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19화
“공백이 너무 길구나.”
네펠리나에겐 자각이 있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자각.
물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건 사실이다.
길바닥에서 뛰노는 밤톨만한 꼬맹이들보다 자신이 어리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드래곤이다.
심지어 고룡의 직계였다.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고, 앞으로 족히 천 년은 해츨링으로 분류 될 신세였지만.
네펠리나는 스스로가 위대한 존재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자신을 보호하고 배려해준 이유를 알고 있단 의미다.
잠재력.
그리드는 절대자가 될 운명인 네펠리나를 존중해주고 있었다.
‘반드시’ 다가올 미래를 기다렸다.
필시 함께하는 미래일 터였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한데 이게 뭐란 말인가.
벌써 5개월 넘도록 그리드를 만나지 못했다.
"흥."
콧방귀 뀐 네펠리나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인간의 모습으로,인간이 만든 옷을 입고,인간의 식기를 사용해서,인간의 방식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위대한 존재.
이게 지금의 나다.
그리드에게 맞추어진 모습이었다.
나 역시 그리드와 함께 할 미래를 고대하고 있기에 썩 달갑잖은 현재를 감수하고 있단 말이다.
위대한 존재로서의 존엄을 버려가면서까지 인간의 문화를,정서를,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리드와 어울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한데 정작 그리드가 곁에 없다.
본래부터 방랑벽이 심한 놈이긴 했지만 이번처럼 긴 공백은 처음이었다.
그래선지 요즘 따라 커다란 식탁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금조차 함께해주지 않는 주제에 미래를 함께할 속셈을 품어?
이게 그,다 잡은 생선? 취급이라는 건가? 괘씸한.”
네펠리나는 어리다. 더욱이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학습한 부작용으로 인해 부모의 정을 갈구했다.
급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마력을 일으켰다.
접시에 남은 수십 인분의 음식을 손도 대지 않고 모조리 입속으로 빨아들였다.
성장기라서 어쩔 수 없다. 화난것과 별개로 삼시세끼는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만 했다...
“사도란 응당 신의 곁에 있어야하는 법이다.”
해츨링의 말은 언령이 되지 못한다. 용언을 써봤자 효력이 없었다.
용언이란 언약의 이행과 격을 축적함으로써 위력을 키우니까.
하지만 네펠리나는 고룡의 혈육이다. 비록 미친 광룡의 딸이긴 했지만,네바르탄의 광기는 후천적인 것이었다.
네펠리나는 광기 따위를 계승하지 않았다. 순전히 재능과 자격만을 계승했다.
편법을 써서 잠재력을 당겨 쓸 정도로 영리했다.
그녀는 법칙을 이용했다.
고대를 아득히 거슬러 올라가는 태초.
처음부터 존재했던 신들이 직접 세운 법칙.
신은 사도를 거느리며,사도들은 늘 신의 곁에서 신의 명령을 따른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그 절대적인 법칙에 미약하나마 용언을 보태자 네펠리나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용언의 발동이 불완전하게나마 성공한 것이다.
이 순간 그녀의 위치는 그리드가 있는 구역과 가까워졌다.
제 발로 도살장을 찾아간 소쯤으로 비유가 가능했다.
* * *
“어머.”
네펠리나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낀 사리엘이 포근하게 웃었다.
그녀는 홀로 자유롭게 노니는 어린 해츨링의 모습에서 평화를 느꼈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들을 물리치고 인간들 스스로 지켜낸 평화.
한없이 고결하고 사랑스럽다.
자유로운 다른 사도들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물론 사리엘에게 족쇄가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인자하신 템빨신께선 사도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시니까.
하지만 사리엘은 자신의 폭주를 염려했다.
무저갱에 유폐된 채 긴 시간을 악마로 존재하지 않았나.
근본을 잊은 세월 동안 축적 된 마기와 광기가 여전히 그녀의 내면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따뜻한 차가 좋았을까요?”
황비 아이린의 질문이었다.
문득 말이 없어진 사리엘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얼음이 둥둥 뜬 찻잔을 건네받은 사리엘이 방그레 웃었다.
“아뇨. 호의가 담긴 선물은 뭐든 좋답니다.”
현재 사리엘은 여성체의 모습이었다. 아이린과 어울릴 때는 여성의 모습이 좋다는 사실을 경험을 토대로 학습한 결과였다.
네펠리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인간들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 발 늦게 메르세데스가 도착했다.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라인하르트를 한 바퀴 전력으로 질주해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기사들의 왕이,왜?
아이린은 의아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곁에 앉혔다.
황비의 자격을 갖춘 아이린.
기사도를 따르는 메르세데스.
신들에게마저 정의를 집행했던 사리엘.
강력한 신념을 지닌 세 여인에겐 공통점이 많았다. 정서적인 교감이 쉽게 이루어졌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였으며 함께 어울리길 즐겼다.
조식 후에 갖는 이 짧은 티타임은 친목의 연장선인 것이다.
어딘지 민망해하는 기색인 메르세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리엘이 입을 열었다.
“욕망 중에서도 성욕은 죄가 아닙니다. 종족의 번식을 가능케 하므로 차라리 성스러운 것이죠.”
"푸훗...!?"
메르세데스가 방금 막 입에 머금었던 차가운 차를 뿜어냈다.
하지만 기세 좋게 뿜어진 찻물은 사리엘을 적시지 못했다.
사리엘의 주변에 번져있는 빛.
모래알보다 작은 저 빛의 결정 하나하나가 사리엘의 마력이자 신성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론 침범할 수 없는 결계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리엘이 고개를 가웃거렸다.
“어찌하여 당황하십니까? 죄인같은 표정을 짓고 계시기에 염려마시라고 조언했을 뿐인데요.
설마 정녕 자리에 늦은 점에 죄책감을 품으신 겁니까? 후훗,순수하시군요.
그대는 늦지 않았습니다. 저와 황비님이 약속보다 이르게 도착했을 뿐이죠.”
“다,다다 당신, 조금 전에 대체 무슨 망발을...?”
메르세데스의 뺨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
성욕? 갑자기 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리엘의 속내는 혜안으로도 읽기 힘든 것이었다.
“성,성,성욕이라니?”
“부정하시는 겁니까? 이상하군요. 그대의 욕실에 도배 된 초상화들은 성욕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 맞을 텐데요. 그대는 늘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그 초상화들을...”
이하 생략.
차마 입에 담아선 안 될,일반인의 상식으론 받아들이기 힘든 상스러운 말들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재잘대는 사리엘이었다.
망연자실한 채 그녀를 바라보던 메르세데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그만! 닥치십시오.”
내 욕실은 언제 엿본 거지?
뭐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메르세데스는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죄,심지어 신들의 죄마저도 감시했던 존재가 바로 대천사 사리엘이다.
게다가 그녀의 임무는 아이린의 호위 였다.
라인하르트 구석구석에 사리엘의 시선이 미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천사의 인식이 인간과 같을 리 없다.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을 모를 수도 있었다.
그녀를 상대로 굳이 상식 운운하며 말싸움을 해봤자 이쪽만 손해란 의미다.
“아하.”
잠자코 대학를 듣던 아이린이 갑자기 탄식했다.
레이단의 연금술사들이 목숨을 바치고 지킨 투명한 물질의 정체와 쓰임새를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놀랍기도 했고,민망하기도 했다.
메르세데스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치심과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를 아이린이 위로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폐하를 사랑하기 때문이잖아요?”
“...맞습니다. 게다가 저는,연금술사들이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그것을 지키려고 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연금술사들을 희생시킬 의도는 추호도 없었단 의미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튼 너무 미안하고 민망했다...
다시 말문이 닫힌 메르세데스의 어깨를 아이린이 토닥여주었다.
“연금술사 분들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낸 물건이니만큼 경께선 더욱 그것을 소중히 하시고
열심히 사용... 하실 의무가 있는 거랍니다. 누구도 경을 탓하지 않으니 떳떳해지세요.”
반면 사리엘은 메르세데스를 위로하지 않았다.
“사도인 그대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템빨신을 원망하진 마십시오.
만에 하나라도 신께서 그대를 방치하신 탓에 외로워 욕망이 들끓는 거라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한낱 추론 따위로 신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건 죄악이니까요.
제 생각엔 평균보다 욕망이 강한 그대를 신께서 시험하고 계신 것이니,경건한 마음으로
시련을 이겨내도록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자괴감에 빠진 메르세데스는 어서 이 불편한 티타임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여섯 번째 사도 지크.
수백 년을 그랜드마스터로 군림하며 사하란의 내정에 간섭했던 그는 정치력마저도 높았다.
말 그대로 팔방미인인지라 라우엘이 집착했다. 온갖 직책에 앉혀서 떠받들고 은근히 업무를 맡길 정도였다.
‘변절자라도 나타난 건가?’
황궁.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지크가 고개를 가웃거렸다.
템빨신전이 있는 방향에서 느껴지는 메르세데스의 기파가 몹시 어지럽게 일렁인 까닭이다.
기사왕의 드문 동요였다. 잠시나마 살의와 실의가 교차할 정도였는데,어지간히도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 듯했다.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이렇듯,초월자 간엔 비밀이 존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물을 꿰뚫어 보는 경지에 오른 탓에 서로가 서로를 쉽게 파악하고 비밀을 파헤쳤다.
메르세데스에겐 절망적인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라인하르트엔 괴물이 너무 많았다…
꽈르릉!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굉음이 들려 왔다.
지크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도시 너머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을 가로질러 산의 정상까지 도달하는 시선이었다.
반신의 육신에 룬어의 힘을 보탠 시야 확보.
바르바토스의 눈을 웃도는 시야에 브라함의 모습이 포착됐다.
라인하르트에 서식하는 괴물 중에서도 수위를 논하는 실력자.
몇 달째 새로운 마법을 연구 중인 그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 썩 불쾌한 눈치였다.
불청객의 정체는 피아로였다.
템빨신의 여섯 사도 중에서 명백하게 약한.
피아로의 나약함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반신 지크, 베리아체의 직계 브라함,대천사 사리엘,광룡의 새끼 네펠리나,같은 인간이나 혜안을 지닌 메르세데스와 비교할 상대가 못 되었다.
‘검성이 됐다면 달랐겠지만.’
피아로는 사하란 출신이다.
지크는 당연히 피아로를 알고 있었다. 피아로 본인은 모를 테지만,아직 기사가 되지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다. 저만한 역량을 지닌 인간은 여러 시대를 통틀어
봐도 드문 법이기에 희미하게나마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피아로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적기사단의 단장이 되었고 검호가 되었으며 전설의 농부가,
템빨신의 사도가 되었다. 비록 검성의 길은 포기했어도 뛰어난 인간임은 명확했다.
사도들 중에선 네펠리나와 나란히 최약체일지 몰라도 속세에선 절대자 행세를 할 수준이었다.
지크는 피아로를 존중했다.
조언을 얻기 위해 브라함을 찾아간 듯한 그를 내심 응원하게 됐다.
‘자연지기를 운영하는 건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테지. 주화입마를 경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벽을 넘어야할 텐데.’
생각하던 지크가 문득 굳었다.
서류에 사인하던 손을 잠시 멈췄을 정도였다.
라인하르트를 둘러싼 황금빛 논밭이 일제히 물결친 까닭이다. 황성 정원의 나무와 꽃들 역시 요란하게 흔들렸다.
저 먼 산에 올라있는 피아로의 존재를 어떻게 감지하고 정기를 나눠주는 것이다.
자연경의 범위가 무지막지하게 넓어졌다는 뜻이었다.
"...허."
오래간만에 돌아왔다 싶더니,단순히 조언이나 얻으려던 게 아니었나.
드물게 감탄하는 지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