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11화
‘구해 줘? 왜?’
빛이 도래하자 혼돈은 어둠을 잃었다.
나팔 부는 천사들이 이룬 행렬의 끝에 레베카 여신이 계셨다.
여신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물을 빚자 도미니언 신과 쥬다르신이 곁에서 도왔다.
창세기의 서막이다.
지상에 강림한 레베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천지창조였으며 가리온과 세계수는 이때 탄생했을 공산이 컸다.
가리온 또한 천상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레베카를 어머니로 뒀다는 의미다.
물론 탄생 이후 지금까지 쭉 지상에 머물러온 까닭에 천상의 다른 신들과 성향이 다를 수도 있다.
피아로와 그리드에게 접근해온 것까진 이해 범주 내였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애초에 구해 달라니?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신이, 심지어 레베카를 뒷배로 둔 신이 도움을 바랄 처지에 놓였다고?
“...”
그리드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턱을 어루만지는 그의 마음엔 이미 의심이 싹튼 상태였다.
가리온이 존경 받아 마땅한 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되 마냥 신뢰하진 않았다.
옳은 판단이다.
파그마가 겪었던 첫 번째 인마대전과 당대의 인류가 겪은 두 번째 인마대전,그리고 옛 칠악성 에피소드 등.
역사가 증명하듯 신들은 수많은 죄를 저질러왔다.
심지어 겉으론 아닌 척,뒤로 은밀하게 범했다.
대놓고 쓰레기인 바알보다 훨씬 더 음흉한 것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아는 그리드가 가리온의 명성만 믿고 그를 신뢰한다?
그래서야 바보밖에 안 됐다.
‘함정 같은데.’
물론 기회일 수도 있다.
가리온이 표면 그대로 중도를 걷는 신이라면.
오직 인간들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 맞다면,천상의 신들과 하등 관계가 없는 신분이 된다.
위기를 겪는 것도,그리드에게 의지하려는 태도도 납득이 됐다.
‘이때 도와서 같은 편으로 삼으면 큰 힘이 되겠지.’
일단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게 크다.
근본적으로 나무이기 때문인지 감정의 표출이 적고 소통이 힘들었던 세계수와 달리 가리온은 보통의 신과 닮아있었다.
인간과 비슷하단 의미다.
고작 필담으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정도였으니 원활한 소통이 가능해 보였다.
‘조금 열 받긴 하지만...’
- 나를구해줘
땅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또 다시 울컥하는 그리드였다.
띄어쓰기 안 하는 신이라니.
물론 가리온을 구하는데 성공하면 실제 대화가 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이어서 조언을 토대로 질문했다.
“어떤 상황이기에 구해달라는겁니까? 우선 당신이 놓인 상황부터 알고 싶군요.”
-땅회복시킬때마다신력소모됨
-당대에검성이많아서신력자꾸잃음
‘비반이랑 크라우젤이 잘못 했네.’
그러게 왜 자꾸 세상을 베냐고...
검성의 강력한 검술을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그리드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아슬아슬하게감당가능했음
-근데요즘사람들
-나보단템빨신을숭배함
-내신력회복느려짐
“...어, 으음...”
그리드는 새삼 실감했다.
자신이 세계관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민망하면서도 자부심이 느껴졌다.
-왜웃음
“미안해서 쓴 미소를 지은 겁니다.”
-괜찮
-템 빨신은잘못한게아니라대단한거
‘과연... 올곧고 안목도 높군.’
괜히 존경 받는 신이 아니다.
그냥 이대로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안그래도힘든데제라툴탓에망함
-개가땅을난도질해서신력다잃음
‘역시 제라툴이 개새끼다.’
모든 잘못과 책임을 제라툴에게 떠넘기고 마음의 안식을 찾는 그리드였다.
글씨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머니께도와달라고부탁함
-근데묵묵부답
“어머니는... 레베카 여신을 말하는 거겠죠.”
-맞음
-어머니가내신력충전가능
-근데불러도답없음
레베카의 침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됐던 이슈다.
Satisfy 오픈 후 2년 정도.
그러니까 초창기 때까지만 해도 퀘스트 등을 통해 레베카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체험담이 싹 사라졌다.
심지어 데미안이 교황이던 시절에도 레베카의 신탁을 직접 받은 건 단 2번뿐이라고 했다.
그것도 처음에만 그랬고 이후로는 쭉 침묵했다고.
그리드도 마찬가지다.
그리드가 들었던 여신의 상냥한 목소리는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목소리가 정녕 상냥했었는지조차 이젠 불확실했다.
‘뭐지?’
레베카가 인류를 대상으로 침묵하게 된 이유는 다양한 추측이 가능했다.
타락한 교황 드레비고를 계기로 수차례 내란을 겪은 레베카교를 책망하는 걸 수도 있었고,
대악마가 강림했을 때 신이 인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앙을 불신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괘씸하게 여긴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마 신을 상대로도 불통하고 있었을 줄이야?
단순히 가리온을 소외시키는 거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충분한 준비 없이 지상에 강림하길 반복한 제라툴이 증명한다.
만약 레베카 여신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제라툴을 제지하지 않았을까?
굳이 전설의 영혼을 수확해서 천사로 만들 정도로 아스가르드는 군비 증강에 집착한다.
여신의 무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제라툴이 무력하게 패배해서 신격을 잃는 결과를 여신이 바랐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대천사들이 인간 학살을 시도했던 사건들도 여신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과거 여신은 성검과 신탁까지 내려가며 레베카교와 소통했었다.
인간들의 종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뜻인데, 천사가 신도들을 해쳐서 기껏 쌓은 신뢰가 무너지는 사태를 과연 원했을까?
새삼 느껴지는 의문들이 많아서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리드가 질문했다.
“혹시 레베카 여신한테 변고라도 생긴 걸까요? 누군가가 여신을 가둬놓고 여신의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고 있을 가능성 있습니까?”
태초신.
즉,레베카와 동격의 신은 무려 2명이나 더 있다.
그중 한울은 힘을 잃은 채 동대룩으로 피신을 간 상태이니 논외로 친다지만,야탄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의 등장은 즉 파멸을 뜻하므로 기록으로 남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야탄이 레베카를...?
그리드가 새로운 의심을 품었다.
레베카가 사실은 선한 신이 맞는데 악신 야탄이 레베카를 억압하고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는 중이다,이따위의 추측이 아니었다.
야탄이 악신이 아니라는 건 지옥 정화 에피소드가 증명한 사실이니까.
그리드는 함부로 선악을 구분짓지 않았다.
다만 상황을 파악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머니를유폐할존재는없어
-설령야탄이라도안돼
-야탄과어머니는서로협력할뿐간섭은못해
“...?”
그리드가 의아해졌다.
가리온의 글씨가 멈췄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글씨가 이어지질 않았다.
“가리온?”
그리드가 재촉하고 또 몇 분이 지나서였다.
-템빨신도알다시피
-바알이야탄배신함
-리파엘이나가브리엘은
-어머니를배신할수있다는뜻
지옥의 3악과 대치하는 존재가 제1위 대천사와 제2위 대천사다.
레베카가 다른 신들보다 먼저 만든 천사.
아무 것도 없는 혼돈에서 탄생했기에 레베카의 ‘피’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야탄의 피를 이은 바알이 지옥을 왜곡시켰듯 천상을 왜곡시키는 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리파엘의 재수 없는 낯짝을 떠올린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그럼 작금의 모든 상황은 리파엘의 수작이라는 겁니까?”
-어디까지나추측
-어머니는야탄과상황다름
-항상제자리에계심
-리파엘과가브리엘이
-반란성공할가능성낮아
-어머니의침묵은
-역시어머니의의지일거야
- 이유는몰라
“...당신을 도울 방법은 뭡니까?”
라우엘과 논의 끝에 그리드는 가리온을 돕기로 결심했다.
가리온의 그간 행보를 봤을 때 우리를 적대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무방했고,대화를 통해 약간의 신뢰도 생겼다.
애초에 뒤통수 칠 위치에 있는 신이 아니었다. 최소 중립으로 봐야 옳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도움을 요청하면 의심하고 경계할 것이었으나,
-템빨신이나를신으로인정해줘
-지금사람들이가장믿는신은템빨신
-템빨신한테인정받으면내신격회복됨
-작은신전하나만세워줘
가리온의 요청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가리온은 단지 그리드의 인정을 원할 뿐이었다.
이는 그리드가 가리온의 목줄을 거머쥔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가리온이 그리드의 인정을 받고 신격을 회복할 경우.
그리드가 가리온을 부정하는 순간 그 신격을 다시 잃게 될 테니까.
“그건... 레베카 여신을 배신하는 행위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천상에서도 좌시하지 않을 텐데요?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어쩔수없어
-나의사명은땅의수호
-땅위에서살아가는존재들을지키는거
-지금이 순간에도재난을겪는사람많아
-나는그들을도와야해
-어머니나천상과의관계는중요치않아
위대한 신.
숭배 받아 마땅한 존재.
가리온의 본질을 깨닫고 일말의 의심마저 거둔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였다.
“그럼 당신은 내가 지킵니다.”
-............
땅에 무수한 점이 찍혔다. 계속, 끊임없이 찍혔다.
땅이 아프면 안 된다고 걱정할 땐 언제고,갑자기 왜 땅을 학대한단 말인가?
황당해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지의 신 가리온이 얼굴을 붉히고 도망칩니다.]
“...”
높은 확률로 아저씨다.
지난 기억들을 회상하며 직감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발치엔 잘 부탁한다는 글씨가 남아있었다.
* * *
템빨신전의 숫자가 무려 5,000개를 돌파했다.
하나 같이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음에도 그랬다.
거대한 제국 전체가 그리드가 신앙을 수급하는 장치로 가동하는 셈이다.
거기에 그리드가 숟가락 하나를 올려놓았다.
가장 많은 신도들이 오가는 템빨신전 본단 옆에 가리온의 신전을 세웠다.
비록 작지만 초라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템뻘신전과 비교하면 작은 거니까.
게다가 라인하르트의 건축가와 조각가 중엔 장인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신전 건설 경험이 많아서 가리온의 신전은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가리온 신의 모습이... 제가 상상해온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라우엘이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템빨신전 좌측에 선 가리온 신의 석상은 우측에 선 칸의 석상과 달아있었다.
덩치 큰 노인의 모습.
칸처럼 배도 나오고 어깨도 떡벌어진 것이 후덕하고 듬직했다.
“그래? 넌 어떤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야 인자하고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이죠. 사리엘 공처럼 미소가 잘 어울리는, 그런 이미지?”
“너무 판에 박힌 이미지 아니냐?”
곁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던 사리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뭔가 충격을 받은 눈치였는데,공교롭게도 아무도 몰랐다.
사리엘은 그리드 앞에선 늘 남성체의 모습이었고,남성체의 모습도 아름답긴 했지만 여성체의 모습일 때보단 관심을 덜 받았다.
애초에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가리온 신의 석상에 쏠려있었다.
“그래도 평소 가리온 신이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제가 상상한 이미지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긴 한데... 아니야.”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으신 분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게... 됐다. 아무튼 나중에 괜히 실물 보고 실망하느니 미리 기대치를 낮추는 편이
좋다니까? 응? 사리엘 넌 표정이 왜 굳었어? 가리온하고 사이가 나빠?”
“아닙니다. 가리온 신은 천상에 머문 적이 없어 실제로 뵌 적이 없지만 존경해 마땅한 신임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다행이야.”
인간들이 믿고 의지해도 좋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리드가 문득 떠올렸다.
‘대부분의 인신들은 인간들의 편이 아닐까?’
그리드처럼 인간이었으나 숭배 받아 신이 된 존재들.
대부분 신화 포식자에게 잡아먹혔거나 신화 포식자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는 탓에 만나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가리온의 힘을 빌리면 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대지의 신이니만큼 대륙 전역에 시선이 미칠 테니까.
가리온이 스컹크 탐험대와 협동하면 핑장한 시너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엄청난 우군을 얻은 거구나.’
그리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당하기 힘든 적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광명을 찾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