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16화 (1,504/1,794)

75권 18화

고작 수십억,수백억대 자산에 만족하고 안위하는 사람은 템빨단원이 될 자격이 없다.

템빨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콘텐츠를 선점해왔고 그리드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손쉽게 생산하는 경지에 올랐다.

최근 크리스가 전설 클래스 전직서를 구매했듯이,템빨단원들은 천문학적인 가치의 물건을 구매할 기회에 상시 노출되어 있다고 봐야 옳았다.

하물며 고대의 도시와 용살자가 출현한 상황이다.

그 영향으로 잊힌 문헌과 보물등이 속속들이 발굴되고 있었다.

그간 모아둔 재산의 액수가 아무리 커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에 안주하고 도태 될 작정이 아닌 이상에야 소처럼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했다.

또한 검소한 습관을 몸에 새겨야했다.

그리드가 친히 깨우쳐주었다.

크리스를 한 순간에 빚쟁이로 전락시켜가면서까지.

오랜 벗이자 동료를 희생시키는 건 그리드 본인에게도 몹시 피로운 일이었을 텐데도,모두를 위해 크리스를 희생시켜 교훈으로 삼도록 의도했다.

‘앞으로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질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눈치셨지.’

영우씨가 대단한 사람이란 건 처음 만난 날부터 알았다. 실제로 그는 이 분야 최고의 실력자가 됐다.

존경할 부분이 워낙 많은 까닭에 위인으로 칭송 받을 때도 당연히 납득했다.

하지만 선견지명까지 탁월할 줄은 몰랐다.

사실 지능 자체가 엄청 높은 게 아닐까?

이쯤 되면 완벽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에게 품은 호감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

저축을 위해 화보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유라.

넉달 동안 지옥 원정대를 이끌며 외부활동을 병행해온 그녀의 피로는 몹시 컸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온 덕분에 육체적인 피로는 덜했지만 정신적으로 지쳤다.

고작 몇 달의 일정으로 앓는 소리라니.

유라는 나약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들이 봤을 때 그녀는 힘든 게 당연했다. 쓰러지지 않은게 용했다.

20억 플레이어의 선망을 받는 하이 랭커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최고가 됐다. 개성이 강해도 너무 강한 그들을 뜻대로 통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3명의 이종족 왕들은 또 어떤가.

자신들이 충성하는 건 오직 그리드 폐하뿐이라며 대놓고 유라를 무시한다.

총대장인 유라의 명령보다 본인의 판단을 우선시했다.

그들 탓에 망친 작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라는 단 한 번도 그들을 탓한 적이 없었다.

원정대원이 서로 반목하지 않게끔 자기 자신을 가장 철저하게 통제하고 원정대를 이끌어왔다.

여태껏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게끔.

의외로 지슈카가 많은 도움을 줬다.

원정 기간 동안 유라와 지슈카는 단 한 번도 충돌하지 않았다. 기싸움조차 없었다.

애초에 기싸움을 해봤자 대부분 지슈카가 지긴 했지만... 아무튼 두 사람의 신경전은 평소 유명할 정도였다.

한데 최근에는 친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우애를 과시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인정하게 된 까닭이다.

지옥에서 두 사람은 경쟁자가 아닌 든든한 전우였다. 누구보다 서로를 의지했다.

미야옹.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욕조 작동 어플을 실행시키던 유라가 우뚝 멈췄다.

어서 씻고 침대에 욕구를 무의식으로 눕고 싶다는 욕구를 무의식으로 치워버렸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야옹.

유라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가 재차 울었다.

무척 못생긴 고양이었다. 털 무늬가 입살맞았다. 심술궂게 보였다.

몸에 살집도 많아서 이 동네 길고양이들의 먹이를 다 뺏어먹고 다닐 것 같았다.

"..."

유라는 작은 동물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너무 귀엽고 예쁘지만 작아서였다.

함부로 만지기라도 했다간 다칠까봐 걱정됐다.

물론 관심은 많았다. 힘껏 끌어안고 털에 얼굴을 부비고 싶다는 충동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

그래서 나름의 지식이 있었다.

‘겨울.’

날이 차다.

역대 최저 흥행을 기록한 국대전 폐막 이후 대한민국의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그리고 고양이의 털은 추울 때 부풀어 오른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공을 좁히는 영향이라고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따뜻한 곳을 찾아온 거니?”

냐옹.

대답하듯 우는 고양이는 자세히 볼수록 못생겼다.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기피할 것 같아서였다.

먹이를 챙겨주기는커녕 학대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냐옹.

슬며시 손을 뻗자 다가온 고양이가 유라의 하얀 손에 뺨을 비볐다.

흠칫 놀란 유라가 당황하다가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등을 만져보았다.

부푼 털 너머로 비쩍 마른 몸이 느껴졌다. 겉으로 봤을 땐 뚱뚱한데 사실은 저체중이었다.

“으흠... 기다리렴.”

유라가 주차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대저택은 주차장도 거대했다. 대형차를 20대 이상 주차해도 공간이 남을 정도여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창고도 여러 개였다.

창고 한 곳엔 고양이용 통조림이 잔뜩 쌓여있었다.

정작 고양이에게 줘본 적은 없다.

유라 본인이 길고양이를 찾아다니는 성격도 아니고,이런 식으로 거리낌 없이 다가온 고양이는 여태껏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

굳이 통조림을 구비해놓은 이유는...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그녀는 워낙 준비성이 철저했다.

“천천히 먹어.”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충분했다.

준비성이 철저한 만큼 주기적으로 새로 구매해놨던 덕분이다.

냐옹.

통조림을 정신없이 먹다가도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고양이.

심술궂은 얼굴과 달리 무척 착했다.

‘사랑스러운 아이.’

고양이 앞에 앉아 미소 짓는 유라의 마음이 포근해졌다. 자연히 피로가 사라졌다.

여유가 생긴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싹텄다. 영우씨가 보고 싶다는 생각 외엔 전부 일과 관련 된 생각들이었다.

‘아모락트…’

제2위 대악마.

불시에 의태를 보내는 식으로 원정대를 위협해온 그녀는 매번 유라에게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라고. 네가 너무 탐난다고.

정신과 정신을 연결해 아무도 모르게 속삭여왔다.

물론 유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악마가 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오래 전에 결정한 일이다.

30위대 대악마가 일국을 멸망의 위기에 빠뜨리던 시절.

일찍이 악마가 되어 군림할 수 있었던 유라는,스스로의 의지로 힘든 길을 선택했었다.

오히려 악마를 죽이는 데빌슬레이어가 됐다.

만약 악마가 됐다면 영원히 그리드와 적대했을 테니까. 싫었다.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뀔 리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라가 봤을 땐 아모락트도 바알과 비슷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다.

야탄을 위해서 지옥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계획이라며,인류에게도 이로운 일이라고 아모락트는 끊임없이 유라를 설득했지만 유라는 결코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아모락트가 바로 분쟁(粉爭)의 대악마이기 때문이다.

염치가 없는 건지,단순히 자각이 없는 건지.

아모락트 본인은 자신의 이명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행동했지만 유라는 마땅히 경계했다.

지금 당장은 아모락트가 바알을 적대하는 게 사실일지 몰라도 절대로 손을 잡아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야탄의 명예,지옥의 복원 같은 건 핑계일 수도 있어.’

분쟁.

아모락트의 갈망은 다분히 악의적이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만드는 게 그녀의 본질일 터였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알보다 도리어 더 질이 나빴다.

냐옹.

유라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통조림을 깔끔하게 비운 고양이가 그녀의 종아리에 뺨을 비비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히 웃은 유라의 하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바보처럼 웃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하지만 오늘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 *

드래곤 슬레이어.

실존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존재의 등장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반면 정령계는 고요했다.

이곳에 있는 인간은 크라우젤이 유일한데 하필 그는 말수도 적었다.

‘힘들군.’

크라우젤은 파티 플레이를 선호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합을 맞추는 걸 불편하게 여겼다.

대체적으로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직관(直觀)이 강점인 이 재능의 총아는, 타인과 협력하는 순간 자신의 수준을 몇 단계나 하락시켜야 했다.

추리,이해,판단 따위의 과정을 생략하고 움직이는 몸은 아군조차 혼란시켰으니까.

협력엔 상호 이해가 필요한 법인데,크라우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협력이 성사되지 못했고,언젠가부터 크라우젤은 솔로 플레이를 선호하게 됐다. 스스로를 의도치 않게 고립시키고 적응해갔다.

그리드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크라우젤은 변했다.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순간.

굳이 따라다니며 보조를 맞추던 하오와 알렉산더의 부재가.

- 검성?

지옥에서 함께 싸웠던 템빨단원들의 빈 자리가.

-후훗,고작 그 정도로?

무엇보다도 그리드와 등을 맞댈 수 없다는 사실이 크라우젤을 점차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바람의 정령왕이 뛰어났다.

장장 4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백 수천 아니,그보다 셸 수없이 많은 암흑 정령들을 베어온 크라우젤은 레벨이 크게 올랐을뿐만 아니라 ‘딜레이’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자부한다.

육신을 탈피한 영체.

사고를 쫓지 못하는 이 느린 몸을 어떤 식으로 운영해야 좋을지 그는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제아무리 정확한 타이밍을 노리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수싸움을 해봤자 행동이 굼뜨다는 점이 문제였다.

속도를 장기로 삼는 바람의 정령왕과 상성이 나빠서 철저히 유린당했다.

육체의 손실을 메우는 과정에 발달시킨 초감각과 무형지기가 없었다면 진즉 사망하고 정령계 밖으로 추방당했으리라.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인간은 그대로네. 썩 대단치가 않아.

너희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그리드만 봐도 말이지. 끝까지 나를 의심하지 못하고 신뢰하더라?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오성이 부족한 거겠지.

갈기갈기 찢겨나간 영체.

반투명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거센 폭풍을 막아내던 크라우젤의 표정이 사늘해졌다.

한 순간도 떼지 않았던 입을 처음으로 열었다.

“...의심할 가치도 없었으니까.”

- 응?

“그리드에게 있어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니까,대수롭지 않게 넘긴 거겠지.”

크라우젤에게 그리드는 각별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목표로 삼은 사람이었다.

우상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부턴 등을 쫓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지곤 했다.

일종의 성역인 것이다. 타인이 함부로 침범해선 안 되는.

-...하? 하핫! 기껏 한다는 말이 이성과 거리가 멀구나.

검의 성인을 자처하는 주제에 너무 감정적이야. 네가 약한 이유를 알겠...어?

황당해서 웃던 바람의 정령왕이 움찔 떨었다.

하찮기 짝이 없던 인간의 의지가 급격히 강해지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당신의 발언을 토대로 감정의 표출을 확인합니다.]

감정의 표출.

심검을 무기로 삼는 검성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크라우젤에게 모자랐던 부분이 이 순간 충족됐다.

시스템이 그의 발성과 호흡,맥박 등을 분석하고 판단했다.

스카아악!!

무형의 검이 폭풍을 갈랐다.

드디어 뚜렷해진 검성의 의지를 증명하듯,반투명했던 푸른 영체의 색채가 점차 짙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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