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14화
닮은 것은 많아도 같은 것은 드문 법이다.
눈의 결정조차도 각기 다른 모양을 지녔듯,그리드가 기억하는 드래곤의 비늘 역시 모양이 천차만별이었다.
당장 손에 현 제논의 비늘만 해도 그랬다.
<드래곤의 비늘〉
등급: 신화
회색룡 제논의 비늘입니다.
제논 스스로 템빨신 그리드에게 진상한 것으로,훼손 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드래곤의 비늘 중 유일하게 완전한 것입니다.
제련 최소 조건:전설 등급의 제작 스킬 보유
제련 적합 조건:전설 등급의 제작 스킬 마스터
레이단을 떠나기 전.
그리드는 제논에게 총 3개의 비늘을 받았다.
하나하나가 그리드의 몸통보다 더 컸는데 형태가 미세하게 달랐다.
그리드의 통찰력으로도 자세히 관찰해야 눈치 챌 수 있었다.
각진 방향이 고작 1도 정도 차이난다거나,꽃잎을 닮은 뿌리 부분의 결이 다르다거나,혹은 분간하기 힘든 수준의 색감 차이가 있다거나 등등.
드래곤의 무장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선 단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못할 차이점이었다.
드래곤의 무장.
즉,그들이 몸에 두른 비늘의 형태를 그리드는 온전히 재현하고 싶었다.
특히 이프리트나 크란벨의 무장을.
두 드래곤의 비늘이 각자 어떤 형태를 지녔고,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기능했는지 분명하게 떠올릴 의무가 있었다.
“...”
물론 기억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리드는 두 드래곤의 모습을 녹화한 동영상을 수십,수백 번도 더 반복해서 재생했다.
제논의 비늘을 제련해서 수백 개의 작은 비늘로 다시 만들 때.
그 비늘 하나하나의 형태를 어떻게 만들어야 옳을지 면밀히 관찰하고 연구하고,기록했다.
‘조립한다는 감각으로 접근해야돼.’
스케일 아머의 제작엔 본래 손이 많이 간다.
철판 등을 잘라 비늘처럼 가죽천에 일일이 꿰매어 만드는 거니까.
하지만 그리드가 만들 드래곤 아머 세트는 그 이상의 정성과 노력을 요구했다.
그리드는 가죽 따위를 덧델 생각이 없었다.
다른 짐승이나 몬스터의 가죽은 드래곤 비늘의 격을 훼손시키는 원인이 될 우려가 있어서다.
가죽이 필요 없기도 했다. 비늘 자체가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구조를 지녔다.
오직 비늘과 비늘의 결착을 통한 방어구 제작.
여태껏 시도해본 적 없던 그 고난도의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그리드는 오롯이 집중했다.
이프리트와 크란밸의 모습을 참고하여 천천히 공백의 설계도를 채워나갔다.
설계도에 기록하는 수백 개의 비늘을 실제로 구현할 때 필요할 도구와 환경을 궁리하기도 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아직 비늘은 제련조차 못 했건만 보름이 훌쩍 지나있었다.
* * *
슥슥. 삭삭.
또 한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른 직후.
고요해진 전장에 필기 소리가 울렸다.
템빨단원들이 내는 소리였다.
지옥 원정대원들이 그들을 다소 황당하게 지켜봤다.
큰 전투를 치른 뒤마다 필기를 하는 그들의 습관은 아무리 봐도 의아했다.
‘도대체 뭐하는 거지?’
홈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그러지 못했다. 실례인 걸 알았다. 당장 전투를 복기하기 바쁜 면도 있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더 높은 경지를 꿈꾸는 랭커들에게 있어서 복기는 가장 중요한 절차였다.
더 깊은 지옥에 진입할수록 새롭게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정보를 정리하고 그들과 싸웠을 때의 자신을 점검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게끔 공부했다.
템빨단원들의 필기도 같은 맥락이었다.
굳이 필기까지 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기록해야 할 정보가 많아서 였다.
그들의 기록은 그리드에게 의뢰할 신상 아이템의 기능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
그들의 기록은 훗날 그리드에게 전달 될 정보의 요람이었다.
자신의 결점을 돌이켜보는 복기임과 동시에 아이템 제작 의뢰서인 것이다.
템빨단원들과 그리드 양쪽에 이롭다.
그리드는 동료들 덕분에 무궁무진한 정보를 새로이 얻었고,그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진 아이템 덕분에 템빨단원들은 한층 더 발전할 터였다.
* * *
-이번 주 코디야.
로그아웃한 뒤.
드레스룸에 들어온 신영우가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입을 운동복과 외출복이 옷장 한 편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늘 그렇듯 동생 세희가 준비해준 것이다.
‘내가 그렇게 옷을 못 입나?’
세희가 남겨놓은 메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신영우는 진지한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희가 오버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가 옷을 못 입진 않았다.
세희에게 벌써 몇 년째 도움을 받으며 수차례 화보까지 촬영해놓고 여전히 패션 감각이 없다면 그건 바보밖에 안 됐다.
다만 브랜드를 구분하지 않는 점이 문제였다.
무턱대고 값싼 브랜드를 선호하는 탓에 연령대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코디를 종종 할 때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신영우는 집보다 차를 먼저 산 케이스다.
현명한 소비 따위 몰랐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사치를 하면 했지 검소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건 타고난 본능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고,사고 싶은 물건을 못 샀던.
그런 힘든 시절을 보내봤기에 한을 품었었을 뿐이다.
이제 영우는 한을 풀었다.
먹고 싶은 것을 모조리 먹고 사고 싶은 것을 모조리 샀다.
으리으리한 집도 지었다. 계좌에 돈이 쌓여만 갔다.
더 이상 사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종의 회귀 본능일까.
한을 푼 반동으로 영우는 다시 검소해졌다.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땐 절대로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옷이나 차 같은 소모품엔 딱히 집착하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동생이 사주는 옷을 굳이 거부하진 않았지만.
“굿모닝!”
“좋은 아침.”
산책로 입구.
거의 동시에 도착한 영우와 지슈카가 서로에게 밝게 인사했다.
최근 두 사람은 아침마다 함께 운동하고 있었다.
영우가 부탁해서다.
어떤 이유로든 영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지슈카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지만,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았다.
지슈카는 홀로 운동하는 영우를 몰래 쫓아다니면서 숨어 지켜보는걸 종종 낙으로 삼았을 뿐이다. 영우에게 함께 운동하자고 제안해서 개인 시간을 침해한 적은 없었다.
“어젠 어땠어?”
“일주일 만에 아모락트의 의태가 찾아왔어.”
“또? 설마 이번에도 진원진기를 쓴 건 아니지?”
“아냐. 그 뒤론 번츠델이나 테루찬도 꼭 함께 행동하고 있으니까.”
“이종족 왕들의 선에서 정리가 가능한가?”
“응,아모락트의 의태는 바알의 분신하고 확실히 다른 것 같아. 제약 없이 활용할 수 있는 대신 상대적으로 약해.”
“제약 없이라...”
영우와 지슈카의 운동능력은 남달랐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가볍게 달리는 속도가 일반인의 전속력을 웃돌았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영우가 지슈카에게 함께 운동하자고 제안한 이유는 단순히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매일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소통은 중요했다.
“자리가 꽉 찼네.”
지월구.
신영우의 영향으로 인구가 몰려 새로 만들어진 서울의 26번째 하위 행정구역이다.
영우가 사는 동네는 지월구에서도 ‘템빨동’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이 붙여졌는데,지월구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다.
이른 아침부터 산책로가 조금 붐빌 정도였고 여러 운동기구가 놓여있는 트레이닝 공간은 벌써 사람으로 가득 차있었다.
“어머,두 분? 이거 쓰세요. 전 괜찮아요."
영우 커플을 발견한 아주머니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를 양보했다.
몹시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숫제 젊은 부부를 대하는 태도였다.
“에이~ 운동 마무리하세요. 마음만 받을게요.”
지슈카는 통역기 없이도 사람들과 완벽하게 소통했다. 사용하는 추임새부터가 한국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다니까.’
아주머니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하는 지슈카를 영우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지슈카의 밝고 친화적인 성격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았다.
단지 보기만 해도 비타민을 비롯한 각종 영양제를 통째로 섭취하는 느낌이어서,오래 볼수록 점차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것만 같았다.
“그리드?”
“응?”
“잠,자 잠깐 몸 좀 빌려도 돼?”
활짝 웃고 있던 영우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긴장하는 지슈카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야 당연히 되지...?”
얼떨결에 대답한 영우는,이내 허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대답을 듣고 기뻐하는 지슈카가 예뻐서였다.
눈 끝을 살짝 내리고 활짝 웃는 모습이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저 표정 그대로 누워서 배를 내밀면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 사람들은 지슈카에게 멋지다거나 섹시하다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쓰지만,영우가 봤을 땐 귀여운 매력도 컸다. 오직 영우만 알수 있는 매력이었다.
“그,그럼 잠깐만 빌릴게...?”
“...”
영우가 헛숨을 들이켰다.
신발을 벗은 지슈카가 다리를 쭉뻗어 영우의 어깨 위에 발꿈치를 얹은 까닭이다.
엄청 유연하다.
다리는 또 대체 얼마나 긴 건지…
영우가 애매한 부분에 감탄하는 사이 지슈카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영우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서로의 터질 듯한 심장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
“스트레칭은... 거르면 안 되니까…”
“그,그치...”
영우는 자신을 나무라고 생각했다. 지슈카의 운동을 돕는 나무.
코어에 힘을 꽉 주고 버렸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도… 내 몸 쓸래…?”
“...”
귀가,마음이 간지럽다.
영우는 요즘 매일 아침이 행복했다.
* * *
까앙,까앙,까앙...
망치가 금속을 때리는 소리가 탑에 메아리쳤다.
맑고 규칙적이라 듣기 좋았다.
결사들은 평범한 인간 시절을 회상했다.
자택 처마 끝에 달아두었던 풍경소리 따위가 떠올라서다.
“이제 좀 사람 사는 곳 같구만.”
결사들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상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지낸다.
기본적으로 구도자에 가까운 성향들을 지닌 탓에 자신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고작 9명이 지내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탑은 늘 적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머물기 시작한 뒤로 달라졌다.
은근히 비반의 청소를 돕는 템빨골들과 결사들을 보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랜디,그리고 방정맞은 구석이 있는 파일볼프와 노에.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탑이 북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그리드의 작업 소리가 생기를 더했다.
결사 전원 이 분위기를 반겼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이 커졌던 것이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세월을 견뎌온 그들은,공교롭게도 자기 자신의 행복은 돌보지 못해왔다.
“...!”
상념에 잠겼던 결사들이 일제히 두 눈을 부릅떴다.
드래곤 레이더가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드래곤의 출현 위치는 지혜의 탑 내부였다.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경악한 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한 자리에 모였다.
레이더가 망가진 것이 분명하다.
절대로 이럴 리가 없다...
결사들이 뇌까리는 와중에 레이더가 드래곤의 위치를 차츰 정확히 분석했다.
그리드가 머무는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