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6-7화
“우리도 곧 초월의 격 쌓는 거 아니냐?”
반트너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반 년 넘게 지옥의 마물들을 토벌해온 그는 과연 범상치가 않았다.
갑주를 초라하게 만드는 단단한 근육에 철근처럼 질기고 두꺼운 핏줄이 솟았는데,
핏줄이 꿈틀거릴 때마다 민머리의 문신이 물결치며 인상이 확 바뀌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악마보다 더욱 사납고 흉포하게 보일 정도였다.
5차 전직과 함께 습득한 <광철갑> 스킬의 영향이다.
탱커계열 플레이어. 아니,모든 전사계열 플레어들이 탐낼만한 궁극기.
광철갑은 지속적으로 생명력이 하락하는 대신 방어력과 공격력이 대폭 상승하고 일부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감소하는 ‘패시브스킬’이다.
자연 회복력이 높은 5차 전직군 탱커 입장에선 상시 발동해도 부담감이 없는,말 그대로 궁극의 스킬이었다.
“그 얼굴로 진지한 표정 짓지 마라. 몬스턴 줄 알고 죽일 뻔했네.”
광철갑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외형의 변화에 있었다.
활성화시 근육의 부피가 커지는 바람에 기본 생김새에 따라서 인상이 아주 험악해질 우려가 있었다. 지금 반트너처럼 말이다.
물론 반트너는 광철갑으로 인한 외형 변화를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수용했다.
그는 대머리와 근육, 문신과 수염이야말로 사내다움을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믿는다.
캐릭터 커스텀 단계에서 머리를 밀고 새긴 문신과 숱 많은 턱수염이 증거였다.
“뭐라고~? 쪼렙 새끼가 하는 말이라 그런가? 파리가 앵앵 거리는 것마냥 제대로 안 들리네?”
멋진 사내를 꿈꾸는 반트너였지만 친구와 있을 때는 어린아이가 됐다.
남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한 자릿수 대악마와 교전할 때마다 사망한 탓에 5차 전직을 못한 폰을 마구 놀려댔다.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벙어리가 된 폰을 대신해서 레가스가 말했다.
“유라 님을 보면 알게 되겠죠.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초월자가 되실 분은 그녀니까요.”
“음,그렇지.”
전설의 위계는 업적과 명성으로 쌓인다.
만약 그리드와 템빨단이 바알 레이드에 성공하고 지옥 정화를 이룬다면,원정대원 중 활약이 컸던 일부는 전설이 될 공산이 컸다.
반면 초월자는 무도의 극의에 도달해야 얻는 위계였다.
매일 같이 계속되는 수련과 전투를 극복하고,자신보다 훨씬 더 강대한 적과 수십 차례
싸우고 승리해야하며,순수한 무력만으로 세계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지가 되어야했다.
쉽게 말해서 그리드처럼 돼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템빨단원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지난 반 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 속에서 활약해온 데빌 슬레이어 유라의 무력을.
특히 2달 전부터 출현 빈도가 늘어난 대악마와의 교전에서 승리할 때마다 그녀는 급격히 성장했다.
그녀가 쏘는 멸악의 빛은 반 년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짙었다.
무돌이라는 해피망측한 이름의 정령왕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질수록 육체능력과 검술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기도 했다.
일행이 한 자릿수 대악마의 습격을 받고도 반격해서 승리해온 이유는,이종족 왕들의 활약뿐만이 아닌 유라의 활약도 컸던 것이다.
“슬슬 잡담은 삼가라. 또 몰려오는군.”
이젠 이종족 왕들도 유라를 잘 따랐다. 어느 시점부터 그녀의 무력과 통솔력을 인정하고 반발심을 버렸다.
끝내 반용족 왕 번츠델마저 그녀를 인정하고 대장이라는 호칭을 썼을 땐 템빨단원 전원 감격했다.
지슈카가 유라의 어깨를 토닥여줬고 유라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었다.
“...”
유라의 좌우로 도열한 이종족 왕들의 시선이 지평선에 닿았다.
우그러진 하늘과 일렁이는 대지.
어린아이가 그은 선처럼 울퉁불퉁한 지평선이 그 중심에 있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는 중이다.
구름이 몰려오는 듯했다.
족히 수만의 마물이 일제히 진격해오는 광경이었다.
2달 전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발생한 현상이다.
유라는 이 현상의 원인을 알고 있다.
지옥 유수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마르바스.
지옥의 진실을 알고 지옥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악마.
바알 파벌과 아모락트 파벌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입지를 쌓은 그에겐 지옥의 마물들을
소속과 상관없이 통솔하는 권능이 있었는데,이제 그 권능은 바알의 것이 되었다.
바알이 그를 죽이고,빼앗은 것으로 보였다.
“한 5시간 정도 싸우겠네.”
“아까보단 낫군.
“바르바토스의 시야가 있는 사람들은 대악마의 난입을 경계해줘.”
“내가 생각해 봤는데,만약에 바르바토스가 없었으면 2달 전부터 우린 망했을 거야. 그치?”
“바르바토스는 사실상 우리 편이라고 봐야 무방하지.”
템빨단원들의 대열이 자연스럽게 둘로 나뉘었다.
길게 이어질 전쟁을 대비하는 거였다.
교대해서 싸우며 스태미나를 안배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림자에 녹아든 페이커와 후방에 자리한 지슈카가 1군과 2군의 균형을 잡아줄 것이었다.
쏴아아아아ㅡ
선두에 선 유라가 무의 정령왕을 몸에 둘렀다. 템빨신의 주황색 신성처럼 번진 무돌이가 그녀의 무기와 갑옷에 덧씌워졌다.
템빨신의 사도라고 자처해도 믿길 정도로 그리드와 닮은 모습이었다.
지옥 원정대는 자연히 그녀의 등을 보았다.
신뢰하고 의지했다.
그녀의 초월을 기대했다.
초월의 격.
검성의 직업 특성인 <초감각>과 닮되 보다 광범위한 효용을 자랑하는 그 힘은,지옥의 정화는 물론이고 언젠가 천상의 신들과 싸우게 될 템빨단원들이 반드시 쟁취해야 할 힘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리드 혼자서 고생하게 만들 순 없었으니까.
그리드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되려면 꼭 해결해야할 숙제가 바로 초월의 격의 획득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능성을 증명해줄 인물이 바로 유라였다.
그리드 없는 지옥의 최강자.
“가죠.”
유라가 먼저 도약했고,이종족 왕들과 템빨단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바알의 버프로 강학 된 수만의 마물이 하나의 의지를 이루고 몰려오는 광경은 매일 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협적이었지만,두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템빨단원들의 얼굴엔 도리어 희열이 떠올랐다.
무려 바알이 주도하는 만큼 강력하고,위력에 비례해서 높은 경험치를 주는 이 웨이브는 지난 2달동안 그랬듯이 급격한 성장의 발판이 되어줄 테니까.
또한 지옥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다.
상당수의 마물이 한데 모이는 이때만큼은 지옥 다른 구역엔 여유가 생긴다.
지옥 곳곳에서 마물과 사투를 벌이던 플레이어들이 위기에서 벗어나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터였다.
대부분의 재앙이 그렇듯 예고 없이 찾아오는 대악마들의 습격.
평범한 플레이어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옥에서 사냥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옥을 정학하겠다는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적인 이익이 크기때문이며
템빨단원들에겐 그들의 열정을 유지시켜줄 의무가 있었다.
“어...? 와,유라 다음 초월자는 무조건 페이커가 되는 거 아니냐?”
죽여도,죽여도 다시 몰려오는 마물 웨이브에 휩쓸린 채 싸우길 얼마나 지났을까.
기회를 틈타 습격해온 서열 15위의 대악마가 페이커의 그림자군단에게 발이 묶이더니 목이 찔렸다.
잠시 기세를 잃고 주춤했다가 유라와 이종족 왕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기습의 이점을 전혀 얻지 못하고 도리어 고립되는 형세를 맞이한 것이다.
인마대전에서 사망한 대악마들의 공석을 차지한 새로운 대악마들.
지옥 엘리베이터만 없었어도.
또는 데빌 슬레이어 유라만 없었어도 지옥에서 힘을 축적하고 전대 이상의 공포로 군림했을 그들이 채 성장하기도 전에 죽길 반복했고 그때마다 템빨단원들이 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좋다.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성과를 거두면 된다.
아이템 제작에 집중하느라 성장에 제동이 걸린 그리드가 초조해지지 않도록,우리가 더 큰 노력을...
[무신 제라툴이 지상에 강림하였습니다.]
“...!”
“뭣...!”
백스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제라툴을 목격한 여파로 떠오른 월드 메시지.
그 중격적인 내용이 기세등등하던 템빨단원들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무신 제라툴.
놈이 그리드에게 품은 적대심을 떠올리며 사달이 나도 크게 날 거란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특히 제라툴의 압도적인 무력을 직접 체험해봤던 데미안 등의 반응이 격했다.
고작 한 줄의 월드 메시지로 지상의 위기를 떠올린 그들은 더 이상 마물 따위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상황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며 귀환을 모색했다.
여기까지 고작 몇 초였다.
[템빨신 그리드가 무신 제라툴을 패퇴시켰습니다.]
“...?”
“???”
그래서 더욱 경악했다.
반쯤 넋이 나간 템빨단원들이 멍한 얼굴로 눈앞의 마물을 썰었다.
의식이 반쯤 날아간 상태에서도 그들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지난 세월 동안 그들이 얼마나 많은 적을 베어왔는지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평소부터 멘탈이 좋기로 유명한 레가스였다.
“유라 님은 우리 예상보다 빠르게 초월자가 되겠네요.”
우리의 성장은 늘 그리드보다 서너 발자국 느렸으니까.
그리드가 초월자 너머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으니,우리는 슬슬 초월자에 진입할 단계가 맞는 것이다.
* * *
백스의 백성들을 안심시킨 후.
그리드는 곧바로 귀환 주문서를 써서 라인하르트로 복귀했다.
훼손 된 육체가 회복되지도 않았건만,이미 전 세계가 무신의 패퇴 소식을 접한 상태였다.
그리드의 이름이 온갖 뉴스를 장악했다.
“주군! 폐하! 신이시여!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당연히 라우엘도 소식을 접했다.
버선발로 뛰어나와선 그리드를 끌어안고 울었다. 울면서 웃는 꼴을 노에가 비웃었다.
자신이 큰 공을 세웠다는 허풍을 덧붙이면서였다.
“무신을 일합에 격파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이제 완전히 절대자의 반열에 오르신 겁니까?”
자세한 내막을 들은 라우엘이 눈을 반짝였다. 맑은 눈빛에 희망만이 가득했다.
당장 바알을 퇴치하러 가자고 말할 기세였다.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절대자를 운운할 정돈 아니야.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실감했다.”
그리드는 제라툴에게 단 이격을 당한 대가로 불사를 소모했다.
무려 10초 동안의 무적.
불사의 사기성을 등에 업고 승리하긴 했지만 1대1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지옥,혹은 천상.
그리드가 적진에 침입하는 입장이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다를 것이었다.
바알이며 천상의 신들이 그리드와 굳이 1대1로 싸워줄까?
그나마 바알은 괴팍하고 지옥의 악마들은 서로 쉽게 협력하지 않는다지만,천상의 신들은 레베카를 구심점으로 똘똘 뭉쳐있다.
심지어 천사 군대를 거느렸을 정도다.
그리드는 필연적으로 대군과 싸워야했다.
하물며 인계 강림 상태의 제라툴보다 월씬 강력할 대적들과.
그들을 상대론 1대1,1대2 승리도 장담하기 힘들 렌데 다구리까지 당해버리면...
전혀 승산이 없는 것이다...
‘이번만 해도 그래. 만약 제라툴이 혼자가 아니었다면?’
제라툴이 리파엘과 함께 강림하는 상황을 가정해 본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애초에 1대1과 1대 다수의 난이도는 차원이 다르다.
하물며 상대의 실력이 자신과 동급이라고 가정하면 더욱 그랬다.
불사의 제한 시간 내에 한 명을 패퇴시키기도 힘들었을 거고,설령 패퇴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해도 나머지 한 명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면 사도들을 소환해서 싸웠겠지만,아무튼 그리드는 절대자들의 ‘압도적인 공격력’에 대항할 방어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드래곤 아머 세트를 완성해야된다.’
해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야테가 말하지 않았나.
절대자 간의 싸움은 본래 대부분 단시간 내에 끝났다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게 순리인 이상,드래곤 아머 세트를 완성한다고 해봤자 탱킹 능력엔 한계가 있을 거란 의미가 됐다.
‘하지만 일단은 해봐야지.’
고작 40퍼센트 확률로 발동하는 절대방어와 100퍼센트 확률로 발동하는 절대방어의 위력은 전혀 다를 것이다. 세트를 완성했을 때 생길 특전도 기대가 됐다.
“...?”
의자에 등을 눕민 채 생각에 잠긴 그리드.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고자 잠자코 있던 라우엘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풍경이 변해갔다.
그리드의 심장에서부터 번진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강철로 벼려지면서 주변의 모든 걸 뒤덮어갔다.
세계가 무한히 확장되었고 풍경을 삼킨 강철은 산처럼 솟구쳐 올랐다.
강철의 협곡.
템빨신의 심상이었다.
끝 모르고 치솟은 협곡의 틈새에 덩그러니 앉은 그리드가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주작의 심장이 용암이 되어서 흘러내렸다. 선회하며 그리드의 심장에 스며들어갔다.
쿠르르릉...
협곡을 이룬 강철이 열기에 녹았다.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협곡의 크기는 줄지 않았다.
그리드의 심상에서 강철은 무한했다. 또한 그리드의 바람에 호응했다.
갑옷의 형태를 빚고 또 빚기를 반복하며 수십 수백을 이루더니 그리드의 몸에 덧씌워졌다.
덧씌워질 때마다 흐릿해져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마주보고선 라우엘은 분명하게 느꼈다.
지금 주군께선 수백 겹의 갑옷을 두르셨다.
심상조차 템빨인 것이다...
하늘 위의 하늘.
황금빛 구름이 대지를 이룬 곳이 있다.
아스가르드.
일곱의 주신과 열여덟의 하위신이 기거하는 천상이었다.
“...”
신전 앞에 다다른 무신 제라툴의 표정은 태연했다. 위로 치솟은 눈썹과 단전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엔 위엄이 있었고 걸음걸이는 위풍당당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마중 나온 천사의 평가는 인색했다.
“볼품없네요.”
제1위 대천사 리파엘.
최근 465명으로 늘어난 천사군단의 장으로,전쟁의 신 도미니언 다음가는 군권을 지녔다.
여신을 알현할 권리를 지닌 유이한 존재 중 하나이므로 천상의 실세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꽤 많은 인간들이 당신의 패배를 목격했더군요. 소문이 빠르게 퍼질 거예요.
허락 된 삶이 짧은 탓인지 인간들은 향락에 집착하잖아요? 무신이 도망쳐버린 일화를
오래토록 떠들며 마약처럼 즐기겠죠.”
“이젠 신 취급도 안 하겠다는거냐?”
“응? 하하,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일화가 아니라 신화죠,신화. 심지어 영원불멸할 신화.”
“한낱 이야깃거리가 어찌 영원할까. 이 세계에 영원한 존재는 오직 신뿐이다.”
어차피 늘 그랬듯이 세상은 멸망하고 다시 시작될 것이다.
레베카와 야탄이 그리 만들 터였다.
그러므로 괘념치 않기로 했다.
쯧,리파엘의 은근한 도발 탓에 무너지기 시작한 평정을 간신히 되찾은 제라툴이 신전에 들어섰다.
아스가르드에 있는 스물다섯 개의 신전 중 2번째로 거대한 신전.
이곳이 나의 권위를 증명해준다.
그래,인간 따위들이 뭐라고 떠들어봤자 나는 나다.
무신 제라툴이다.
포도주를 독째로 들어 벌컥벌컥 마시는 그에게 리파엘이 경고했다.
“뭐,그래요. 영원한 건 없다고치죠. 하지만 이번 세계에서 당신이 반쯤 망한 건
사실이잖아요? 용살자에게 패배했을 때완 경우가 달라서 저도 큰 도움을 못 드려요.
인간들이 당신의 무위를 의심하게 된 이상 앞으로 꾸준히 신격이 떨어질 걸요.”
“넌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아뇨?”
“나는 무신이다. 인간을 비롯한 짐승들의 본성이 열망하게 되는 무력의 근원이 바로 나다.
격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오르는 속도가 빠르므로 걱정할 필요 없다.”
“…아하!”
고개를 가웃거리며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리파엘이 손뻑 쳤다.
빙그레 휘는 눈매 사이에 박힌 벽안이 얼음보다 차가웠다.
“지금 당신 제정신이 아니군요? 하하,무서워라. 전 이만 가볼게요! 한동안 나오지 말고 푹 쉬어요!”
“...언젠간 기필코 죽인다.”
리파엘이 떠나고 나서야 살의를 드러낸 제라툴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모든 게 허무해서였다.
사실 그도 알고 있다.
무신은 무의 근원 따위가 아니다.
도리어 무가 먼저고 무신이 다음에 생겼다.
무신이야말로 수많은 존재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한 신이었으며 그 신의 이름은 치우였다.
치우는 신전조차 없다.
굳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고고히 존재한다.
“증명...하면 된다.”
아스가르드의 하늘은 태양이 닿지 않는 우주다.
바닥에 깔린 구름이 빛을 뿜지 않았다면 온통 어둠뿐일 공간이었다.
빛을 밝히지 않아 어두운 신전이 제라툴의 일그러진 표정을 가려주었다.
템빨신.
치우의 인정을 받은 놈.
또한 치우처럼 인간들의 염원에서 비롯한 신.
세계의 흐름이 급격히 빨라지게 만든 놈은,과연 드래곤들의 평가대로 순리에 벗어나 있었다.
시간의 개념이 무색하게 고강했다. 얼마 전 보았을 때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예측 이상이었다.
그 탓에 당연히 승리할 줄 알았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분노보단 후회가 밀려왔다.
리파엘의 조언대로 다른 신들의 협조를 구해 삼위일체를 이뤘다면.
최소한 성역을 세울 정도의 격을 확보한 뒤에 지상에 강림했다면.
아니, 차라리 성검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진즉에 놈을 처리했다면,오늘 날의 수모는 없었을 테니까.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의 사건을 계기로 더욱 더 기고만장해졌을 템빨신은 언젠가 반드시 천상에 도전할 것이다.
그때.
놈이 스스로를 가장 자부하는 순간에 죽여 버리면 된다.
오늘 겪은 수모를 몇 배로 되갚아줄 수 있다...
스아악!
제라툴의 손끝에 창백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상당히 짙은 신살의 자격이었다.
지상에 가지고 강림했다면 그리드를 반드시 멸했을 기운이다.
비록 신격이 크게 훼손됐다곤 하나,아스가르드에서 제라툴은 여전히 무적에 가까운 존재였다.
설령 리파엘의 예언대로 점차 약해질지언정 그리드에게 패배할 일은 없으리라고 자부했다.
‘승리하고 또 승리해라. 나를 발판으로 삼은 김에 기필코 이곳까지 올라라.’
그때 네놈을 죽임으로써 신살의 자격을 완성하고 치우를 멸하겠다.
레베카가 나를 만들었다는 흔적마저 지우고,이 신전을 부수어,나는 나를 완성할 것이다.
내가 무신이고 유일한 신이다.
***
“여긴...”
심상에 담긴 협곡의 풍경은 그리드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를 닮아있었다.
대악마 베리드와 싸우며 최초의 서사시를 썼던 곳.
그리드가 비로소 완성됐던 장소다.
“테일렌 협곡이군요. 폐하께서 누군가의 후예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우뚝 섰던 역사적인 장소죠.”
“라우엘 너는 별걸 다 기억하네.”
“당연합니다. 폐하는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여 섬기는 대상이니까요.
제 생일은 잊어도 폐하에 대한 건 모조리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그리드의 잠재력을 엿봤었기 때문이다.
그리드와 함께하면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믿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었다.
어디까지나 계기에 불과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는 동안 라우엘은 점차 그리드에게 매료되어갔다.
템빨을 바라고 그리드를 섬기기 시작한 그가 템빨이 필요 없는 내정관을 자처하게 된
이유는 순수하게 그리드를 돕고 싶다는 열망이 욕심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함께했던 동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페하를 사랑하죠.
반트너 님은 요즘도 술에 취하면 제게 전화를 겁니다. 폐하께서 첫번째 서사시를 썼던
순간의 동영상을 보는 중인데 너무 감동적이라 눈물이 흐른다고요. 제가 그 술주정에
시달린 횟수가 정확히 866번이니,실제로 반트너 님이 폐하의 동영상을 돌려 본 횟수는
족히 1,000회를 넘겠죠. 후로이님은 1만 번 이상 돌려 봤을 테고.”
“...”
“이참에 말씀드리자면 S.A그룹도 폐하께 상당히 호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폐하께선 부정하시겠지만... 폐하의 테마곡을 들었을 때부터 느낀 것인데 S.A는
폐하를 무척 잘 이해하고 있어요. 이번 심상의 형태만 봐도 폐하께 뜻 깊은 장소를
구현하지 않았습니까?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만,폐하께서 시스템이 제한한 수치를 넘어서는
성장을 거듭 반복해도 아무런 제지가 없는 이유는,그들 또한 지옥의 정화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 전부터 증명된 사실이 있다.
그리드가 크게 성장할 때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덩달아 오른다는 점이다.
지난 2달만 해도 지옥에선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드래곤 아머를 만들기 시작한 무렵부터였다.
바알의 버프를 받은 마물 대군이 하루에도 몇 번씩 원정대를 덮쳤고 덕분에 템빨단원들의 성장속도는 급격히 빨라졌다.
이럴 때면 절대자들이 수차례 강조해온 말이 떠오른다.
“그리드가 세계의 흐름을 가속시켰다.”
이를 도쇼가 묵인한다는 건 두 가지 사실을 증명했다.
세계가 지금의 속도를 유지해도 괜찮다는 것.
다만,그 속도에 발맞춰서 모든 플레이어가 더불어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드 혼자선 분명한 한계를 맞이하게 될 거란 사실을 시사하는 바였다.
“지옥을 정학하고나면 새로운 컨텐츠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실은 지옥의 정화를 바라지 않았던 천상의 신들이 전쟁을 선포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지금부터라도 잘 대비를 해야겠죠.”
“저쪽에서 먼저 전쟁을 선포한다고?”
그리드가 진저리쳤다.
인계에 강림한 짝퉁 신 하나한테 죽을 뻔한 마당이다.
다수의 신이 천사군단을 이끌고 공습해온다?
절대로 못 막는다. 멸망밖에 없다.
동료들이 성장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바알 레이드를 최대한 뒤로 미뤄야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원정대에 참가한 사람 중에 몇 명이나 5차 전직 했어?”
“다섯 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폐하의 레벨은 몇이십니까?”
“691.”
“과연 폐하십니다. 벌써 600레벨을 코앞에...”
“591이 아니라 691이라고.”
“육...???"
“드래곤 아머랑 웨폰을 연달아 만들기도 했고,제라툴하고 싸워서 이긴 게 컸지. 짝퉁이긴 해도 무신이니까.”
그 전에 여러 사건을 겪기도 했다.
라우엘이 넋을 잃은 사이 그리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5차 전직이라... 빠르긴 한데,느려. 안 그래도 내가 성장할 여지는 이제 거의 없다고 봐야 무방한데.’
드래곤 아머 세트를 완성하고 신화 초월급 드래곤 웨폰을 몇 자루 더 만들고...
딱 거기까지가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종 스펙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외에 성장할 여지는 레벨밖에 없었다.
치우의 바람대로 신살을 이루는 것?
어렵다.
이번에 제라툴과 싸우면서 확신했다. 전력으로 도주하는 놈을 잡을 수단이 없었다.
그리드가 신이 되면서 강화 된 불사 스킬이 증명하듯,신이 자신의 신전으로 긴급히 탈출하는 시스템은 절대적인 권리였다.
모든 시스템 중 가장 우월한 판정을 받는 권리.
그걸 막고 신을 죽인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
“...응?”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새로 얻은 심상의 상세 정보를 확인하면서였다.
<금(金)의 성역 >Lv.l
템빨신의 심상에서 비롯한 성역입니다.
★금속의 협곡을 세웁니다. 현재 강철.
*협곡을 이루는 금속은 당신의 의지에 호응하여 무기,혹은 갑주를 빚습니다.
*무기의 공격력은 당신의 의지 스탯과 근력 스탯에 비례하며 갑주의 방어력은
당신의 의지 스탯과 체력 스탯에 비례합니다.
*빚는 무기의 개수는 당신이 여태껏 만들어온 무기(유니크 등급 이상)의 숫자와
비례하며,빚는 갑주의 개수는 당신이 여태껏 만들어온 방어구(유니크 등급 이상)의
숫자와 비례합니다.
★당신의 감각은 협곡 전역에 미칩니다.
*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을 ‘반드시 무장해제’시키고 당신이 빚은 무기는 적을 끊임없이 추격합니다.
* 아군으로 인식하는 대상에게 갑주를 씌워 추가 방어력을 선사합니다.
★신이란,자신의 성역에서 전능한 법입니다.
*무장해제 당한 적이 놓친 무기를 모조리 특정하여 강제력을 부여합니다.
*강제력을 부여한 무기의 위력은 여태껏 당신이 만든 무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으며,<갓 핸드>가 무장합니다.
*강제력은 성역이 유지되는 동안 지속되며 지속 시간 동안 초당 2만의 마나가 소모됩니다.
*당신이 빚은 무기가 대상을 공격할 때마다 연마되어 추가 공격력을 얻습니다.
*당신이 빚은 갑주를 당신의 존재에 덧씌움니다.
*갑주 하나당 0.1 초의 지속시간을 지니며,지속시간 동안 피해를 입을 때마다 불사의
쿨타임이 대폭 감소합니다. 단,성역의 유지에 실패할 경우 감소했던 쿨타임이 초기학됩니다.
★주작의 9번째 심장을 완전하게 흡수하였습니다.
*동방의 주작과 더욱 쉽게 공명합니다.
주작의 의지를 즉시 강림시켜 불의 비를 협곡 전역에 내립니다.
*불의 비는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아군을 회복시깁니다.
피해량과 회복량은 주작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나가 소모되지 않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0분.
*당신이 원할 경우 주작의 본체가 현현합니다.
*단, 소환시킨 주작이 사망할 경우 당신과 주작 양쪽에 강력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소환 시 10만의 마나가 소모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2시간.
★금속처럼 단단한 당신의 의지가 아군을 감화시깁니다.
*협곡에 존재하는 모든 아군이 상태이상에 걸릴 확률이 크게 줄어듭니다.
*아군이 상태이상에 저항할 때마다 당신과 아군 전부에게 버프 스킬이 부여됩니다.
단,같은 종류의 버프 스킬과 중첩되지 않습니다.
버프 유지 시간은 버프의 종류에 따라서 다릅니다.
*성역이 유지되는 동안 지속되는 효과이며,별도의 자원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없음.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스킬 자원 소모:마나 10만
‘이런 미친...’
성능이야 진즉에 확인했다.
그냥 사기다.
그래,지금도 충분히 사기였다.
근데 레벨이 존재한다고?
한계에 봉착했다고 생각했건만,성장할 여지가 추가로 생긴 격이었다.
“폐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우엘이 그리드의 굳은 안색을 보고 걱정했다.
괜히 벌써부터 지옥 정벌 이후를 말했다가 부담감을 드렸단 생각이 들어 죄책감을 느꼈다.
심장이 욱신거린다. 봉인 된 흑염룡이 비웃는 듯했다.
“아,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심상을 거둔 그리드가 빙그레 웃었다.
강철의 협곡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두 사람은 그리드의 집무실에 마주보고 앉은 상태가 됐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우리의 목표는 바알이니까.”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기왕이면 빨리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다.
파그마를 해방시키는 퀘스트 때문만이 아니다.
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고통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비급서는 사도들에게 주고,성검은 어차피 쓸 사람도 없으니까 녹여서 아다만티움을 추출...뭐?’
무신의 전리품을 살펴보던 그리드의 표정이 재차 굳었다.
안목이라는 개념으로 치환되는 그의 높은 통찰력 스탯이 성검에서 이질감을 포착한 탓이다.
그리드가 여태껏 만들어온 작품들과 형태가 닮은 성검들.
단순히 도발을 목적으로 만든 표절작이라고 여겼던 그것들에 어럼풋한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표절작이 아니야.”
“ 네 ? ”
“실재하는 물건을 보고 만들었다고 치부하기엔 디테일한 부분들이 너무 달라. 이건 마치…”
기억을 되새기며 만든 듯하다.
마치 그 시절을 그리워하듯,사소한 부분까지 정성과 애정을 담아서.
‘설마...’
차마 입에 담기 싫은 가정을 떠올린 그리드의 얼굴이 사늘하게 식었다.
살의에 물들어 통제 불능이 된 무형지기가 요동치며 주변의 가구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를 진정시키듯 손님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