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5화
단 세 번.
백스의 백성들과 플레이어들은 고작 세 번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저게 과연 노인이 맞나?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살벌한 눈빛과 풍채를 자랑하는 사내가 다짜고짜 나타났을 때 한 번.
풍선처럼 터져 죽는 레베카교 잔당들의 모습이 무척 끔찍해서 눈을 감았었다.
이어서 땅이 무너지고 건물들이 폭발하자 놀라서 눈을 떴을 땐,이미 열여덟 자루의 성검이 빛의 물결을 이룬 상황이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탓에 두번째로 눈을 감았다.
삐이이 울리는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는 와중에 수백수천 차례의 폭발이 연쇄됐다.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이었다. 모든 게 빨랐다.
장님이 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고 위협적이었다.
자신이 몸 어디에 상처를 입었고,누가 자신을 돕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사람들은 혼란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저항은커녕 이해조차 불허하는 압도적인 무력의 위력이었다.
그들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빛이 저물고 폭발이 잠잠해진 뒤였다.
그제야 보았다.
[무신(武神) 제라툴이 강림하였습니다.]
[제라툴이 당신이 쌓아온 무(武)를 부정합니다.]
[당신의 무위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합니다. 캐릭터 레벨과 스킬,
마법 레벨을 포함한 모든 능력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모든 패시브 스킬과 전투 관련 칭호의 기능이 봉인됩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모든 액티브 스킬과 마법의 위력이 99퍼센트 감소합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무신 제라툴이 임시적인 성역을 세웠습니다. 무신의 추종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존재가 자유를 억압당합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아... 으아아...”
무신.
절대자를 논할 때면 자연히 첫번째로 꼽아온 존재.
제라툴의 이름엔 강력한 울림이 있었다.
사람들은 압도당했다.
어럼풋이 상황을 이해한 나머지 도리어 절망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때가 있는 법이다.
흘러가는 상황을 몰랐을 때와 무신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느끼는 사람들의 혼란과 공포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도시 곳곳에 숨은 수만 명의 인구가 완전히 패닉에 빠져버렸다.
그때 거대한 늑대처럼 변한 템빨신의 노예 아니,노에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용맹하게도 무신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사람들은 한 발 늦게 눈치 했다.
일대를 감싸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이 푸른 전류가 노에를 근원으로 삼고 있음을.
하여 더욱 탄식했다.
무신의 손에 머리를 붙잡히고 꼼짝도 못하게 된 노에의 죽음을 직감하고 발을 굴렀다.
찌릿!
노에의 위기가 전류를 동요시켰다. 방벽을 이룬 전류가 불시에 흐트러지며 사람들에게 아릿한 통증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이때 세 번째로 눈을 깜빡였다.
짧았다. 찰나였다.
한데.
“주, 주인...!”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있는 노에의 뒷모습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상에 있던 그리드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광경이 풍경으로 맞물렸다.
딛고 선 땅이 당장 폭발할 것처럼 일렁였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무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며 우리가 단체로 꿈을 꾼 건가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추락 중인 그리드의 몸에서 길게 이어지는 핏줄기가 증거였다.
“폐하아!!”
자취를 감춘 무신을 경계하는 플레이어들과 달리,백성들은 무작정 그리드에게 달려갔다.
자신들의 몸을 켜켜이 쌓아 쿠션을 만들었다.
이미 큰 상처를 입은 듯한 그리드를 온전히 받아주기 위함이었다.
그리드는 그들의 희생을 바라지않았다.
[불사의 지속 시간이 8초 남았습니다.]
녕마가 된 모습을 보여줄 생각도 없었다.
노에의 커다란 몸이 그리드를 감싸 안았다.
까마득한 지상에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들이 그리드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끔 숨겼다.
마침 번지는 주황색 극광이 백성들의 시선을 끌어주었다.
그리드가 두 자루의 드래곤 웨폰으로 펼친 6융합 검무의 잔상이 노에와 그리드가 등진 하늘에 물들었다.
노에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은 그리드가 맥없이 웃었다.
“하야테 님처럼은 안 되네.”
그리드는 하야테와 제라툴의 전투를 목격한 바 있다.
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제라툴은 패주했고 하야테는 멀쩡히 지상에 내려왔었다.
반면 자신은 넝마다.
수차례의 기적이 겹치지 않았다면 이기기도 힘들었을 거다.
물론 그 기적들은 단순한 요행이 아닌 필연적인 결과였다.
제라툴이 ‘무신의 시간’에 진입했을 당시.
그리드의 신격이 제라툴의 신격에 감응했다.
지상에 강림한 여파로 깎여나간 제라툴의 신격이 그리드의 신격을 압도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간 그리드가 쌓아온 신격이 높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대지의 신 가리온이 무신의 시간을 함께 유영하며 실시간으로 대지를 수복시켰듯,
그리드 또한 무신의 시간을 함께 유영했다.
순보조차 느리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1초를 수백 개로 쪼갠 듯했다.
초월자를 넘어선 절대자의 영역.
그제야 비로소 하야테와 제라툴의 실력을 실감한 그리드는 발악적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더 높은 상공에 올라 검을 휘두르는 제라툴의 모습을 포착하고 뒤로 젖힌 손에서
브레스를 뿜었다. 제라툴의 속도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기 위해 폭발 에너지를 추진력으로 삼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검기가 무지막지한 압박으로 다가온 순간에 젖혔던 손을 앞으로 교차시켰다.
화룡 이프리트의 팔을 재현한 건틀릿.
그 안에 내장 된 절대방어와 부상 확률 대폭 감소의 옵션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수십수백 갈래의 파동으로 번지는 검기에 직격당할 때마다 절대방어가 처참히 부서졌지만 다행히 양팔의 부상은 면했다.
절대방어가 부서질 때마다 대미지 내성이 상승한 덕분에 오히려 몸은 더욱 단단해져갔다.
마력 순환이 발생해 약소 브레스의 쿨타임이 초기학되기도 했다.
대신 절반 이상의 생명력을 잃고 말았지만,그리드는 다시 손을 뒤로 젖히고 브레스를 쏘아서 제라툴과의 거리를 좁혔다.
초를 기반으로 삼은 융합 검무를 틈틈이 싹 견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위기를 겪었다.
제라툴이 재차 휘두른 검은 첫 번째 공격보다 월씬 더 강력했다.
진심이 담겼음을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절대방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프리트의 팔과 크란벨의 골반의 절대방어 발생 확률은 각각 10퍼센트.
세트 효과 덕분에 총 40퍼센트의 확률로 귀결됐지만 그래봤자 절반 미만이다.
그리드는 온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과 함께 불사 상태에 돌입했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게 됐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상황이기에 동요하진 않았다.
그가 아이템 합체,룬의 힘,버프 스킬을 처음부터 모조리 중첩시켰던 이유는 이번 전투가 길지 않을 거란 사실을 예측했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버티지못하고 죽는다.
하야테의 조언에 담긴 뜻을 헤아리며, 그리드는 두 자루 검으로 6융합 검무를 전개했다.
생명력이 바닥난 덕분에 활성화된 <산중지왕>,검무에 깃든 치우의 가호,불완전하게나마 존재하는 검성의 자격이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거기에 더해서 <드래곤 레이지>가 발생했다.
모든 공격을 2회 중첩시키는 절대종의 권능.
발동 확률이 30퍼센트에 불과했으나,필연이었다.
쌍수검으로 펼치는 6융합 검무의 타격 횟수가 원체 많았으니까.
<신장>의 발생 역시 필연이 됐다.
급기야 더 커진 고통에 현실감이 넘쳐서 정신이 아찔했지만,그리드는 이를 악 물고 버티며 제라툴의 몸을 베어나갔다.
<암중검>이 제라툴의 발밑에서 솟구치며 호응했다.
보이지도 않던 제라툴의 생명력 게이지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순식간이었다.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가 단 0.1 초도 안 돼서 소멸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둘은 서로에게 치명적이었고,이곳은 아스가르드가 아닌 인계였다.
인신 그리드의 영역이란 말이다.
불사의 지속 시간에도 제약이 있던 제라툴이 결국 먼저 겁을 먹고 퇴각했다.
그 와중에 뭐라고 저주를 짓씹어댔지만... 기억도 안 난다.
제라툴의 패주와 함께 무신의 시간은 끝이 났고,그리드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댐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미 충분한 고통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자만이었다.
길게 늘어난 시간 속에 갇혀있던 고통이 한꺼번에 엄습해오자 그리드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이다.
그리드가 덜덜 떨리는 손에 쥐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빛이 적은 곳에선 순백의 자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다가,빛을 받으면 서리처럼 반짝이며 안개마냥 흐릿해지는 검이었다.
‘이 녀석의 도움이 가장 컸다.’
크란벨의 뿔을 재현한 검.
물론 실제 크란벨의 뿔은 훨씬 더 거대했고 끝이 3갈래로 나뉘어져 있었으니,하나의 갈래를 재현했을 뿐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프리트의 뿔이 창을 달았듯이 크란벨의 뿔은 검을 닮았었다.
그래서 제작 중에 자연히 떠올렸다.
크란벨의 팔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필연이었다.
<목단룡 크란벨의 뿔>
등급: 신화(초월)
내구력:무한 공격력:23,880
★치명타 확률 100퍼센트 상승.
★약점 공격 확률 100퍼센트 상승.
★공격 스킬 전개 속도 50퍼센트 상승.
★대상의 인식 저해.
★대상의 반격과 회피을 대폭 감소.
★대상의 방어(스킬,마법,권능모두 포함)를 80퍼센트 확률로 무력화.
★대악마,대천사,신, 드래곤에게 스킬 공격력 50퍼센트 상승.
★공격 시 25퍼센트 확률로 <극쾌> 스킬 발생.
★드래곤의 뿔로 대체 가능.
템빨신 그리드가 ‘크란벨의 팔’을 제련하여 구현시킨 목단룡 크란벨의 뿔입니다.
아름다운 생김새와 상반되는 흉포함을 간직했습니다.
빛을 굴절,분산시키는 까닭에 형태와 움직임을 감지하기 힘듭니다.
착용 조건:그리드,드래곤 슬레이어,드래곤 나이트.
무게: 3,900
<극쾌>
패시브
대상의 회피와 방어를 완전 무력화
재사용 대기 시간:1초
구젤의 어금니와 비교해서 등급과 공격력이 높은 건 당연했다.
소재부터가 차원이 달랐으니까.
구젤의 어금니는 말 그대로 구젤의 이빨을,심지어 반으로 쪼개서 만든 검인 반면 크란벨의 뿔은 크란벨의 팔을 통째로 소재로 삼았다.
대상의 인식을 저해하는 옵션이 귀속 될 것도 쉽게 예상했었다.
목단룡 크란벨의 고유 권능이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추정됐기때문이다.
하지만 <극쾌> 스킬이 생긴 건 그리드의 예상 밖이었다.
크란벨의 뿔을 재현하되 이상적인 검의 형태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대기의 저항을 굴복시키는 구조를 구상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설마 대상의 회피와 방어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패시브 스킬이 귀속 될 줄이야.
심지어 ‘대상의 격이 낮아야한다.’는 식의 제약조차 없다.
자신보다 높은 격의 적들과 싸워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그리드에게 크란벨의 뿔은 말 그대로 최강의 무기였다.
만약 크란벨의 뿔이 없었어도 제라툴을 패퇴시킬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거다.
증폭공,신장,드래곤 레이지 등이 모두 결합된 6융합 검무를 썼어도 구젤의 도 한 자루론 공격력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크릉... 랜디하고 빨골이들이 서운해 할거다냥... 어흥.”
개소리를 내다가 고양이처럼 울다가,호랑이소리를 내는 등.
성체가 된 노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약간의 혼란을 느끼는 눈치였다.
그래도 할 말은 했다.
끝내 부름을 받지 못한 랜디와 템빨골들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리드를 보며 얼마나 속상해할지 뻔히 알아서였다.
물론 그들은 그리드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드가 노에를 부른 것은 어디까지나 <무엄하도다!>스킬의 존재 때문이었다.
베티 덕분에 크게 성장한 노에의 궁극기는 다수의 대상을 보호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사실상 결계 스킬로 진화했다.
물론 랜디와 템빨골들에게도 백성들을 지킬 수단은 많았지만 노에 흔자서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랜디와 렘빨골들까지 소환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노에 일당은 사람들을 더 쉽게 지키고 여력이 생겨서 반드시 제라툴에게 덤볐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높은 확률로 죽었을 텐데,그들의 경험치도 소중하므로 그리드가 원하는 사태가 아니었다.
“불만이면 더 강해지라고 하던가.”
편히 머쓱해진 그리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순진한 노에의 기분만 좋아졌다.
“나처럼 말이냐옹?”
“어... 그래…”
대충 대꾸해준 그리드가 승리 보상을 확인했다.
노에 팬카페 회원들은 내가 노에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알아줘야한다고 생각하면서다.
보상 목록이 화려했다.
제라툴이 휘둘렀던 열여덟 자루
의 성검 중 무려 열네 자루가 보상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