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19화 (1,507/1,794)

75권 21화

퍼니쉬먼트는 브라함의 고유 마법이다.

빛을 마력으로 구현해 창으로 빚는 디스인티그레이티가 빛의 상징적 의미에 기원을 두듯,퍼니쉬먼트는 브라함의 피와 마력,그리고 지식을 기원으로 삼았다.

기본 골자부터 브라함이 직접 설계하고 창조했다.

긴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정립되고 발전해온 다른 마법과는 경우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퍼니쉬먼트를 목격하는 존재가 많아질수록 브라함의 마법은 전설이 아닌 신화로 숭배 받을 터였다.

퍼니쉬먼트를 만든 계기?

당시 난적이었던 가미긴에게 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어디까지나 계기다.

퍼니쉬먼트의 의의는 궁극이 아닌 시작에 있다.

퍼니쉬먼트를 구성하는 술식은 다채로운 수준을 넘어서 자유롭다. 살아 숨 쉬듯이 작용했다.

다른 마법의 술식에 침식해 고스란히 덧씌워질 정도로.

파지직!!

허공에 손을 휘젓는 브라함의 손길을 쫓아서 벼락이 물결쳤다.

수백 갈래로 갈라진 창날처럼 뻗어져 브라함의 시야 끝에 도달하기까지 순식간이었다.

산봉우리 주변에 흐르던 구름들이 청광을 뿜더니 빗물을 쏟아냈다.

개세적인 위력이었다.

마법의 현상만으로 날씨가 바뀌어버렸다.

“...칫”

정작 브라함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그의 손가에 남은 전류의 잔재가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퍼니쉬먼트의 술식이 덧씌워진 흔적이었다.

늦다.

브라함이 바랐던 결과는 앞서 쏘아진 전류 전체가 자색으로 물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퍼니쉬먼트의 술식이 덧씌워지기 전에 전류는 이미 목표에 도달하고 효력을 발휘했다.

물론 마법의 실행 단계부터 퍼니쉬먼트와 혼합했다면,전류는 처음부터 청색이 아닌 자색으로 쏘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너무 많은 과정을 요구했다. 캐스팅 시간 자체가 길어졌다.

마법을 즉시 발현한다는 브라함의 최대 강점이 퇴색되는 셈이다.

‘술식을 더욱 간소화시키는 수밖에 없나.’

쉽지 않은 일이다.

브라함은 퍼니쉬먼트의 술식을 이미 몇 번이고 손 봤다.

가미긴을 구축했을 때와 비교해서 족히 2배는 축소시켰다.

위력과 기능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술식을 이 이상 축소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안 됐다.

역시,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의념의 강화다.

강력한 의념은 마법과 뜻을 합일시키니까.

뜻하는 즉시 마법을 실현시킨다는 의미다.

하지만 직계의 힘을 되찾은 브라함은 완전체였다. 의념이 진즉 극의에 이르렀다.

대마법 중에서도 대단위 마법인 메테오를 즉시 실현할 정도다.

그럼에도 퍼니쉬먼트의 전개와 활용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당장은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거겠지.’

앞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퍼니쉬먼트를 '모든 마법의 근간’으로 삼기 위한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긴 세월 동안 연구에

몰두해야 할 터였다. 족히 수십 년,혹은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괜찮다.

퍼니쉬먼트를 거기까지 활용하는 수준에 도달한다는 건 즉 ‘마법의 신’이 된다는 거니까.

언젠간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이상 시간 따위 얼마나 걸려도 좋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단순히 숭배로 인해 탄생하는 신이 아니다.

신조차도 죽이는 마법사.즉,단순 무력으로 신의 위계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제 그만 나와라.”

애써 마음을 추스른 브라함이 말했다.

진즉부터 찾아와 기다리던 불청객을 향해서였다.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불청객의 정체는 피아로였다.

얼굴이 핼쑥했다. 비록 농부라고는 하나 명색이 전설이건만 위엄이 없다.

죽은 눈빛에서 비범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주화입마에 빠진 건가.’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년전.

아직 육신을 되찾지 못한 브라함이 영혼으로 떠돌던 시절.

피아로는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리드를 비롯한 만백성이 피아로를 의지했었다.

그만한 실력이 있었다.

육신을 되찾고 피아로와 대련했던 브라함이 내심 감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후론 발전이 더뎠지.’

그리드의 곁에서 가장 빛났던 존재가 저토록 초라해질 줄이야.

브라함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농부라는 직종이 예상 이상으로 하찮다는 증거였다.

물론 피아로 본인은 농부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이 있었지만,그것도 과거의 이야기다.

그리드가 신이 되고 새로운 사도들을 하나둘씩 영입하기 시작하면서.

피아로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점차로 초조해졌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용건을 말해라.”

브라함이 재촉했다. 특유의 오연한 표정과 무심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오해다.

만약 브라함이 진짜로 짜증이 났다면 피아로를 상종도 안 했을 것이다.

남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브라함은 피아로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리드의 곁을 지켰던 인물을 존중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호감을 품었다. 다만 성격상 내색하지 못할 뿐이다.

게다가 요즘은 호감보다 동정심을 더 크게 느끼기도 했다.

“저와 대련해 주십시오.”

“대련?”

브라함이 실소했다.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황당하고 가소로운 나머지 자연히 웃음이 새어나왔다.

“대련이 성립 될 것 같지 않다만.”

브라함은 냉정하게 말했다.

인마대전 동안 보았던 피아로의 실력을 떠올리면서다.

전설의 격을 지닌 그는 필시 강했지만,그건 보통의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브라함은 전설의 격뿐만 아니라 초월의 격과 신격을 쌓았다.

게다가 직계의 힘을 되찾았다. 육체와 마법 양면에서 극의를 논하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손속을 나누면서 영감을 얻고자하는 피아로의 의도는 알았으나,그 의도가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애초에 브라함은 마법 외엔 가르치는 재주가 없었다.

“차라리 자존심을 버리고 제자에게 부탁하지 그러나.”

메르세데스를 말함이다.

한때 피아로의 종자였던 기사.

그녀야말로 피아로를 가르치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피아로에겐 끔찍하게 잔인한 말일 테지만... 브라함은 지공답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피아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힘을 조절할 자신이 없습니다.”

“...?”

“그러니 귀공이어야 합니다.”

“...!”

브라함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흐릿했던 피아로의 눈동자가 빛과 초점을 되찾아감에 따라 대기 중의 마나가 요동치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수풀이. 아니,산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뿌리째 뽑힐 기세로 정기를 쏟아내어 피아로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마나 드레인의 작동이 불편해진 것을 느낀 브라함이 허공으로 몸을 티웠다.

벨리알의 지팡이를 꺼내서 무장했다.

‘저놈?’

브라함은 강적과 싸울 때 상시 색적 마법을 전개한다.

대상의 움직임을 보다 신속하고 명료하게 직관하기 위해서다.

지금도 반사적으로 색적 마법을 전개했는데 경악하고 말았다.

산봉우리에 선 피아로.

브라함의 두 눈엔 필시 그 모습이 담기건만, 마법은 피아로를 감지하지 못했다.

“자연지체...”

농부가 됐던 날부터.

피아로의 무도는 자연에 있었다.

하지만 자연이란 때때로 난폭하고 제멋대로인지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접근법부터가 잘못 됐던 것이다.

통제해선 안 되었다.

피아로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가 되기로 선택했다.

그리드가 딛고 서는 땅이,그리드의 피와 땀을 씻는 비가,그리드의 몸을 말리는 바람이 될 수 있게끔.

그것은 복속이 아닌 조화였고 자연경의 완성이었다.

“갑니다.”

피아로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가 딛고 선 산이 통째로 다가오는 듯한 압박을 느낀 브라함이 전율에 혈싸였다.

새로운 영감의 전조였다.

그의 머릿속에 표류하던 퍼니쉬먼트의 술식이 변화를 맞이했다.

기껏 축소시켰던 공식들이 도리어 처음보다 확장됐는데, 그로 인해 다른 마법에 침식하는 기능을 잃었다. 대신 빠르게 덧붙여졌다. 정복이 아닌 조화였다.

파지직!

자색의 전류가 하늘을 뒤덮었다.

* * *

“기이하구나.”

첫경험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법이다.

탄생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용언의 발동에 성공한 네펠리나는 기뻐할 겨를도 없이 의문에 빠졌다

용언의 작동은 필시 성공적이었다.

한데 눈앞에 펼쳐진 것은 허허벌판이다.

그리드는 커녕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경우지?

‘설마?’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네펠리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넙죽 엎드린 그녀가 흙바닥에 귀를 바짝 붙이고 숨죽였다.

혹시 그리드가 땅에 묻힌 건 아닐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죽,죽어서 묻힌 것이냐?’

어쩐지 공백이 너무 길다 싶었다.

눈이 핑글핑글 돈다. 사고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호흡이 가빠졌다. 육체의 감각이 붕 떴다.

엉금엉금

엉금엉금.

위대한 존재.

광룡의 딸 네펠리나는 혼란에 빠진 채 광야를 누볐다.

한쪽 귀를 바닥에 붙이고 기어다니는 꼴이 거대한 바퀴벌레,혹은 도마뱀을 연상시켰다.

비록 모습은 귀여운 인간 소녀였지만... 그래서 더욱 기피했다.

“혹시 말세인가.”

“...???”

그리드는 대체 어디에 묻혀있는걸까.

사고가 경직 된 채 기어 다니던 네펠리나가 흠칫 놀랐다. 뿌옇게 젖은 시야에 인간의 다리가 보였다.

그리드...?

아니다. 그리드의 냄새는 이렇지 않다. 애초에 그리드는 맨발로 다니지 않는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네펠리나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는 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해츨링이 여기서 뭐하는 거지?”

6좌 켄.

지혜의 탑의 결사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을 지닌 그의 감각도는 초월적이다.

무도가답게 전신을 무기로 벼른 여파였다. 탑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해츨링의 기척을 쉽게 감지하고 강림했다.

“히,히에엑.”

사색이 된 네펠리나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소나 돼지가 도살장의 기척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로 켄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자연히 몸에 비늘을 덧씌웠다.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비늘이었다.

켄이 납득했다.

“광룡의 새끼였나. 제정신이 아닐 만하군.”

다행히 말세는 아니구나.

켄이 내심 안도하는 그때 다른 결사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더욱 짙어진 죽음의 냄새를 맡은 네펠리나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광룡의 딸이자 템빨신의 사자다 추태를 보일순 없기에 정신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때였다.

“네펠리나?”

괴물들의 뒤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역시 살아있었다.

당연하다.

나의 신이,나의 부모가 죽을리 없는 것이다...

화색을 지은 네펠리나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절했다.

동족의 비늘을 몸에 두른 그리드의 모습이 끔찍해서였다. 심신미약 상태로 감당할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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