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13화
그리드는 마장기의 성능을 실감하지 못한다.
직관성이 없어서다.
마장기의 세부 능력치는 오직 탑승자에게만 제공됐다.
당연한 구조였다.
애초에 마장기의 세부 능력치를 결정 짓는 요인이 탑승자니까.
지발이 특별한 이유이며,그리드가 <아이템 변신>으로 구현하는 레이더스와 지발이 직접 조종하는 레이더스의 성능이 확연히 차이나는 원인이기도 했다.
제작자는 본인이 만든 마장기의 무장,출력,내구력,크기와 구조 등의 이해를 통해 잠재력을 가능하는 게 고작일 뿐,
그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활용하는 건 순전히 탑승자의 몫이라는 의미다.
로봇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면 쉽다.
만화에서도 로봇을 만드는 사람과 조종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마장기에 한해서 그리드의 포지션은 박사다. 닥터 그리드.
‘아이템 변신으로 재현하는 레이더스는 약해.’
갓 핸드가 변신하는 레이더스는 지발의 레이더스와 동일한 모델이다.
그리드가 낱낱이 분석하고 강화시킨 레이더스 말이다.
하지만 갓 핸드의 AI로는 레이더스의 기능을 100퍼센트 활용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고도 그리드가 종종 갓 핸드를 레이더스로 변신시키는 이유는 특정 상황에서 유용하기 때문이며,무엇보다 미련이 남아서였다.
그리드는 잊지 못한다.
마왕 토벌전 당시 브라함의 영혼이 조정하고 조종했던 레이더스의 위력을.
인마대전에서 미쳐 날뛰었던-아주짧게- 지발의 활약을.
마장기의 위력을 정확하게 체감하지 못하면서도 집착해온 이유다.
‘차라리 내가 직접 마장기를 조종하면 속이 편했을 텐데’
그리드는 라이더 자격이 없다.
마장기를 손으로 붙잡아 휘두르거나 집어던질 순 있어도 탑승하진 못한다.
‘...설령 조종했어도 의미가 없었겠지만.’
그리드에겐 라드볼프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다.
레이더스를 개조해서 그리드도 조종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굳이 부탁하지 않았다.
레이더스에 탑승하는 건 스스로의 힘을 봉인하는 셈이니까.
레이더스의 최대 출력보다 그리드가 훨씬 더 강했다.
게다가 마장기에 탑승하면 기존의 스킬은 대부분 비활성화 된다. 대신 마장기 고유의 스킬이 활성화되는데 그리드 입장에선 당연히 손해다.
실제로 탑의 결사들 또한 마장기를 보조 병기로 활용할 뿐이었다.
라드볼프가 만든 마장기들은 월야철을 장갑으로 삼음에도 그랬다.
결국 결론은 하나뿐이다.
마장기의 자체적인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갓 핸드가 마장기의 기능을 ‘일부’만 활용할지더라도 터무니없이 강력하게끔.
一이와 같은 생각을 품어오던 차에.
"..."
저 적색의 마장기와 조우한 것이다.
트라우카.
고대의 거인족이 신살을 목적으로 만든 비밀병기.
스팩 자체가 다른 마장기들보다 우월했다.
힘과 속도 면에서 그리드에게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꽈아아아앙!!
바다가 갈라지고 닫히길 반복했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바닷물과 연쇄되는 소용돌이 탓에 대양의 수심이 문득문득 알아졌다.
그리드와 트라우카는 쉬지 않고 충돌했다.
바다 속에서,하늘 위에서.
수평선을 넘나들며,때때로 발을 붙이는 무인도를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가면서.
꽈아아아아앙!!
격렬한 전투가 해저학산을 자극하기도 했다.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 불길이 비처럼 쏟아지는 바닷물에 젖어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냈다.
매캐한 학산재와 뒤섞여 그리드의 시야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조심하시게…!
스스로의 몸을 개조해서 통신 시스템을 구축한 걸까.
파일볼프의 다급한 음성이 그리드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플레이어들은 귓속말이라고 부르고 초월자들은 전음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이었다.
‘의외로 착하단 말이지.’
그리드가 미소 지었다.
파일볼프의 거체가 수인족 전사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
인공 감각이 전달해준 정보였다.
우측으로 접근해오는 트라우카의 위치와 함께.
열 감지 시스템이라도 있나.
그리드는 인공 감각과 초월자의 감각을 동시 운용한다.
눈을 감고도 주변의 흐름을 명정하게 파악했다.
해저화산의 분화를 기회로 여겼을 정도였다.
트라우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자욱하게 번진 화산재가 놈의 시야를 집어삼킨 틈에 손쉽게 제압할 생각이었는데,놈 또한 그리드의 위치를 즉시 파악했다. 차단 된 시야가 무색했다.
쩌어어어엉...!
살(殺)의 찌르기가 트라우카의 주먹과 정면충돌했다.
쩌저적,갈라져 나가던 트라우카의 주먹에서 미사일이 쏘아졌다.
그리드의 몸이 반동에 의해 튕겨나갔다.
키이잉!
트라우카의 마력 엔진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리드는 곧바로 이어질 추격을 경계했다. 백호 자세를 취했다.
놈을 끌어들인 뒤 천지 뒤집기에 융합 검무를 연계할 요량이었다.
한데 트라우카는 의외로 추격해오지 않았다.
[대상의 시야 확보가 불가능한 것을 재차 확인.]
트라우카는 그리드의 시각이 차단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산의 분화와 해일 등의 소음으로 인해 청각과 후각에도 장애가 생겼음을 추측했다.
한데 왜 기습을 읽힌 걸까.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는 놈의 푸른 안광이 백열했다.
"..."
트라우카는 몇 가지 검증을 거쳤다.
미사일을 쏘고,마법을 펼치고,직접 창과 검을 휘두르면서.
여러 감각을 잃은 그리드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공간을 지각하고 공격을 읽는 건지,다양한 행동 패턴을 토대로 파악했다.
[미세 입자를 이루는 화학물질 반응을 확인. 대상의 고유 권능으로 추정.]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은사 가루와 마력을 섞어 만든 인공 감각.
지금도 그리드의 주위에 펼쳐져있는 그것은,여태껏 그 어떤 초월자에게도 발각당하지 않았었다.
아니,정확히 말해서 관심을 끌지 못했었다.
본래 대기엔 마나가 흐르게 마련이고 그것들의 형태는 비교적 다양했으니까.
초월자들은 그리드의 인공감각을 단순히 세계에 존재하는 마나.
즉,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먼지나 기름 따위를 가득 머금은 도시의 마나,혈향을 가득 머금은 전장의 마나쯤과 동일시했다.
대기 중에 산재하는 마나를 고스란히 느끼는 경지이기에 더욱 그랬다.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의심했을 상황을 도리어 초월자이기에 순순히 받아들인 셈이었다.
하지만 트라우카는 달랐다.
마나에 섞인 불순물(은사)이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물질이란 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경계했다.
인공 감각을 의도적으로 피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공기가 흐르듯 실시간으로 변모하는 인공감각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대응했다.
그리드는 트라우카가 강한 이유를 정확하게 눈치 했다.
‘단순히 스팩이 높은 것도 있지만 인공지능의 역할이 커.’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트라우카의 인공지능이 트라우카의 기능을 거의 온전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어찌면 거인족 역시 탑승자의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기동하는 마장기를 궁극의 마장기라고 해석했던 게 아닐까 싶다.
‘파일볼프 혼자서도 저런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나?’
그리드의 욕심이 더욱 커졌다.
고성능의 인공지능이 탑재 된 마장기 군단.
그들을 거느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덥썩!
그리드의 손이 트라우카의 머리에 솟아있는 툴을 붙잡았다.
인공 감각을 돌파하고 접근해온 놈의 위치를 즉각 통찰하고 대응했다. 살기를 느껴서다. 순전히 초월자의 감각에 의지했다.
너무 인공 감각에만 집착하는 놈을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트라우카가 발버둥 쳤지만 늦었다.
천지 뒤집기에 걸려 일시적으로 비행능력을 상실하고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놈의 가슴을 그리드의 6융합 검무가 난도질했다.
[위험. 무신 치우의 강림을 확인. 대적 불가. 탈출을 시도…]
[오류. 오류. 대상 식별 불가.]
[심각한 시스템 훼손 추정. 안전장치 해제. 자폭 시퀀스 가동.]
트라우카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흉부를 개방하더니 그대로 막대한 폭발에너지를 방출했다.
누가 보면 드래곤 브레스로 의심할 만한 기운이었다.
만약 그리드의 반응이 0.1 초만 늦었다면.
신묘한 보자기를 펼치지 못하고 폭발에 휩쓸렸을 것이다.
[초고밀도의 초강중력에 의해 자폭 시권스 정지. 대상의 2차 권능으로 확인.]
“권능 아닌데.”
6융합 검무의 끝자락에서.
“템빨이 다.”
그리드가 설명해주었다.
인공 감각도,신묘한 보자기도.
자신이 무수히 보유한 템빨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대상의 발언이 혼란을 유발. 대상의 음성을 차단합니다.]
콰아아아아앙!!
급기야 바다에 침몰한 트라우카의 두 눈이 빛을 잃어갔다.
그리드는 놈을 파괴하지 않았다.
급히 검을 뽑고 용작살과 갓 핸드로 포박한 뒤 파일볼프,수인족과 협력해서 인양 작업을 개시했다.
본래 목적이었던 월야철이 덤으로 느껴졌다.
* * *
트라우카와 월야철을 확보한 직후.
“어서 모든 흔적을 지운 뒤 떠나야 하네.”
파일볼프가 재촉했다. 목소리가 심각했다.
“천상의 신들이 신살의 의도를 느꼈을 게야.”
마장기 트라우카는 탄생 배경 자체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절대자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역천의 상징이자 의지였다.
그 의지가 실현 될 확률은 없다는 사실을 지금 막 그리드가 증명했지만... 의지를 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신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 서두르죠.”
그리드도 납득했다.
우선 수인족 전사들을 돌려보낸 뒤 템빨골과 노에,랜디,직계들까지 불러서 전투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
기계의 한계.
자체적인 수복 기능이 없어 여전히 녕마인 트라우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볼 따름이었다.
잠시 후.
정리를 마친 그리드가 즉시 자리를 떠났다.
***
“이건...?”
지혜의 탑.
그리드의 예고 없는 방문에 결사들이 당황했다.
거대한 적색의 마장기를 시야에 담은 채다.
“당분간 이걸 숨겨놓을 장소가 필요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뭔가를 숨겨놓을 때 지혜의 탑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다.
신도,드래곤도 탑의 위치를 식별하지 못하니까.
유일한 위협은 적야의 대도뿐인데,그가 트라우카에게 관심을 가질 것 같진 않았다.
신의 원을 수복한 프론잘츠가 침입을 쉽게 허락할 리도 없었고.
“잘 왔네. 정말 잘 왔어.”
트라우카의 정체를 알아본 라드볼프가 쌍수 들고 환영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리드는 라드볼프가 파일볼프와 함께 트라우카의 인공지능을 대량 생산할 방법을 모색해주길 바랐다.
“음... 성공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꼭 도전해보고 싶군. 설령 실패하더라도 원망은 말게.”
“제가 어찌 원망할까요.”
그리드는 당분간 머물 방을 하나 빌렸다.
숙제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아이템 제작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생각하니까 웃기네.’
본래는 월야철을 확보하는 동안 아이템을 만들고 라인하르트로 귀환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트라우카가 나타난 바람에 모든 계획이 어긋났다.
삶을 돌이켜보면 계획대로 일이 진행 된 경우가 적은 듯하다.
그런데도 용케 랭킹 1위를 찍고 황제이자 신이 됐으니 인생이란 참 모를 일이다.
‘애초에 계획이라는 건 필요 없는게 아닐까?’
방학 때마다 생활계획표를 만드는 초등학생들의 동심을 깨는 생각을 품으며.
그리드는 공백의 설계도를 꺼냈다.
아이템 창조 스킬을 활성화시킨 상태로 여태껏 만났던 드래곤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들의 비늘 구조를 떠올렸다.
어떤 식으로 촘총히 엮였고,어떤 형태로 충격을 흡수했던가.
특히 이프리트와 크란벨의 비늘을 참고했다.
세계에서 가장 고결하고 위대했던 그들의 신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재현하고,무장하기 위함이었다.
현장의 결사들은 물론이고 천상의 신들조차 상상 못할 일이었다.
개벽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