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14화 (1,502/1,794)

75권 16화

바알의 첫 번째 계약자가 이르길,바알의 타액이 악마를 빚는다고 하였다.

바알의 계약자 중 진정으로 악한 자가 있었다면 최악의 흉수가 탄생했을 거라는 사견을 덧붙였다.

긴 세월 무력을 증명해온 반용족 또한 단 한 방울의 혈액으로 탄생한 일족이었다.

악룡 번헬리어가 흘린 피가 우연히 우물에 떨어져 평범한 인간들을 변이시킨 것으로 추정됐다.

그럴싸한 전설을 만들고 믿어온 반용족 본인들은 부정할 테지만 그게 현실이다.

초월적인 존재들의 영향력이란 민간의 상식을 크게 비켜났다.

보통 사람이 봤을 땐 범상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나 행동으로 쉽사리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물며 드래곤의 비늘이다.’

드래곤의 비늘은 범상하지 않다.

오히려 드래곤의 신체 중에서 가장 단단했다.

실제로 증명 된 사실이며,그러므로 드래곤의 가장 큰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절대종의 갑주(甲富).

드래곤의 비늘이란,온 세상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물질일 뿐만 아니라 위대하고 강력한 상징적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드래곤 하트와 뿔 바로 다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레이더가 오류를 일으키는 게 당연하다.’

지혜로운 거인족 파일볼프가 긴 세월의 연구 끝에 만든 물건.

마력과 기척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드래곤을 식별하는 레이더가 그리드와 드래곤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리드는 절대종의 갑주를 완벽하게 재현해서 무장했으니까.

은은한 광체를 내뿜는 챗빛의 건틀릿과 각반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했다.

수백 개의 작은 비늘이 발산과 흡착을 반복하며 꿈틀거렸다.

그리드의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도록 따르는 수준을 넘어서 활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마법적인 기능이 아니라 기술의 영역이었다.

신의 기술이 비늘의 성능을 온전히 끄집어냈다.

“축하드리오. 절대자들의 호신강기를 온전히 재현했으니 그대의 신변이 곱절은 안전해졌구려.”

결사들이 감탄하고 경악하는 가운데 하야테는 안도했다.

귀족적인 얼굴에 보태진 은은한 미소가 예장처럼 어울렸다.

용살자 하야테.

인간 중 유일한 절대자인 그의 삶은 송두리째 드래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드래곤의 의지로 인해 죽지 못하게 되었고,언젠간 반드시 드래곤에게 죽게 될 운명이었다.

드래곤을 몰살시킬 수 없으니 필연이다.

그의 죽음은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형태일 터였다.

오직 본인만 아는 진실이었다.

“다행이오. 정말로 다행이야.”

하야테는 늘 그리드가 마음에 걸렸다.

인신의 운명 또한 자신과 닮았기에.

언젠간 천상의 신들에게 소거될 그를 가없게 여겼다. 고강함을 알고도 그랬다.

꾸준히 증식하는 천사들과 신들을 상대로 단순히 무위가 뛰어나봤자 무의미했으니까.

거기에 자칫 드래곤에게까지 원한을 산다면,그리드는 철저히 고립되는 셈이었다.

홀로 소멸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게 될 터였다.

하야테가 그리드를 위해 애써온 이유다.

드래곤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향하려고 할 때마다 하야테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모든 관심을 그리드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무지막지한 공포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연민에 가까웠다.

하야테가 그리드에게 호의를 품게 된 계기는 존경심과 기대감 때문이었지만,구태여 희생까지 감수하게 된 계기엔 동정심과 동질감이 작용했다.

한데 이젠 사정이 바뀌었다.

그리드는 드래곤과 교감하는 것을 넘어서 드래곤의 힘 일부를 쟁취했다.

고룡쯤 되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그를 적대할 드래곤은 없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드가 드래곤을 쉽게 여겨도 된단 뜻은 아니지만,적어도 걱정거리 하나는 덜어낸 셈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던 운명에 작은 희망이 움텄다고 봐야 옳았다.

어디까지나 하야테 입장의 해석이긴 했다.

하야테는 그리드가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억겁의 세월 동안 드래곤의 위압감에 짓눌려온 자신은 겁쟁이가 된지 오래였으니까.

“하야테님.”

상념에 잠겼던 하야테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표정엔 아무런 변학가 없었다.

그리드의 바뀐 운명을 보고 안도했던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야테는 내내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리드를 마주하는 시선은 정직한 호감만을 품고 있었다.

그의 손을 그리드가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머지않은 훗날에 당신을 위한 용갑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꼭 받아주십시오.”

검성 비반은 모든 도검류 무기를 제약 없이 다룬다. 아니,도리어 더 강력하게 다뤘다.

드래곤 웨폰마저도. 그가 휘두르는 구젤의 검은 멀쩡한 상위룡의 비늘마저 갈랐다.

하물며 하야테는 드래곤 슬레이어다.

드래곤의 육체로 만든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강력하게 다룰 수 있었다.

당장 그리드가 만든 건틀릿과 각반의 사용 조건에 명시 된 ‘드래곤 슬레이어’가 간접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그리드는 앞으로 꾸준히 제논의 비늘을 확보할 입장이었다.

가장 강력한 우군인 하야테를 드래곤 아머 세트로 무장시키고 싶다는 바람을 품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논이 한 달에 한 번씩 비늘을 상납하겠다고 했으니까...’

제논은 앞으로 20년 동안 꾸준히 비늘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하야테와 메르세데스가 쓸 드래곤 아머 세트를 만들고 다른 동료들이 사용 가능한 양산형 드래곤 아머를 개발하기까지 자원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니... 어찌면 매달 1개씩의 비늘만 바칠 수도 있잖아?’

시스템이 또 그놈의 밸런스를 핑계로 무슨 수작을 부릴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매달 1개씩의 비늘만 얻어도 계획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시간이 지체된다는 점은 마음에 안 들었다.

‘...뭐 괜찮다. 정 급하면 뗑겨달라고 하면 되지.’

제논의 성격상 싫다고 거절할 것 같진 않다.

“...?”

생각하던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하야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맑은 푸른 눈동자가 덩달아 흔들렸다. 그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고맙소.”

하야테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여덟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이름 모를 탑에서 비롯합니다.]

“그대가 내게 용기를 주는구려.”

[병든 용을 참수하고 그 피를 뒤집어 쓴 인간이 있었다.]

[고독하고 가여운 자였다.]

[인류 역사상 유일의 절대자가 된 인간은,이미 혼자였다.]

[그에게 쥐어진 영원한 삶은 잔악한 저주에 불과했다.]

“그대의 호의를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 보이겠소.”

[절대자는 책임을 떠맡았다. 아무도 모르는 탑을 쌓고 쓸쓸히 인류를 수호했다.

셀 수조차 없는 긴 세월 동안 이름조차 모르는 타인들을 위해 살았다. 내색하지

못한 채 두려움을 쌓았다. 두려움의 높이는 탑의 높이를 금세 추월했다. 그는 절망에

짓눌려갔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잊은 채 용들의 포효를 감당했다.

분노,증오,살의,어둠,어둠,어둠. 그의 시야와 마음은 점차로 캄캄해졌다.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해갔다.]

“하야테님…?”

하야테는 숭고한 자였다.

세상을,인류를 위해 싸우는 그의 등은 늘 꼿꼿했다.

같은 결사들조차 그가 고통을 몰랐다. 어럼풋이뿐이었으며,그 고통의 양어깨를 짓누를 정도일 거라곤 상상 못했다.

무려 천 년을 함께해온 프론잘츠 형제조차도 하야테가 간신히 버터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없었다.

본래 영원히 묻힐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리드가 비밀을 밝혀내고 말았다.

그리드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하야테에게 수치심을 준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하지만 하야테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인류가 세운 새로운 신이,템빨신 그리드가 어두운 나락으로 손을 뻗었다.]

[수천수만 자루의 칼을 만들어온 손은 단단하고 굳세었다. 절대자를 짓누르고 있던 두려움의

무게를 쉽사리 감당할 정도여서,절대자를 단번에 붙잡고 나락에서 끄집어냈다.]

“그대가 있어 더 이상 두렵지 않구려.”

하야테의 미소는 도리어 더욱 밝아졌다. 견며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순수한 미소였다.

본래 저렇게 웃는 사람이었나.

진정한 미소를 되찾은 하야테를 바라보는 결사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비반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절대자는 깨달았다.]

[나 또한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다.]

[등불에 의지할 수만 있다면 의지하고 싶었던.]

[등불이 되어준 신의 손을 맞잡은 그가 고했다.]

“앞으론 용살을 망설이지 않겠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기대하며 나의 책무를 다하겠소. 내가 거머쥔 힘이 저주가 아닌 축복임을 상기하겠소.”

...

..

[템빨신 그리드가 서사시의 열여덟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용살자(龍殺者). 드래곤 슬레이어 ‘하야테’가 세상에 출현합니다.]

[대륙 각지에 묻혀있던 드래곤의 비학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가 월드 메시지였고,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더욱 상승합니다.]

여기부터가 그리드의 눈에만 보이는 알림창의 내용이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모든 결사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하야테와 유대 관계를 맺습니다.]

[용살자 하야테의 검기에 그간 억제해온 살의가 덧씌워집니다.]

[인류 유일의 절대자가 온전한 실력을 되찾았습니다.]

[앞으로 지혜의 탑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의 평학에 간섭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부당한 죽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히든 피스,‘선구자의 숨겨진 역할’을 완료하였습니다.]

[히든 피스 보상으로 '열 번째 결사’의 지위를 얻습니다.]

[결사 지위 획득으로 선구자 자격이 무의미해집니다. 선구자 자격을 다음 적합자에게 이양합니다.]

[플레이어 ‘크라우젤’이 새로운 선구자로 등극합니다.]

"..."

그리드는 단지 아이템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진짜 단 몇 마디 한 게 전부였다.

근데 이거 뭐냐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그리드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마음의 짐을 덜은 하야테와 그를 보고 기뻐하는 결사들을 바라보자니 한없이 뿌듯했다.

가슴이 희열로 가득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기 위해 싸워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드래곤 슬레이어는 본디부터 존재했다?>

<용살자 하야테가 세간의 화제... 절대자란 무엇인가>

<탑의 정체는?>

<전국 각지에서 드래곤과 관련된 유물과 문헌이 출토 중. 고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몹시 많아... 그리드가 찾아낸 거인족의 도시를 시작으로 ‘고대 에피소드’가

개막되는 것인지 귀추가 주목>

속보가 쏟아졌다.

하나만 해도 몇 날 며칠 헤드라인에 걸릴 소식이 범람하는 수준이었다.

사람들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제 좀 적응했다 싶으면 또 다시 개벽하는 세상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항시 개벽의 중심에 있는 그리드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었다.

-사실 그리드는 게임의 신이 아닐까?

ㄴ리얼 갓리드ㅋㅋ

ㄴ극검 선견지명 미쳤네요...

ㄴ극검 은퇴하고 무당해야 할듯ㄷㄷ

얼떨결에 극검의 주가가 올랐다.

순전히 갓리드라는 별명을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반쯤 장난이나 다름없는 사회현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진지했다.

대한애국협회 본부로 복권번호를 문의하는 연락이 쇄도할 지경이어서,극검은 당분간 고객센터운영을 중단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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