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15화 (1,503/1,794)

75권 17화

어느 날.

상처 입은 드래곤이 도시 한복판에 추락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필 그 자리에 있던 도시가 잘못한 것이다.

드래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놈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도시의 창문들이 와장창 박살났다.

신전을 둘러싼 스테인드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스테인드글라스 속 레베카 여신께선 여전히 인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계셨지만,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여신의 기도는 기껏 도래한 재앙으로부터 인간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젊은 하야테는 넋을 잃고 말았다.

드래곤의 찢어진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광풍에 휩쓸려 날아가는 이웃들,드래곤의 피투성이

꼬리가 휘둘릴 때마다 짓눌려 죽는 벗들,드래곤의 비명에 섞여 나온 불길에 타들어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저 명하니 바라만 보았다. 반파 된 성을 디딤돌 삼아 몸을 일으키는

놈의 발에 풍선처럼 터져 죽는 연인의 모습까지 보고 나서야.

一정말로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그는 이것이 악몽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멈췄던 사고가 폭발적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사고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뇌를 저미는 통증을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었다.

벗과 가족들의 시체를 딛고,연인이 남긴 핏자국을 뛰어 넘은 끝에 드래곤의 부러진 뿔을

붙잡아 도약한 그는,갈라져 있는 비늘의 틈새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포효하듯 뭐라고 외쳐대는 드래곤이 잠잠해질 때까지 계속,집요하게 놈의 목을 노렸다.

분노,살의,절망 따위의 감정들이 그의 재능을 자극했다. 확장된 사고의 도움까지 받아

파멸적인 검기를 손아귀에 넣고 의념과 일체시켰다. 급기야 드래곤의 목을 베어 떨어뜨렸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핏물을 뒤집어쓴 채였다.

수천 년 동안 흘러왔을 피를.

붉게 칠해진 시야를 통해 마주한 드래곤의 팅 빈 동공을,하야테는 여태껏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다. 너는 ‘우리’에게 새겨졌다.

너 또한 나처럼 가혹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금색의 거대한 눈동자로부터 하야테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드래곤 슬레이어란,그런 절망과 공포 속에서 피어난 존재인 것이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하야테는 단 한 번도 공포를 떨쳐내지 못했다. 매일 두려움에 떨었다.

그날의 공포를 잊기엔 드래곤의 힘이 너무 파멸적이었다.

그럼에도 싸워온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과 같은 절망을 겪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길 바라서였다.

두려움을 내색하지 못한 채 세상 모든 드래곤의 살의와 위압을 견뎌왔다.

“세력 싸움에서 지고 상처 입은 드래곤을 우연히 만났지. 놈의 기세에 겁을 먹은 나는

살기 위해 발악했고 끝내 놈의 목을 떨어뜨렸소."

단순히 운이 좋았다.

그리드를 처음 만난 날.

하야테는 그리드에게 용살자가 된 경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쉬운 표현을 썼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지 않았다. 차라리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처음부터 가슴에 품었던 두려움.

나날이 커져온 그 감정을 은연중에 드러낼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젠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었다.

그날의 재앙을,담담하게.

하야테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가 그리드에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작은 약속이 저 위대한 인물에게 용기를 줬다는 사실이 기뻤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한참 감상에 젖었을 때였다.

“이보시게 후배.”

눈물을 홈친 비반이 끼어들었다.

인중에 콧물을 흘린 자국이 또렷했다. 의지만으로 대상을 베는 검성답게 감정의 표출이 남보다 강한 것 같다...

‘…아니,그건 너무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건가.’

같은 검성인데 어찌 저렇게 다를까.

그리드는 자연히 크라우젤이 떠올랐다.

비반과 크라우젤의 전혀 다른 성격을 비교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렸다.

“이제 10좌가 됐으니 탑에 머무는 날이 많겠지? 내가 이곳저곳 안내해주고 싶은데.”

지혜의 탑은 최근에 이사했다.

그리드는 이곳에 벌써 46일을 머물렀지만 그간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딱히 둘러보지 않았다. 애초에 관광이 목적이 아닌지라 작업에만 집중해왔다.

“음... 괜찮습니다. 종종 찾아오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제 방에만 머물 것 같아서.”

탑의 결사가 됐다고 해서 의무까지 떠맡은 건 아니었다.

드래곤 아머 세트를 무장한 그리드는 하야테를 제외한 결사들을 명백히 초월하게 됐다.

결사들의 허드렛일이나 맡기엔 너무 과한 전력이므로 선구자로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하야테가 그에게 결사의 지위를 내린 이유는 선구자의 책임을 버리되 그 이상의 혜택을 누리라는 호의 였다.

딱히 큰 역할이 없을 터라 탑의 구조를 자세히 이해해둘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비반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가끔은 청소... 아니,정화 작업을 해야 할 터인데.

그때를 대비해서 구조를 숙지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제가 왜…?”

“그야 막내니까?”

“비반 당신은 설마 자신이 청소를 하는 이유를 잊은 겁니까? 아니면 멋대로 기억을

왜곡한 건가요? 당신이 청소를 도맡게 된 이유는 막내라서가 아니라 죄를 범해서였는데요.”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을 했다고? 솔직히 단순한 체벌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가혹했던 게

사실 아니오? 그리고 제시카,후배에게 말하고 있는데 괜히 끼어들지 마시오.

내게도 선배의 체면이 있거늘. 안 그런가? 10좌 그리드.”

“발음 좀... 살살 해주십시오...”

“음? 허,이젠 별 걸로 다 트집이군? 같은 결사가 됐다고 해서 나를 너무 천대하는 게

아닌가? 내가 이래 뵈도 자네보다 족히 400살은 연상인데.”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그리드. 이자가 제정신인 경우는 대개 별로 없으니 괘념치 말아요.”

“그래도 검을 쥐실 때는 누구보다 멋지단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그야 당연하지. 내가 검성 아니겠나. 과연 그리드 자네의 됨됨이가 아주 옳구먼.

결코 초심을 잊지 않을 성격이야. 아니,가만... 검이 없을 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가? 뭐...? 설마…”

“...”

비반이 중얼거리는 동안 그리드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리드는 비반이 정말로 좋았고,존경하기도 했지만,그렇다고 해서 비반의 성격 전부를

수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보면 좋지만 매일 보긴 싫은 인물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크라우젤이 대단하긴 하네.

다른 결사들이 비반을 붙잡아두는 사이.

방으로 돌아온 그리드가 다음 선구자로 지목 된 크라우젤을 떠올리며 헛웃음 흘렸다.

크라우젤은 검성이 되고 레벨이 초기화된 거로 모자라 최소 1년 이상을 키리누스 밑에서

수학했었다. 심지어 또 몇 달을 미르에게 집착하며 몇 번의 사망을 감수했다.

근데도 레벨이 두 번째로 높다고?

물론 크리스의 레벨이 최근에 초기학 된 여파이긴 했다.

템빨단의 상위 전력이 이종족의 왕 같은 고레벨 NPC와 함께 지옥에서 활동하느라 한동안

성장이 정체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아모락트가 꾸준히 훼방을 놓는 중이라고 했으니.

애초에 크라우젤은 재능의 정점이다.

템빨단원들조차 동경해온 인물로,유라,지슈카,레가스,폰,그리고 그 자존심 높은

크리스가 ‘크라우젤은 결코 넘을 수 없다.’는 말을 한 번 이상씩은 했었을 정도다.

심지어 하오는 스스로 크라우젤 밑에 들어가길 선택했다.

그리드를 경쟁상대로 여기지 못하듯 크라우젤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못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크리스의 뒤를 잇는 고레벨 플레이어가 당연히 유라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지옥이라는 사냥터를 통째로 독식했던 유라의 성장력은 한때 잠시나마 그리드와 비견 될 정도였으니까.

최근 몇 달 동안 성장이 주춤했을 거라는 점을 감안해도,크라우젤의 지난 행보를 생각해보면

유라의 레벨이 그보다 낮은 건 다소 납득이 안 됐다. 아니,내가 섣불리 재단할 부분이 아니지.’

재능 면에선 크라우젤이 독보적인 게 사실이다.

게다가 크라우젤의 칭호와 히든피스 보유량은 그리드 바로 다음이었다.

무엇보다 검성이다.

베지 못하는 적이 없으므로 사냥 중 장해를 받을 확률이 적다. 광역 범위 스킬도 충분하게 창조해놨을 테고.

하물며 그는 거의 3달째 정령계에 머물고 있었다.

여태껏 아무도 가지 못했던 그곳에서 최초 발견 보상으로 경험치 버프를 얻었을 확률이 높다.

얼마나 대단한 폭업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다 떠나서.’

데빌슬레이어는 선구자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야테가 자체적으로 판단한 걸 수도 있다.

선구자의 가장 큰 임무는 속세와 탑의 가교 역할인데,데빌슬레이어가 머무는 장소는 대개 속세와 동떨어진 지옥이니까. 선구자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이쪽이 차라리 납득이 가는군. 게다가 크라우젤은 이미 한번 선구자였던 경험도 있으니까.’

가없게 된 사람은 크리스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히든 클래스 전직서를 선물(?)하는 걸 좀 나중으로 미뤘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나라고 해서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게다가 쯔단의 후예는 난이도가 유독 높은 클래스다.

일찍부터 전직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숙련도를 쌓는 편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다.

물론 선구자 자격을 얻은 뒤에 전직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외엔 선구자 시스템을 모르기도 했다. 크리스가 괜한 정신적 충격을 입을 걱정은 없었다.

죄책감을 덜어낸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불쑥 찾아온 결사들 탓에 잠시 지체되긴 했지만,그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전에 하야테에게 얻었던 비늘과 크란벨의 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중 비늘은 구젤의 비늘을 추가로 얻을 때 수량이 부족하면 보태 쓰는 식으로 이용할 거지만,크란벨의 팔은 당장 제련해서 검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새로 만든 건틀릿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드래곤 웨폰이 최소 2자루는 있어야 옳지.’

이프리트의 팔은 드래곤 웨폰의 공격력을 상승시킨다.

그리드는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을 상시 쌍수검으로 운용하며,아이템 합체의 뼈대로 삼을 계획이었다.

‘ 시작하자.’

그리드가 재차 정신을 집중하는

그때...

“밥 줄까.”

“왜 눈만 마주치면 밥밥 거리냐옹? 난 돼지가 아니라 지옥 제일 마수 멤피스님이란 말이다옹!!”

“간식 줄까. 어묵.”

“...흥,정 뭘 바치고 싶으면 어디 줘봐라냥.”

한 달 넘게 탑을 활보하다가 완전히 적응해버린 노에.

배를 내밀고 낮잠을 즐기는 수준까지 이른 녀석에게 베티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드 외엔 함부로 들이지 않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갈 정도였는데,곧 노에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선반에서 멤피스 해부 표본을 발견한 까닭이다...

“네 발바닥은 왜 분홍색이야.”

“카악! 카아악!! 살인마다! 살인마다캭!!”

털을 바짝 세운 노에가 몸부림쳤다.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정말 온 힘을 다해서 발악했다.

하지만 베티의 방은 방음이 워낙 잘 됐다. 창문도 항상 닫아뒀기 때문에 노에의 비명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한편 랜디는...

“내 기술에 관심이 있나보구나?”

끄덕.

결사들의 호의를 얻기 시작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것이 주요했다.

평균 연령이 수백 살인데다 오랫동안 고독했던 결사들은 랜디를 마치 손주처럼 대해주었다.

사실 랜디의 나이도 200살이 넘었지만 결사들의 눈엔 애였다.

노에와 랜디 역시 새로운 기연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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