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4화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둠을 반드시 정화했다.
그럼에도 어둠이 있음은 빛이 잠시 멀어졌기 때문이며,빛이 멀어지는 까닭은 신실하지 못해서다.
‘이교도 놈들.'
열여덟 자루 성검이 이루는 빛의 물결.
장엄하고 거룩한 광경이다. 진실된 신앙을 깨우칠 계기로 충분했다.
한데 눈이 부시답시고 빛을 외면한다.
눈살을 찌푸리는 인간들의 반응이 제라툴의 시각과 감각에 모조리 잡혔다.
정확히 87,598명. 어디에 숨었든지 환히 보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선명하게 읽혔다.
제라툴은 분노했다.
자신이 무(武)를 숭상하고 갈망하는 존재들로부터 비롯한 신이라곤 하나,그러므로
레베카 여신과 큰 관련이 없는 유일신이긴 하지만,애초에 세계를 창조한 건 레베카 여신이 아닌가.
제라툴은 레베카를 경배했다.
레베카의 호의로 빚어진 놈들이 감히 빛을 거부하는 광경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빛이 눈부셔서 외면한다고?
불경이다. 대역죄다.
콰르륵!
그리드에게 베여서 반으로 갈라진 빛의 물결이 회오리쳤다.
제라툴의 의지에 호응하여 사방으로 번졌다.
성검이 빛을 인도했다.
열여덟 자루의 성검이 인간들을 표적으로 삼고 쏘아져 빛의 폭격을 연쇄시켰다.
늘 그랬듯이 사람들을 지키는 건 그리드였다.
원덕구를 개방하여 무구의 비를 내린 그가 열여덟 자루 성검의 궤도를 차단하고 비틀었다.
수천 자루의 무기가 성검을 때리고 날려버렸으며 수천 자루의 갑옷과 방패가 빛을 고립시켜 폭격 범위를 축소시켰다.
끝끝내 폭발을 일으킨 빛의 입자가 사람들을 덮쳤으나,노에가 일으킨 전기의 방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다시피 하여 그들을 지켜주었다.
“내 주인의 노예들은 이 노에님께서 지키신다냥!”
노에는 4좌 베티의 도움을 받아 우레석의 힘을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사람들을 지키는 성과를 내자 흥분해서 날뛰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은 어둠을 근원으로 삼은 마기를 강제로 일으키더니 성체로 변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제라툴에게 덤볐다.
한동안 탑에서 미친 해츨링과 뛰어 논 마당이다.
상대가 신이라고 해서 새삼 두렵지 않았다.
노에는 제라툴을 통째로 집어삼킬 요량이었다. 놈의 능력을 그리드에게 전이시키고 싶어서였다.
용기가 너무 과했다.
“깨갱!”
노에는 감히 제라툴에게 접근조차 못했다.
제라툴이 두른 무색의 신성(神性)은 호신강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보통의 신들과 달리 성스러운 면이 없었고,그래서 마물인 노에가 용맹무쌍하게 덤빌 수 있던 거지만,몹시 강력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감각에 읽히지 않음에도,분명하게 현상을 일으켰다.
“시,싫다,컹...!”
제라툴의 근처도 못가고 피투성이가 된 노에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등 쳤다.
자신을 역소환시키려는 그리드의 의지를 읽어서다.
노에는 직감하고 있었다.
저 신은,강하다.
노에가 여태껏 보아온 그리드의 위엄을 헛된 것으로 전락시킬 자격이 충분했다.
노에는 도망치기 싫었다.
그리드가 랜디와 템빨골들을 소환하지 않는 이유가 무의미해서임을 뻔히 알고도,
그리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역소환을 거부했다.
홀로 싸울 그리드가 죽는 모습을 상상하자 두려웠다. 신에게 있어서 죽음,혹은 패배가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하는지 알았다.
내가 함께 싸워줘야 한다.
베티 할멈의 도움을 받고 강해졌을 때,앞으론 내가 그리드를 지켜줄 거라고 할멈
앞에서 맹세했다. 할멈이 기특하다며 머리까지 쓰다듬어줬었다. 노에 너는 멤피스 중에서도
특별하다고 분명히 말해줬단 말이다...
“한낱 미물 따위가.”
소리가 늦게 들렸다.
역소환을 거부하고 버티던 노에의 머리가 무언가에 붙잡힌 뒤였다.
시야가 암전되고 나서야 들려온 목소리.
노에는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제라툴에게 붙잡혔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제라툴의 호신강기에 가죽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골격이 짓눌리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입가를 쌜룩였다.
자의론 좁힐 수 없던 거리를 저쪽에서 좁혀줬음에 기뻐했다.
“...우냐냐냐냐냐냐냥!!”
노에의 할퀴기와 방전 스킬이 즉시 전개됐다.
단 0.1 초의 딜레이도 없이 발생했고 단 0.1 초의 쿨타임도 없이 재개됐다.
지옥 최강 마수의 위용이었다.
대악마도 사육하기 벅차하는 멤피스의 의지는 대단해서,캐스팅과 쿨타임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의미했다.
노에의 공격은 제라툴의 호신강기에 흠집조차 못 냈다.
노에가 발톱을 휘두르고 전기를 불러일으키는 속도를 제라툴의 인지가 월등히 앞서기도 했다.
꽈악!
노에의 머리통을 부여잡은 제라툴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성체가 된 노에의 머리는 몸의 성장에 맞춰서 무척 거대했지만,천상의 신들 앞에서 부피와 질량의 개념 따윈 무의미한 것이다.
제라툴의 손은 노에의 머리보다 수십 배 이상 작았으나 노에의 머리를 분명하게 쥐었다. 그리고 터뜨렸다.
아니,터뜨릴 생각이었다.
“...”
제라툴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옥 출신 미물의 머리통에 얹었던 손은 진즉에 떼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숫제 검을 쥐는 듯한 파지법.
무색의 신성 일각이 일직선으로 쭉 늘어나 검의 형상을 갖췄다.
제라툴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졌다.
노에의 넙데데한 미간엔 여전히 선명한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었다.
제라툴에게 붙잡히며 짓눌렸던 검은 털이 가죽에 철썩 달라붙은 상태였다.
압박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미동조차 없었다.
제라툴이 유영하는 시간의 흐름이 압도적으로 빠르단 의미다.
노에의 눌린 털이 다시 채 서기도 전에,무형의 검을 만들어 손에 쥔 제라툴은 그것을 아래로 강하게 휘둘렀다.
강력한 검기가 대지를 관통했다.
무저갱을 연상시키는 깊은 상처가 발생하여 대지를 내부에서 진탕시켰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땅이 수천,수만 갈래로 갈라지더니 급기야 주저앉기 시작했다. 도시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대지의 신 가리온이 즉시 나서 땅을 수복하지 않았다면,백스라는 이름의 도시는 이 순간 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놈?'
무너졌다가 즉시 다시 회복하는 대지의 풍경을 시야에 담으면서,제라툴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늘을 유유자적 걷는 몸짓이 고아했다.
하지만 제라툴의 표정은 몸짓과 상반됐다. 그가 펌하해온 뭇 인간들처럼 감정에 휩쓸려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순간에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투명한 검.
칼날이 다소 무딘 그리드의 검은 그 기이한 형태를 장점으로 삼았다.
대기의 저항을 단순히 제압하는 게 아니라 복종시켰다. 대기의 흐름이 검이 향하는 방향을 따랐다.
뒤에서 밀어주듯 더욱 가속시켰다. 제라툴에게도 몸시 쾌속하게 다가왔다.
무려 두 걸음이나 피해야했을 정도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제라툴의 무형검이 범위를 확장했다. 무색의 신성을 더욱 강하게 둘러쳤다.
대지의 신 가리온이 뭐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라툴은 무시했다.
그는 재차 가까워지고 있는 그리드를 일격에 베어버릴 속셈이었다.
이번엔 결코 피할 수 없도록, 설령 막더라도 검과 함께 통째로 소멸하도록.
그로 인해 세계가 박살이 날지언정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상에 강림한 여파로 신격을 상당량 소실한 상태다.
내 일격이 부술 수 있는 세계는 전부가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들이 살아갈 땅이 지금보다 훨씬 좁아진다고 해서 뭐,그게 대수일까?
一노에의 털은 여전히 서지 않았다.
노에가 보는 세상은 아직 어두웠다.
‘무신 제라툴이 내 눈을 가리고 머리를 붙잡았다.’
노에의 사고는 거기에 멈춰있었다. 아니,흐르는 중이었다.
다만 찰나를 셸 수 없이 분절시킨 제라툴의 시간이 남다르게 빠를 뿐이다.
세상은 평소와 똑같았다.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렀고,노에와 사람들의 사고 속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 평범한 세계의 중심에서.
스윽.
홀로 비범한 시간을 걷는 제라툴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형태가 없고 단지 거대할 뿐인 검이 대기를 박살냈다. 그리드의 검로에 호응하여 쾌속하게 만드는 태도를 질책하는 무신의 의지 그 자체였다.
...!
대지가 소리 없는 비명을 토했다.
거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났다.
곧 흙먼지가 되어 하늘로 솟구칠 터였다. 앞으로 몇날며칠 동안 세상이 황사로 뒤덮일 것이었다.
대지의 신 가리온은 그와 같은 사태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신격을 쥐어짰다. ‘무신의 시간’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스럽고 한계에 이르렀으나,수십만 갈래로 조각 난 대지를 기어코 이어붙였다.
마침 노에의 눌린 털끝이 조금 섰다.
제라툴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미친 건가?’
재차 거리를 좁혀오는 그리드가 첫 번째 일격을 피하고 막았을 때까지만 해도,제라툴은 화가 나도 인정했다.
저쯤 되는 실력이 있으니 그간의 업적들을 쌓아온 거겠지...
생각하며,그간 부정해온 그리드의 업적을 내심 인정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마저 실패한 지금은 달랐다.
제라툴의 사나운 눈빛이 그리드의 건틀릿과 각반에 고정됐다.
우습게도 드래곤의 외피를 재현한 듯한 방어구들.
실제로 드래곤의 비늘을 재료로 쓴 물건이니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세계를 부술 작정으로 내지른 검기를 견디다니?
제라툴은 특히 건틀릿에 흐르는 마나의 순환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살아있는 드래곤의 마나처럼 고속 순환하는 마나.
드래곤 하트 없이도 저런 순환이 가능한 이유는 드래곤의 호의 덕분이다.
가끔 적색으로 물드는 저 건틀릿을 구성하는 회색 비늘에 드래곤의 가호가 내린 게 분명했다.
적어도 그리드의 양팔은 드래곤과 비슷한 내구력과 힘을 발휘할 거란 의미가 됐다.
아니,그리드의 육체능력과 신격까지 결합됐으니 그 이상이다.
지금 막 확인했다.
“어떤 미친 드래곤이...!”
제 격을 희생할 각오로 그리드에게 협력한 거지? 대체 왜?
저놈은 왜 이토록 많은 존재에게 사랑 받는단 말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그리고 이유모를 질투 속에서 제라툴은 위기감을 느꼈다.
지상에 강림한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무신의 시간을 유영한 상황이다.
감각도,육체도,인지도 곧 한계가 된다.
반면 점차로 가까워지는 중인 그리드의 표정은 평온했다.
짤라앙...
아득하게 들려오는 방울 소리가 증명한다.
저녹은 아직 시작조차 안 했다.
제라툴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리드는 이제야 비로소 6융합 검무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하늘 위 제라툴이 고작 2번 휘두른 검격을 돌파한 여파로 쇄골이 박살났고,목과 가슴엔 깊은 자상을 입었으며,허리는 반쯤 썰려나갔지만.
검을 쥔 두 손만큼은 멀쩡했다.
룬의 힘을 전부 개방하고 모든 버프 스킬을 중첩시킨 상태인 그리드의 전의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 순보를 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몸.
길게 늘어난 시간 탓에 모든 게 느려진 세상 속에서,그는 하야테의 조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
‘회복할 시간을 줘선 안 돼.’
자잘한 공격은 수십 번,수백 번 적중시켜도 무의미하다.
다만 추구해야할 것은 일격필살.
그렇다면,
“낙룡극연살파(落龍極聯殺派).”
이것밖에 없다.
[<조건부 검성>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궁극의 무> 효과가 발생합니다.]
“컥...!”
쿠와아아아아아아악!!
돌풍이 몰아쳤다.
어째선지 무너질 듯 출렁이는 대지 위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얼떨떨한 표정의 노에도 함께였다.
당장 꺼질 듯 흐릿해진 주황색 신성이 유성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드였다.
그가 쏟는 피가 하늘을 붉게 덧칠해갔다.
“주,주인...!”
“폐하! 페하아!!”
상대가 너무 고강했다.
무려 무신이었다.
우리의 신께서 패배하셨다 한들 어찌 흠이 될까.
노에와 백성들이 힘껏 내달렸다.
추락하는 그리드를 감싸주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던졌다.
그때였다.
고요하기 그지없던 하늘에 주황색 극광이 번졌다.
적색으로,회색으로,때로는 투명하게 물드는 검무의 향연이 휘몰아쳤다.
긴 뿔과 날카로운 이빨을 휘두르는 드래곤의 광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드의 자취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 시간 속에서,홀로 쓸쓸히 무신과 맞섰던 템빨신의 흔적이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지상에 강림한 무신(武神) 제라툴을 패퇴시켰습니다.]
한 발 늦게 떠오른 월드 메시지가 정확한 결과를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