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1화
세간에 알려진 나이트는 사신이다.
대상의 영혼 게이지를 소모시켜 확정적인 죽음을 안기는 인물.
아이디와 다르게 암살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그의 악명은 상당히 높았다.
암살 관련 잠재력만큼은 페이커와 비견되는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었다.
라우엘은 그의 성격에 주목했다.
냉철하면서도 끈질긴.
물러날 때와 물러나선 안 될 때를 정확히 구분하며,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미련 없이 포기하는 듯 보이나 끝내 결과를 낸다.
나이트의 암살을 피한 사람이 10명이라면 그중 9명은 언젠가 반드시 의문의 죽음을 당했음이 증거다.
호랑이 소굴로 뛰어들어 호랑이를 사냥할 증거를 수집해야하는 감찰관.
위험과 유혹에 상시 노출 된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는 그 역할에 나이트만한 적임자가 드물다고 판단했다.
물론 나이트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라우엘의 삼고초려에 감동해서 템빨단에 가입하긴 했지만... 처음 맡은 임무가 뜻밖이었다.
암살자에게 감찰관 노릇을 하라니?
‘애초에 지금의 제국을 상대로 역심을 품을 바보가 있나?’
템빨제국은 그리드의 절대적인 무력과 인망을 탄생 배경으로 삼았다.
사하란을 고스란히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대륙 모든 국가에게 상국이었다.
그리드의 권세가 여전히 하늘을 찌르는 마당에 감히 역심을 품을 귀족이 있을까?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어지간히 인내심이 없거나 돌대가리에 불과했다.
애초에 영주로 임명될 위인이 못 되었다.
나이트의 그런 생각은 얼마지 않아서 바뀌었다.
‘여기까진 눈과 귀가 뻗칠 수가 없겠구나.’
템빨제국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대륙의 거의 전부가 제국의 영토였으니 당연했다.
황도와 거리가 먼 곳일수록 워프게이트를 찾기 힘들었고 지방고유의 색채가 짙어졌다.
물론 거리 어디에나 그리드의 동상이 있었다. 그리드의 서사를 찬양하는 신도들이 넘쳐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한 이질감이 있었다.
안 그래도 중앙과 멀리 떨어진 지역.
예로부터 지방 호족들이 다스려 왔을 이곳은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방언과 옷차림부터가 낯설었다. 제국이 아닌 별개의 국가 같은 인상이 강했다.
‘그리드의 서사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 것 같기도 한데.’
템빨신교에게 그리드의 서사란 성전이다.
성전을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걸까?
사람들이 찬송하는 낯선 서사를 들으며 도시를 살피던 나이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수십 명의 병사들과 기사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까닭이다.
“황궁에서 파견한 감찰관이시지요? 수도에서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지 감찰은 기습적으로 시행된다. 대상이 눈치 채고 대비해선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한데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도시를 살필 여유조차주지 않고 자신들의 소굴로 끌고 가려 든다.
“수도에는 몇 개의 도시를 더 살펴본 뒤에 방문할 계획이었소만.”
“시골에 뭘 볼 게 있다고요. 지루하기만 하실 겁니다. 게다가 영주님께서 친히 연회를 준비하신 상황이니 영주님의 체면을 봐서라도 일단 동행해주시죠.”
기사들의 태도가 정중하면서도 강압적이었다. 체면까지 운운하는지라 거절하기엔 다소 난처했다.
‘시찰이야 일단 연회가 끝난 뒤에 해도 되겠지. 영주의 태도부터 확인해 볼까.’
라우엘은 말했었다.
이곳의 영주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그 배후엔 레베카교의 잔당들이 있을 거라고.
허황된 말이었다.
라우엘은 아무런 물증도 제시하지 못했다.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단순히 심증만으로 영주를 의심했다.
나이트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이 땅의 묘한 폐쇄성과 독립성을 경계하면서도 상대방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이트는 영주의 유능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지나온 도시들의 발전 상태가 예상을 웃돌았다.
영주의 높은 정치력을 한 눈에 간파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보라면 또 모를까. 이런 유능한 인물이 레베카교의 잔당들과 결탁해서 승산 없는 반란을 일으킬 리가 없지.’
나이트의 그런 확신은 그날 밤 바로 깨졌다.
“...”
영주성에 도착해 연회에 참석한 그는 묘한 인물들을 목격했다.
영혼의 색이 금색으로 물든 자들.
레베카교 고위 성직자들의 영혼색이 저것과 같았었다.
“영주님”
영주가 직접 따라준 술잔을 마시지 않고 내려놓은 나이트가 영주를 빤히 바라보고 말했다.
“레베카 개새끼라고 한 번 해보십시오.”
“...”
“...”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이 고요해졌다.
경악한 표정을 지은 악단이 연주를 멈췄고 영주와 가신들은 귀를 의심한 채 눈을 껌벅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신 몇 명이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갑자기 무슨 경우 없는 말이오?”
“감히 영주님 앞에서 저급한 언동을... 영주님을 이 자리에 앉힌 것은 다름 아닌 황궁이오.
그대가 영주님을 모욕하는 것은 황궁을 모욕하는 것과 같소. 대역죄란 말이오!”
몇 명은 적대감을 드러내며 협박까지 일삼았다.
나이트는 무시했다.
등 뒤로 낫을 든 거대한 사신의 모습을 띄우며 재차 말했다.
“영주님,레베카 개새끼라고 말하기 싫으십니까?”
“…내가 왜,그래야하오? 그대는 어찌하여 다짜고짜 내게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라 하는 게요?”
“템빨신의 신하가 레베카를 욕하는 게 어찌하여 신성모독이고 죄입니까?”
“망언을...! 우리가 아무리 템빨신을 섬긴다 한들 천상의 신들을! 심지어 태초신을 모욕해선 천벌을 받을 게요!!”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좌시하던 천상의 신들이 우리가 죄를 범하자마자 천벌을 내릴 거라고요? 그 기이한 믿음의 근거가 뭡니까?”
“영주님,저자를 상종하지 마십시오.”
“대역죄를 물어 당장 참하여야합니다. 황궁에서도 납득하겠지요.”
앞서 얼굴을 붉혔던 가신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 넷. 마법을 일으키는 그들의 공통점은 금색의 영혼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나이트의 표적이었다.
길고 메마른 네 개의 손가락을 펼쳐 놈들을 가리키고 있던 사신이 허공에 낫을 휘둘렀다.
동시에.
“컥...!”
네 개의 금색 영혼이 반으로 쪼개져 갈라졌다.
영혼의 소유자들은 외상 하나없이 절명하였으니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침묵 속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이트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시체가 떨어뜨린 장신구를 무표정한 얼굴로 집어 살폈다.
레베카교인을 상징하는 목걸이와 반지였다.
“망령들이 영주님을 현혹한 겁니까,아니면 영주님께서 이들을 불러 모은 겁니까?”
“저놈을 쳐라!”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나이트는 라우엘의 짐작대로 흘러가는 사태에 감탄했다.
'이건 선견지명의 수준을 넘어서는군. 차라리 라우엘이 의도한 사태라고 해석하는 편이 옳겠어.’
애초에 반란분자를 영주에 앉히고 때가 오면 처리할 심산이었던게 아닐까.
굳이 그런 이유는 영주의 정치력이 필요해서였을 거다.
영지를 빠르게 발전시킬 인재.
놈이 언젠가 흑심을 품을 걸 알고도 라우엘은 놈을 영주에 앉히고 능력을 빼먹었다.
그리고 이제 필요 없어지자 나이트를 보내 처리하려는 것이다.
‘철두철미하고 잔혹하군.’
이게 템빨단인가.
외부에서 봤던 템빨단도 천하무적의 집단이었지만,내부에서 보는 템빨단은 또 색달랐다.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절대로 배신하지 말아야지.’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 따위 없었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멸망해도 배신해선 안 된다는 결심을 했을 뿐이다.
혀를 내두른 나이트가 무기를 꺼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기사들의 공격을 흘렸다.
간격을 차단해 어지럽게 얽히는 협공을 무력화시키는 수법이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병사들은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영주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나이트가 자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지쳐 쓰러질 거라고 판단한 눈치였다.
실제로 나이트의 무력은 압도적이진 못했다.
기사들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과연 템빨제국의 기사들답게 무장부터 뛰어났다.
등 뒤에 세운 사신의 보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사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침묵하는 중이었다.
하나의 손가락을 은밀하게 세워 영주를 겨냥한 채였다.
“내 조국은 템빨국이 아닌 사하란이었다. 무능한 계집이 황제가 되어 조국을 팔아넘기는
모습을 피눈물 흘리며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내 심정을 네깟 놈이 어찌 헤아리겠느냐.”
점차 수세에 몰리는 나이트를 보고 기세가 오른 영주가 지껄여댔다.
템빨제국의 충신을 연기해온 세월이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흥취를 느끼는 기색이었는데,승리를 확신하는 눈치였다.
사실 승리랄 것도 없다. 더러운 사냥개 한 마리가 날뛰는 걸 잡아다 족치는 것이 어디 승리 운운할 일인가. 이건 그냥 사냥에 불과하다.
나이트가 비웃었다.
“인마대전을 잊었나? 사하란은 템빨신이 없었으면 존재하지도 못했을 텐데.”
“흥,삼신교가 건재했다면 템빨신 없이도 악마와 맞서 싸울 수 있었을 테지.”
“그래서 레베카교의 잔당들하고 어울린 거군.”
나이트는 이곳이 지극히 변방임을 상기했다.
무저갱과 번헨 열도에서의 전쟁을 직접 겪지 못했던 자들.
단순히 게이트를 타고 떨어지는 마물이나 상대했을 그들은 인마대전이 얼마나 끔찍한 전쟁이었는지 실감하지 못할 터였다.
말로 백 번 천 번 들어봤자 한 번의 경험보다 못한 법이니.
“네가 지껄일 때마다 속 뒤집힐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어. 여기서 죽어라.”
본래 나이트는 영주를 체포해서 황도로 데려갈 계휙이었다. 아무래도 생포하는 편이 더 큰 공로로 인정받을 테니까.
하지만 이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잠자코 서있던 그의 사신이 은밀하게 세워두었던 손가락으로 대놓고 영주를 지목했다.
순간.
영주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와 살기를 느꼈다. 필연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한
그가 눈 앞에 세운 병사들의 장벽이 무색하게도 등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의미했다.
사신이 낫을 휘두르자 영주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서 죽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기함했다.
혼란에 빠져서 뒷걸음질 쳤다.
‘이놈들도 다 죽여야겠지.’
사하란이야말로 조국이니 뭐니 지껄이는 반란분자에게 충성했던 놈들이다.
살려두고 수습하기엔 숫자가 너무 많기도 했다.
나이트의 사신이 안광을 번뜩였다. 직접적으로 낫을 휘둘러 나이트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나이트는 혼자이되 둘이었고 사신과 협력하는 그의 무력은 아까와 달리 병사들과 기사들을 압도했다. 숫자의 개념을 무용하게 만드는 수준의 무력이었다. 홀로 수백을 능히 감당했다.
그때였다.
“잔악한 살귀가 날뛰는구나. 필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겠지.”
한 사내가 현장에 난입했다.
빛의 형상을 새긴 백색의 갑주를 무장한 성기사.
레베카교가 성행했던 시절을 연상시키는 행색이었다.
그의 이름은 윈터.
네임드 NPC는 아니었다.
나이트는 죽여야 할 상대가 한 명 더 추가됐다고 생각할 뿐,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윈터의 손끝에서 빛이 명멸하기 전까진 그랬다.
“빛으로 정화하리라.”
너울지는 빛이 칼자루와 칼날의 형상을 갖춰간다.
마력이나 검기 따위가 아닌 신성을 두른 검.
한때 데미안의 애병이었던 그것을 나이트가 몰라볼 리 없었다.
“성검...? ”
나이트는 평장한 이질감을 느꼈다. 너울거리는 빛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성검의 형태가 굉장히 낯익었기 때문이다.
저건 마치 그리드의...
쿠화하학!!
두 눈을 부릅뜨는 나이트의 몸을 흉포한 빛이 갈랐다.
* * *
성검에 당한 사람은 비단 나이트뿐만이 아니었다.
대륙 각지에서 성검을 쥔 삼신교의 잔당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본부를 구축했다.
성검이 일으키는 빛의 기적을 위시하여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공교롭게도 지옥 엘리베이터가 대중화됐을 무렵이다.
템빨단의 상위 전력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지옥을 왕래하며 지옥을 침범하기 시작한 이때 지상에 예상외의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이쯤 되면 천상이 일부러 훼방을 놓는 느낌이군.’
종교의 부흥을 목표로 날뛰는 성검의 소유자들.
그들의 정보가 적힌 서류를 일일이 훑던 라우엘의 표정이 점차 미묘하게 구겨졌다.
사람들이 목격한 성검의 묘사를 보자 떠오르는 무기들이 있었다.
‘실패작,무아지경의 검,통한의 가시,검은 귀신과 주작궁... 성검들의 형태가 폐하께서 오래 전 만들었던 작품들과 닮았다고?’
의도가 뭐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감옥에 갇힌 그가 사면 받기 위해 성검을 제작했다고 가정할 경우,그는 굳이 그리드의 작품을 표절할 이유가 없다.
그리드가 말하길 헥세타이아의 실력은 그리드 이상이었으니까.
헥세타이아는 더 뛰어난 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리드의 작품을 표절했더라도 신검을 표절했겠지,굳이 오래 전에 만들었던 구작들을 표절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천상에서 새로운 대장장이 신이 탄생했고,그 신의 실력이 아직은 일천해서 페하의 작품을 표절하는 것으로 실력을 연마하기 시작한 건가?’
정보가 워낙 적은 탓에 추측에 불과했다.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던 라우엘은 진상을 규명하지 못한 채 그리드에게 사건을 보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들의 기세가 높아 모습을 숨기지 않으니 사도들을 파견하여 사태를 진압하기 수월하며,성검을 회수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침 그리드의 신물이 새롭게 탄생했다는 월드 메시지가 떠오른 참이었다.
-사도들은 보내지 마. 내가 직접 가겠다.
그리드가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