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20화
지혜의 탑은 천년도 더 전부터 존재해왔다.
결사들의 유일한 터전이었고 인류 최후의 보루였다.
무조건 안전해야했다.
물리적인 힘과 마법은 물론이고 권능,신성 등의 신비로도 관측할 수 없는 금지(禁地)로 작용할 필요가 있었다.
결사들은 특히 드래곤을 경계했다. 그들이 탑에 설치한 다중 결계 중 상당수가 용언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애초에 탑은 드래곤의 표적이다. 놈들의 마법과 용언을 막을 수단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충격이 컸다.
해츨링이 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니?
고작 해출링이 무슨 수로 탑을 찾아냈단 말인가?
결사들은 해츨링이 보통 놈이 아님을 한 눈에 간파하고 경계했다.
고룡이 폴리모프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정도다.
한데 실상은...
“히에엑!”
“...?”
“꼬르르륵...”
“...”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비명을 지르고,급기야 게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꼴이라니.
잔뜩 긴장한 채 놈을 경계하던 결사들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그리드가 해츨링 한 마리를 숨겨두고 있단 사실은 알았지만,그 해츨링의 특징까진 몰랐으므로 네펠리나와 결부 짓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반의 혼란이 가장 컸다.
“보통 놈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 광기가 지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출링이 기절을 해?
미쳐도 단단히 미친 해츨링이다.
흑요석 같은 비늘을 둘러쳤을 때부터 소름이 돋긴 했다.
비반은 눈앞의 기절한 해츨링에게서 광룡의 기질을 느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히 합리적이고 수준 높은 추리였다.
“당장 죽여야 하오.”
확신을 품고 칼을 뽑는 비반의 옆구리를 제시카가 찔렀다.
“라인하르트에 있던 해출링이잖아요.”
“...”
결사들 중 하야테와 제시카만큼은 네펠리나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야테야 모르는 게 이상한 위치였고,제시카는 라인하르트에 방문했을 당시 느꼈던 어떤 이질감과 현재 상황을 결부시켜 눈치했다.
라인하르트에 몇 차례나 방문했던 비반이 눈치 채지 못한 게 도리어 비정상이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니...?”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비반의 표정이 씁쓸했다. 그리드를 돌아보는 눈빛이 서글폈다.
‘비반은 네펠리나를 만난 적 없던가?’
만났어도 잊었겠지. 그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는 식의 핑계로.
비반이 서운해 하든 말든 그리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 일에 무심하여 파악이 늦거나 쉽게 잊는 비반의 성향에 완전히 적응한 것이다.
치매 노인을 부양하는 감각으로 대했다.
“네펠리나.”
그리드가 네펠리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라인하르트에 있어야 할 아이가 다짜고짜 찾아온 것으로 모자라 기절했으니 여러모로 염려가 되었다.
라인하르트가 습격당했을 거라는 가능성은 배제했다. 그럼 이미 진즉에 기별이 왔을 테니.
‘가출인가? 사춘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
그리드는 황당했지만 진지하게 의심했다.
드래곤은 알에서 부화하는 순간부터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다고 하지 않았나.
사춘기가 빨리 찾아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춘기란 지식의 수준과 별개로 감정적인 문제로 발생하는 질환이니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우엘의 존재가 증거였다.
“그, 그리드으...”
그리운 냄새.
그리드의 품에서 서서히 의식을 되찾은 네펠리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아니,아마 대부분의 드래곤에겐 동족애가 없느니라...”
“그래... 그렇더라.”
과거.
그리드는 네펠리나를 몸시 조심스럽게 대했었다. 드래곤의 막강함에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는지라 상전 모시듯이 받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변했다.
변화의 이면엔 네펠리나의 호감이 있었다.
네펠리나는 그리드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드를 좋아하고 의지해주었으니까.
그리드도 똑같이 그녀를 아껴주었고 둘의 사이는 점차 친구처럼 변해갔다.
마치 부녀지간 같다며 아이린이 흐뭇해할 정도였다.
아이린의 역할도 컸다.
인자하고 따스한 그녀를 네펠리나가 잘 따랐다.
네펠리나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인간과 공감하게 된 계기엔 아이린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아무튼 이제 그리드는 네펠리나가 불편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정도로 태도가 친근했다.
손길이 좋다는 듯,그리드의 가슴에 얼굴을 더욱 깊숙이 묻은 네펠리나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니 괜찮다. 네가 동족들을 살육하고 동족들의 뼈와 비늘을 몸에 뒤집어쓰는 야만인일지언정 난 네가 싫거나 무섭지 않다...”
“...”
네펠리나가 기절했던 이유를 뒤늦게 눈치 챈 그리드가 민망해서 입을 닫았다.
* * *
“저 아이를 살려둬도 되는 겁니까?”
원탁.
그리드를 제외한 결사들이 모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멤피스와 함께 탑을 누비고 있는 해츨링의 처우를 논하기 위함이었다.
결사들은 작금의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느꼈다.
천 년 동안 드래곤과 싸워온 자신들의 성역에서 해츨링이 뛰어노는 것이다...
탑의 근간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강한 거부감과 혼란이 일부 결사들의 평정심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제시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펠리나는 10좌 그리드의 사도에요. 우리의 명백한 우군이죠.”
프론잘츠 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10좌는 드래곤과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앞서 증명해보였다.
우리 형제가 봤을 땐 저 해츨링을 적대할 이유도,명분도 없어.
차라리 이참에 확실한 아군으로 삼아 함께 미래를 도모함이 옳지.”
8좌 아벨리오가 우려를 표했다.
“인신은 천상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 영생하기 힘드오. 더욱이 10좌는 바알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소. 바알의 강함이 고룡과 비견된다는 건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가 알지 않소?
만에 하나 10좌가 바알에게 패배하여 신격을 잃기 시작하고,언젠가 소멸하게 될 경우...
네펠리나는 더 이상 10좌의 사도가 아니게 되오. 그녀를 강제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말이외다.”
5좌 쥬르네가 동의했다.
“그치. 언젠가 우리의 뒤통수를 칠거란 말이야. 네펠리나를 당장 죽일 명분이 없다고 해서
탑을 활개 치게 놔둘 순 없다고. 탑의 구조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성룡이 돼서 탑의 결계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이라도 만들면 어쩔래? 계속 이사라도 다닐까? 모든 탑의 구조가 똑같아서
어디로 도망쳐도 결국 붙잡히게 될 텐데?”
의견은 크게 2개로 나뉘었다.
제시카,베티, 라드볼프,프론잘츠는 네펠리나를 믿고 자유롭게 놔두자는 의견이었고 아벨리오,켄,쥬르네는 네펠리나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리드에게 품은 호감과 별개의 문제였다. 탑의 존망이 걸려있었으니까.
“...”
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비반에게 쏠렸다.
회의 내내 침묵 중인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비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펠리나를 죽이지 않고 기억을 소거시키는 방법이 혹시 있소?”
“야탄의 정수를 이용하면 가능할 거다. 여기엔 야탄의 정수를 누구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베티가 있고 제시카와 라드볼프에겐 그녀를 도울 능력이 있으니까.”
“근데 그리드는 결사잖소? 앞으로도 자유롭게 탑을 왕래할 텐데 그때마다 사도들에젠 비밀로 하라고 할 셈이오?”
“그리드의 사도들에게 탑을 자유롭게 오갈 권한을 주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나? 탑은 천 년동안 우리의 터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그리드가 불편해서 탑을 자주 안 오게 되면?”
“그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문제지. 애초에 10좌는 명예직이다. 결사의 책임이 없으니 굳이 탑을 왕래할 의무도 없어.”
“음... 네펠리나 그 아이는 광룡의 딸이라고 하지 않았소?
광룡이 미친 이유에 바알과 야탄의 정수가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아는데...
딸에게마저 야탄의 정수를 사용하는 건 좀... 너무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싶소.”
“...”
결사들이 반박하지 못했다.
제시카는 비반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드물게 옳은 말을 하는 비반을 응원하는 것이다.
비반은 끗꿋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우리가 만약 네펠리나를 해친다면 그리드가 가장 큰 상처를 입지 않겠소? 나는 그런 거 싫소만.”
거기까지였다.
5대 3.
네펠리나를 믿고 놔두자는 의견에 비반이 힘을 보탠 것으로 회의는 의미를 잃었다.
게다가 결사들은 모두 그리드에게 큰 호감을 품었다.
네펠리나를 해치면 그리드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 거란 사실을 자각하자 아벨리오,켄,쥬르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내내 잠자코 있던 하야테가 미소 지었다.
“10좌 덕분에 우리의 결속이 더 강해졌구려.”
“크흠...”
결사들이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짧게는 수백 년부터 길게는 천년까지.
결사들은 정말 긴 세월 동안 함께해왔다. 비록 목적은 같아도 항상 사이가 좋을 순 없었다.
함께하는 세월이 긴 만큼 다툰 횟수도 많았다.
한데 오늘.
정작 중요한 안건을 두고 의견을 합치한 것이다. 심지어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워서.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불안해하는 결사들을 하야테가 안심시켰다.
이번 안건에 대해선 내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겠소. 그대들은 너무 근심 마시오.”
***
‘엄청 재밌나보네. 노에랑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진 거지?’
문 너머 복도에서 노에와 뛰어노는 네펠리나의 웃음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간간히 노에의 울음 섞인 절규가 뒤따랐지만... 그리드는 무시했다.
이참에 노에도 드래곤 공포증을 극복해야하지 않겠나.
안 그래도 베티에게 힘쓰는 법도 배웠는데.
스그극, 스그극.
바깥의 소란과 별개로 그리드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백색 검파에 문양을 새기는 중이었다.
크란벨의 팔을 통째로 써서 만든 검.
은은한 광채를 뿜는 유려한 칼날이 인상적인 신검이었다.
누가 박도 천하의 보검임을 알아 챌 외견이었는데,칼날과 손잡이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특징 외엔 구조적으로 특별한 부분이 없었다.
그리드는 이번 제작에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순전히 ‘이상적인 검’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소재 자체가 워낙 뛰어난 만큼 편법이 도리어 독이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제작에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소재의 특별함에 있었다.
크란벨의 팔.
이론상 궁극의 소재이니만큼 제련 난이도도 극악이었다.
랜디와갓 핸드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그리드 혼자 작업해야 했다.
게다가 그리드는 크란벨의 팔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고작 한 자루의 검에 팔을 통째로 사용했다.
불을 지피는 단계부터 살과 피를 제물로 삼았다.
뼈와 손톱은 유리처럼 투명해질 때까지 제련과 연마를 반복했다.
새벽의 한기와 낮의 온기가 온도에 작은 영향을 끼칠까 우려해 시간대도 신경썼다.
작은 비늘도 하나하나 떼어내서 따로 제련하고 연마했다. 고작 코등이와 손잡이를 만드는데
쓸 소재임에도 정성을 쏟았다는 의미다. 손잡이를 감쌀 가죽을 무두질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드는 기척만으로 방문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어느덧 열여덟개의 서사시를 쓰는 동안
최상급에 도달해가고 있는 초월의 격이 그의 감각을 보검처럼 벼려주는 덕분이었다.
“바쁠 텐데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호출하셨으면 곧장 달려갔을 텐데,하야테 님께서 어찌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하야테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네펠리나에게 금제를 걸어야할 듯하오.”
“아…”
그리드는 이유를 바로 눈치 했다.
안 그래도 네펠리나를 탑에 들인 게 찜찜하던 눈치였다.
드래곤과 싸우는 결사들의 소굴에 해츨링을 들인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긴 했다.
“금제라 하시면...”
“오늘의 기억을 봉인했으면 하오. 드래곤의 사념에 개입하는 건 본래 무척 어려운 일이나,
네펠리나는 그대의 사자이니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보오. 내가 돕겠소.”
하야테는 담담히 말했지만 음성이 복도까지 또렷하게 번졌다.
하야테의 방문에 경악해서 굳어 있는 네펠리나의 귀에 똑똑히 파고들었다.
간신히 두려움을 떨쳐낸 그녀가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싫으니라…! 나는…! 나는 그리드와 함께한 시간을 절대로!반드시!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니라!”
네펠리나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공포 때문이었다.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면서 심지어 눈물까지 글씽거렸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마주한다는 것.
해츨링 입장에선 감당하기 힘든 공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를 하야테가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하야테의 입가에 번진 미소의 의미를 오해한 네펠리나가 기겁했다.
“히,히익! 주,죽일 속셈이냐 앗...!”
“네펠리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가 네펠리나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준 뒤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네펠리나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거라면 간단하다. 만약...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리드가 죽더라도 나는 탑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용언으로 맹세하면 께서도 안심할 테지.”
“용언이라...”
하야테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해츨링은 용언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네펠리나가 얼마나 어린 해츨링인지 새삼 실감한 그의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태어난 지 몇 해 안 됐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가혹한 잣대를 대야하니 안타깝구나.'
역시 금제를 거는 수밖에 없다.
하야테가 판단했고,그의 기색을 읽은 그리드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나는,지혜의 탑과 결사님들께 그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는다. 이 맹세는 내가 죽는 날까지 유효하다.”
네펠리나의 말이 언령이 되었다.
용언의 주박이 그녀 자신을 강하게 옭아맸다.
이미 한 번 용언의 발동에 성공했던 경험과 그리드의 사도라는 신분,그리고 그리드와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결속해 만든 기적이었다.
탑이 그녀를 적대하지 않아 용언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허...?”
하야테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문밖에서 상황을 살피던 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재 드래곤...!”
비반의 순수한 감탄이 네펠리나의 어깨를 으쓱해지게 만들었다.
마음의 짐을 던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오직 노에의 반응만 똥했다.
노에는 네펠리나가 너무 싫었기 때문에 그녀가 잘 되는 꼴을 보자 배알이 꼴렸다.
같은 시각.
“오오…! 오오오...!!”
템빨신을 거부하고 대륙 각지에 흩어진 삼신교의 잔당들이 눈물을 흘렸다.
빛과 함께 강림하신 아름다운 천사께서 성검을 내려주신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