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09화 (1,497/1,794)

75권 11화

재상 라우엘은 황제를 보필하는 최고위 정치담당자이다.

내정,외교,인사를 총괄하며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그에 비례하는 책임을 질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라우엘의 업무량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태 구분 없이 상상을 초월했다.

과로로 쓰러지기 일쑤였고 심각한 탈모를 겪었을 정도였다.

보람은 있었다.

그리드가 전장을 누비며 레벨을 올리고 전투 관련 스랫이 초상승의 영역에 진입했듯,계략이 난무하는 정치판을 지켜온 라우엘의 정치력과 통찰력 또한 초상승의 영역에 진입했다.

바둑돌을 움직이는 감각으로 정치판을 조율하는 경지로,제국의 많은 면을 항시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손쉽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른 의미의 초월자인 것이다.

템빨국이 제국이 되기까지.

라우엘은 쉴 틈 없이 닥쳐오는 내정적 시련을 극복했다.

그가 없었다면 제국도 없었다.

쌓아올린 경험이 태산보다 높았으니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난 건 권리이자 필연이었다.

“이곳과 이곳,그리고 여기.”

템빨제국의 지도.

동대륙 지도와 별반 차이가 없는 그 거대한 지도에서,라우엘은 정확히 3개의 도시를 지목했다.

사신(死神)의 손짓이었다.

“이번 주 내로 감찰관을 보내세요.”

“세레프는 카이작 후작령의 주도이지 않습니까. 탄원이 빗발칠 터인데...”

“감찰 결과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제가 예측하기에 누구도 감히 그를 비호하지 못할 겁니다.”

<대제국 재상의 통찰>

대상 NPC의 레벨,스랫,스킬,특성, 잠재력,성향,별자리,운세를 파악합니다.

스킬 마나 소모:5,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시간

템빨제국 건국과 동시에 업그레이드 된 라우엘 전용의 스킬이다.

등급은 초월 레전드리.

대상 인물의 능력뿐만 아닌 본질을 꿰뚫어봤다.

무척 유용했다.

라우엘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가 친히 인선을 짜면 어떤 난제도 수월하게 해결하는 드림팀이 구성됐다.

드림팀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시기,드림팀에 속한 인재들의 전성기가 끝나는 시기,

인재가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끝내 비리를 저지르게 될 시기 등을 예측할 수도 있었다.

그 탓에 제국 각지에서 심심찮게 인사이동이 벌어졌는데,일각에선 토사구팽이란 비난이 들끓을 정도였다.

그리고 라우엘은 비난이 익숙했다. 눈 하나 깜빡 않고 직권을 휘둘렀다.

상대가 사하란 출신의 황족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라우엘은 대상의 혈통이나 인맥이 좋을수록 도리어 더 철저하게 감독했다.

한 눈 팔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늦게 대응했다간 숙정을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라우엘은 되도록 피를 보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나름의 자비였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평화를 위한.

“재,재상 각하!”

“ 무슨 일이죠.”

“그,그것이... 동부로 파견했던 감찰단이 츄할츠 방면에서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

물론 라우엘은 신이 아니다.

제국의 많은 면을 볼 순 있지만 모든 면을 볼 순 없었다.

실력과 권한을 총동원해도 그랬다.

애초에 세상엔 개새끼가 너무 많았다.

놈들이 작정하고 저지르는 비리와 죄악을 일일이 통제한다는 건 설령 신이라도 불가능할 터였다.

‘우려했던 대로다. 지옥 원정을 기회로 여기는 놈들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100만 명의 인간 중 군자는 한 명이나 될까.

99.99퍼센트의 인간은 살면서 몇 번쯤 양심을 버리게 마련이다.

라우엘이 인간을 불신해서 품는 편견이 아니라,과장 없는 현실이었다.

가까운 이웃을 보라.

아니,지금 당장 스스로를 돌아보라.

‘앞으로를 생각하면 감찰단의 규모를 키워야할 텐데.’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인재를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당장 어딘가에서 비리를 저지르고 있을 영주들 역시 처음엔 순수했다.

신이자 황제인 그리드를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충성했던 인물들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노라 맹세했던 자들이다.

다만 유혹에 노출되어 타협을 반복한 끝에 변질됐을 뿐.

‘마땅한 사람이 없을까.’

라우엘이 신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옥 원정에 참가한 지금.

안심하고 휘두를 칼이 적어진 라우엘의 근심이 깊어졌다.

템빨국의 규모가 워낙 거대해진 탓에 겪는 시련이었다.

제국 건국 후 고작 몇 달도 안돼서 겪는 시련이라기엔 너무 뼈아팠지만,라우엘이 자초한 사태다.

라우엘이 임명한 영주 중 태반이 인격보단 능력을 인정받은 케이스였다.

처음부터 쓰다 버릴 패로 선택 된 자들이었다.

당장의 시련만 넘기면 된다.

능력 있는 자들이 발전시킨 영지를 맡아 관리할 후임들은 능력보다 인격을 우선시해서 선별할 예정이니.

그들 또한 언젠간 초심을 잃겠지만 약발이 길게 갈 것이다.

“...가만.”

깊은 생각에 잠겼던 라우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륙이 템빨제국의 색으로 물든이후 백수가 됐을 어떤 인물을 떠올린 것이다.

사신 나이트.

뒤탈 없는 일처리로 유명한 히든클래스 암살자였다.

* * *

[학센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

쯔단,파일볼프,그리고 학센.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을 레이드하고 얻은 전리품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리드는 그들을 단순히 물건 취급하지 않았다. 인격체로 존중했다.

그래서 미안했다.

셋 중 유일하게 학센만 여전히 그리드 곁을 멤돌고 있었으니까.

과거의 은원을 해결(?)하고 후계자를 찾은 쯔단,열망해온 육신(?)을 되찾은 파일볼프와 달리 학센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한낱 영혼으로 배회했다.

지옥에 붙잡혀 있을 때와 비교해서 상황이 나아지질 않은 셈이다.

“그... 파일볼프와 당신을 차별하는 게 아닙니다. 당장 월야철이 필요할 뿐이죠.”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그리드가 학센에게 설명했다.

진심을 담아서다.

그리드는 월야철을 이용해서 또 다른 파멸의 형상을 만들 계획이었다.

형태는 철퇴.

낙월검과 쿨타임을 공유할 확률이 높았지만 낙월검과 다른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이미 개변시킨 몰니르가 있지만 한참 부족했다.

격이 높은 대상에겐 묠니르의 경직 효과가 무의미했으니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대상의 격을 무시하는 월야철과 비교할 수준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리드가 둔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갓 핸드의 한계에 있었다.

갓 핸드 역시 묠니르와 마찬가지로 고등한 존재에겐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탐욕 자체의 본질적인 한계였다.

속도의 한계.

이번에 크란벨과 싸웠을 때.

그리드가 기회를 엿볼 때마다 떨어뜨린 메테오 즉,탐욕 덩어리는 크란벨에게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다.

설령 닿았더라도 절대방어를 꿰뚫었을지 의문인데,애초에 크란멜이 너무 쉽게 피해버렸다.

순전히 속력의 차이였다.

둔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갓 핸드에게 휘두르게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적이 강할수록 도드라지는 약점이었다.

‘애초에 갓 핸드는 인공 감각으로 활용하는 게 월씬 좋은 상황이다.

굳이 둔기가 필요할 정도로 강력한 상대와 싸울 땐,검무의 이점을 버리더라도 둔기를 내가 직접 휘두르는 수밖에 없어.’

고민이 많다.

그간 모아둔 탐욕덩어리로 갓 핸드를 200개쯤 만들고 인공 감각의 영역을 더 확장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즐겁군.’

아무리 강해져도 또 새로운 강적을 만나 이런 고민을 반복해야 한다니.

정말이지 질릴 틈이 없다.

Satisfy는 갓겜이 맞다.

아마도…

[〈구젤의 도>의 2번 옵션 슬롯이 스킬 위력 3퍼센트 상승으로 갱신됩니다.]

'망겜.'

그리드는 단 1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이동하는 내내 기도 스랫을 소모하여 슬롯을 돌리는 한편 드래곤아머 세트를 구상했다.

드래곤 아머 세트를 만들 땐 아이템 창조 스킬을 쓸 예정이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여태껏 없던 신상으로 도배할 계획이다.

솔직히 말해서 방어력보단 공격력을 키우는 게 더 시급하다고 느꼈지만...

방어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는 영감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크란벨의 팔을 써서 만들 무기의 제작 순위는 중요한 만큼 도리어 뒤로 미뤘다.

‘새로운 템빨을 무장해도 바알을 잡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긴 하다.’

전력을 쏟아 부어도 크란벨의 생명력 게이지에 흠집하나 내지 못했는데 바알은 대체 무슨 수로 레이드하지?

아직 진실을 모르는 그리드의 근심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이쯤일세.”

파일볼프가 지상에 착지했다.

바다 위의 작은 섬이었다.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여기가 확실해.”

“...바다에 묻힌 거군요.”

“거인족의 도시 중 하나였으니말일세.”

벨리토리누자.

파일볼프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 땅에 마지막 월야철이 묻혔음을 파일볼프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 년 전에 가라앉은 도시인지라 쉽게 발견하긴 힘들걸세.

게다가 얼마 전에 이프리트 탓에 지각이 뒤틀렸으니 도시의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어.”

“저도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네. 해골들만 빌려주시게. 우리가 탐사할 동안 자네는 지금처럼 도박과 신작 연구에 몰두하도록 하고.”

“도박하는 게 아니라 아이템을 강화하는 거라니까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리드가 공백의 설계도를 꺼냈다. 슬슬 본격적인 작업에 임할 계획이었다.

‘사방신의 숨결로 방어구를 만들 무렵만 해도 이제 방어구는 졸업이라고 믿었었는데.’

설마 드래곤 아머 세트를 만드는 날이 찾아올 줄이야.

드래곤을 별세계의 존재로 인식했던 과거를 떠올린 그리드가 감회에 젖었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파일볼프는 심호흡하고 있었다.

금속이라 당연히 딱딱하게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어주었다.

대양에 가라앉은 천 년 천의 도시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되는 것이었다.

기필코 찾아낼 각오이긴 했다.

그리드 덕분에 되찾은 육신이지 않나.

이를 잘 활용해서 그리드에게 도움을 주고 은혜를 갚고 싶었다.

‘이 몸은 완벽하다. 숨 쉬지 않아도 되고,깊은 바다의 수압까지 견딜 수 있어.’

도시를 찾아낼 때까진 결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으리라…

경건한 각오와 함께.

첨벙!

파일볼프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템빨골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깊이,깊이 잠수해갔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푸! 어푸푸!!”

파일볼프가 발광을 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크고 무거운 몸으로 어찌나 요란을 떨어대는지,그가 발버둥칠 때마다 해일이 밀려와 그리드를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만들었다.

“...뭡니까?”

만약 도시를 발견한 거면 템빨골이 먼저 전음을 보냈을 것이다.

크라겐 따위가 나타났다고 해도 파일볼프 선에서 손쉽게 처리 가능했다.

대체 왜 소란을 피우는 건지.

"...?"

파일볼프의 근성을 의심하는 그리드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가 이내 부릅떠졌다.

“그리드님!”

“템빨신니임!!”

들썩이는 파도 사이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인족들의 목소리였다.

세이렌에 있어야할 그들이 어째서 이 먼 곳에?

다소 놀라는 그리드에게 곧 모습을 드러낸 수인족들이 설명했다.

“물고기들의 입을 통해서 페하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실 것 같아 헤엄쳐 왔어요.”

“...고맙다.”

세상엔 변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사람이 타락하는 건 아니다.

특히 그리드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묵묵히 믿어주는 그리드의 신뢰에 신뢰로 보답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쉽게 의심하고 미리 칼을 가는 라우엘이 잘못 됐다고 비난할 순 없다.

그리드와 라우엘은 다를 뿐,틀리지 않다.

두 사람이 워낙 다른 탓에 제국은 오히려 올바른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이날.

[템빨신 ‘그리드’가 잊힌 고대의 도시를 발견하였습니다.]

벨리토리자가 천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일볼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빠른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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