서 위험에 빠뜨리고 싶진 않은데.”
오아시스는 발할라의 희망 중 하나였다.
아레스는 그가 십만대적검을 무사히 마스터하길 바랐다.
책사가 빙그레 웃었다.
“오아시스가 말하더군요. 지옥 원정대에 참가했을 당시 템빨단원들에게 정말 많은 걸 배웠다고요. 이제와 말씀드리는 건데,그 아이가 잡은 해수들의 레벨이 500대였습니다. 심지어 그중 둘은 네임드 보스였죠.”
네임드 보스의 인공지능과 변칙성은 어지간한 탱커보다 우월하다.
“이제 애물단지 취급은 그만하시고 믿어보시죠.”
“크음...”
보름 뒤.
발할라에서 소란을 피우던 플레이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필살(必殺).
검을 한 번 뽑을 때마다 플레이어를 대량 학살하는 오아시스의 검력은 가히 압도적이어서 금세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의 활약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라우엘의 귀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발할라에 인재가 많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아시스님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더군요.”
“십만대적검도 쓴다며?”
“네,아직 학살검 하나뿐이긴 합니다만...”
“그것만으로도 화력 면에선 전설급이라고 봐도 무방할 걸.”
“혹시 불쾌하진 않으십니까? 무패왕의 검술은 본래 폐하의 시그니쳐 스킬이었는데 오아시스 님과 공유하게 된 셈이잖습니까.”
“전혀. 오아시스는 매사에 진중하고 올곧은 사람이다. 그가 강해질수록 우리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무패왕의 검술은 내 시그니쳐스킬도 아니지. 독점욕 따위 없어.”
게다가 그리드가 습득 중인 무패왕의 검술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리드의 레벨과 능력치가 오아시스를 압도하기도 했다.
같은 십만대적검이라고 해도 그리드의 검술이 오아시스의 검술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뻔히 알면서 떠보기는.”
“하하,문득 예전의 폐하가 떠올라서요.”
라우엘이 모루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자루의 성검마저 제련되어 추출되는 중이었다.
그리드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들.
천사가 된 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그 귀중한 작품들을,그리드는 단 한 자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해체해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금의 그리드는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미래만을 보았다.
‘여기도 없군.’
마지막 성검의 추출을 완료한 그리드의 인벤토리에는,
[아다만티움을 얻었습니다.]
총 41개의 아다만티움이 쌓여있었다.
아쉽게도 디바인 스톤은 단 1개도 건지지 못했다.
디바인 스톤은 핵세타이아 신이 만든 광물이니만큼 후임 천사...
그러니까 칸에겐 사용권한이 없던 듯했다. 내심 예상했지만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입맛을 다신 그리드가 말했다.
“발할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이참에 아레스 아저씨한테도 새로운 무기랑 갑옷을 만들어줄 생각이야.”
아다만티움의 추출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도들에게 무구를 만들어주고도 남을 양이었다.
현재 지옥에서 활동 중인 템빨단원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아이템에 필요한 재료를 스스로 수급한 상태였으므로,그리드는 남는 아다만티움을 아레스에게 지원하고 싶었다.
발할라가 요충지로 거듭난 것은 물론이고 아레스가 템빨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먼저 성의를 보였으니 보답해야 옳았다.
더욱이 그리드는 예전부터 아레스에게 호감을 품어왔다.
성격에 뒤끝이 없고 무엇보다 유능했으니까.
그리드의 템빨을 무장한 군대를 발할라 소속으로 옮긴 뒤 아스모펠이 지휘하게 만들면...
그건 정말 최강의 군대가 될 것이었다.
군대를 믿고 맡겨도 될 만큼 신뢰를 쌓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라우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젠 제 조언 없이도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는군요.”
“밑밥 깔지 마라. 너 없으면 안되니까 도망칠 생각 말고.”
“걱정 마세요. 떠나라고 등 떠미셔도 안 떠나니까.”
무가치한 욕심들을 버린 이후.
그리드는 한층 더 현명해졌다. 무력이나 감정으로 호소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위력적인 수준을 넘어서 위대해져가는 것이다.
***
“약하더군요. 겉모습만 그럴듯하지 위력은 기대 이하였어요.
하찮은 존재가 휘두를지언정 위대한 결과를 만드는 수준이 됐어야죠.”
대천사장 리파엘은 늘 그렇듯이 방실방실 웃었다.
아름다운 소년 같은 외모에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마냥 순수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사납고 독했다.
“자고로 성검이란 인류 역사에 불멸할 업적을 남겨야 옳은 법인데,당신이 만든
성검들은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템빨신의 뱃속에 들어갔군요.
천상의 광물에 저의 가호를 받아 만든 무구가 한낱 쓰레기가 됐으니 당신은 천상을
욕보인 셈이에요. 당신을 믿고 날개를 달아준 저를 모욕한 것이기도 하죠.
생전에 많은 업을 쌓아칭송 받았다고 들었는데,허명에 불과했군요?
그 불룩 튀어나온 배를 봤을 때부터 의심이 들긴 했어요.
당최 얼마나 게으르면 우리에 갇혀서 뒹구는 가축마냥 지방을 축적한 건가요?
조금 더 부지런하게 일할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배 나온 천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처음에 소식을 접했을 땐 단순히 템빨신이라는 인신이 몸시 뛰어나구나 싶었었다.
하지만 리파엘의 질책을 받자 자신의 소양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핵세타이아 신의 공방을 빌려 쓰는 주제에 성검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으니 큰 죄책감을 느꼈다.
리파엘의 목소리가 상냥해졌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을 믿어요. 생전의 기억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정진한다면
그때는 좀 더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한 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한 가지 조언을 해줄까요? 천사에게 빛의 고리와 날개가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레베카 여신께서 가호를 내리셨단 증거이되 빛의 힘을 응축시켜 놓은 것이에요.
말인 즉 활용이 가능하다는 의미죠.”
“여신께서 내리신 가호...”
“네,제가 내리는 가호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요.
그걸 이용해봐요. 다만 끔찍하게 고통스러울테지만,
천상을 위해 애쓰는데 고통 따위 대수인가요?”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대답하는 천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한낱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행복하지 않을 뿐이다.
천사가 되어 다시 망치를 쥐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냥 기쁘고 행복했었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가 인간들을 해쳤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턴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천상이란,천사란 인간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던가?
템빨신이야 역적이므로 토벌해야 마땅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두루 해쳐야 한다면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윽...”
고뇌하던 천사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어깨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진 탓에 생각이 멈춰버렸다.
떨리는 시선을 돌려보니 리파엘의 고운 손이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임무에 충실하면 되요. 그게 천사의 의무이고 여신께 사랑 받는 비결이죠.
잡념 따위 버리자고요.”
환희 웃으며 천사의 어깨를 두드려준 리파엘이 공방을 떠났다.
그리고 헥세타이아가 갇힌 감옥이 있는 방향을 잠시 아쉬운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쯤 조언했으면 됐겠죠.”
존재를 희생시켜 만드는 검은 마검이 된다.
하물며 천사를 희생시켜 만든 마검의 위력은 리파엘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드래곤 웨폰과 가볍게 비길 터였다.
‘게다가 지옥의 악마들과 상성이 좋아.’
바알 힘내요.
누가 들으면 기겁할 말을 지껄이면서,리파엘은 여신께서 기거하는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리온의 배신을 알리고 신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충언을 드릴 계획이 었다.
이전 세계에서도,그 이전의 세계들에서도 그랬듯이,충분하게 다져진 대지는 스스로도 존재할 수 있으니까.
물론 여신께선 아무런 대답도 없으실 테니 결정은 자신이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