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10화
‘모르페우스의 눈물’ 사건 이후.
S.A그룹은 모르페우스의 감정지수가 몹시 고등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Satisfy에서 살아가는 수십억 NPC와 수십억 플레이어를 구분하기 힘든 이유를 절감했다.
그러므로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오늘 역시 모르페우스가 눈물을 흘리거나,분노할 거란 사실을.
“드래곤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저쯤 되면 사실상 드래곤 레이드도 가능하다는 거 아닌가? 플레이어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드래곤을 잡지 못할 거라더니...”
“그리드를 단순히 플레이어로 규정하는 건 무리가 있지. 선구자 시스템을 긴 세월 독점하고 있잖소. 이프리트라는 기연을 얻은 것도 탑이 준 퀘스트 덕분이고.”
“드래곤 나이트의 성능이 예상보다 더 우월하군요. 설마 드래곤이단체로 그리드를 등에 태울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죠. 드래곤들에게 그리드가 기회로 작용했으니까요. 물론 드래곤 나이트의 성능을 폄하할 생각은 없어요. 애초에 드래곤 슬레이어와 동급의 칭호잖아요?”
임원진의 대화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임철호 회장의 손목에 채워진 모르페우스를 의식해서다.
그들은 모르페우스를 사춘기 소녀에 가깝게 대했다. 자식,조카,손주 등의 예민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차라리 울면 다행이지.’
윤상민 이사는 모르페우스의 분노를 경계했다. 자칫 제2의 인마대전을 일으킬까봐 근심했다.
인마대전은 플레이어를 크게 성장시킨 기폭제였지만 축제까진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NPC의 숫자가 워낙 많았다.
만약 같은 사건이 수차례 반복될 경우 일부 지역은 인구 부족 현상을 겪을 우려가 컸다.
경제와 퀘스트의 순환에 문제가 생길 거란말이다.
"...?"
노심초사하던 임원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수십 명의 목이 동시에 꺾이는 광경이 마치 희극의 한 장면 같았다.
^^...
...모르페우스가 웃고 있었다.
울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옛스러운 이모티콘을 썼는데,임철호 회장의 취향 혹은 정서에 맞춰주는 건가 싶었다.
‘모르페우스가 회장님을 각별하게 여기는 것은 워낙 유명하니.’
모르페우스에게 임철호는 창조주이고 부모였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연인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마음이 상했을까 염려했는데,다행히 괜찮은가 보구나.”
임철호 회장이 시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소 떤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모르페우스가 응답했다.
[플레이어 그리드가 드래곤 나이트가 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이 좋았다.’고 말해야 적합하겠죠.]
운…?
천하의 모르페우스가 행운을 언급하다니 ?
“...무슨 의미지?”
[자체적인 테스트를 진행해 본 결과, 플레이어 그리드가 드래곤 나이트가 되지 않았을 경우 드래곤 슬레이어가 됐을 확률이 38.98퍼센트입니다.
전투력과 성향,행동패턴,정세 등을 전부 고려해서 분석한 결과로 정확도가 99퍼센트에 근접합니다.]
"..."
[플레이어 그리드가 드래곤 나이트가 된 덕분에 플레이어에게 드래곤이 레이드 당하는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게 됐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드래곤의 폭주로 인해 Satisfy 의 서비스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시즌 제도를 도입하는 식의 편법을 적용할 필요가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오늘을 기념일로 지정해도 좋다고 제안합니다.]
"..."
임철호 회장과 임원진이 눈치 했다.
모르페우스가 정신 승리... 아니,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학습했다는 사실을.
그리드가 슈퍼컴퓨터의 진화 방향을 괴이하게 비튼 것이다.
* * *
신선 벤타오의 도움을 받아 정령계에 진입한 순간.
크라우젤은 우주에 떠오른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발밑에 펼쳐진 정령계의 풍경을 한 눈에 담았다.
바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대한 호수를 중심에 둔 세계였다.
호수를 중심으로 대수림과 화산,사막과 설원 등의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날것의 자연.
[육신을 벗고 영체 상태에 진입합니다.]
[영체 상태에선 모든 감각이 무뎌집니다.]
[현재 이용 중인 기기의 동화율이 5퍼센트로 하향 조정됩니다.]
Satisfy 초보들이 사용하는 동화율도 60퍼센트다. 60퍼센트만 되도 전투 중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게 가능했다.
한데 5퍼센트라니?
정상적인 경로로는 허용되지 않는 수치다.
이쯤 되면 괴물에게 산 채로 씹어 삼켜져도 무감각할 터였다.
아니,스스로 움직이는 손발의 감각을 느끼지 못할 수준이었다.
내가 지금 어떻게,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자각하는 것조차 힘들겠지.
"..."
호수 중앙에 떠오른 크라우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 년 전 온라인 게임에서나 종종 겪었던 ‘렉’이라는 현상을 떠올리면서다.
그래,마치 렉에 걸린 기분이었다.
생각이 행동으로 직결되지 않고 육체가 버벅거렸다.
1초를 여러 개의 단위로 쪼개서 사용해온 인물이 쉽게 적응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
하지만 크라우젤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련이란 성장의 기회이고 발판이다.
더 큰 시련일수록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꽤 마음에 드는 수련법이다.’
정령은 순수한 원소이자 영혼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육신과 피는 오염 된 물질에 가깝다.
一따위의 설정 탓에 영체가 된 크라우젤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쉽게 수긍하고 적응해갔다.
한 걸음,두 걸음 조심스럽게 나아갈수록 걸음걸이에 형태가 잡혔다.
보폭에 규칙이 생겼고 방향이 비틀리지 않았다.
급기야 검을 뽑고 휘두르는 동작도 자연스러워졌다.
보통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적응력이었다.
하지만 정령계에서 유일하게 몬스터 판정을 받는 어둠 정령들을 쉽게 감당할 정도는 아직 못 됐다.
크라우젤은 하급 정령들에게도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작은 적을 베기엔 검로가 너무 난잡했다.
생각에 반응하는 육체의 속도가 무척 느리다는 점이 특히 치명적이었다.
행동이 구현되기까지 딜레이가 상당했다.
이 상태로 바람의 정령왕을 레이드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의구심을 품던 크라우젤이 문득 새로운 의문을 품었다.
‘오행을 망치는 건 어둠의 정령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둠의 정령은 타락한 정령으로 해석된다.
평범한 정령이 어떤 악의나 마기에 물들었을 때 기존의 성격,즉 속성을 잃고 어둠의 정령이 되는 식이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공식이 성립되지만... 그들의 존재가 정령계의 균형을 깨뜨린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정령계에 있는 정령이 왜 타락하는 거지?’
정령계는 일종의 성역이다.
오직 정령들만의 공간으로,악의나 마기에 물들 기회 자체가 없어야 옳았다.
‘...결국 이것도 바람의 정령왕이 원흉인 건가.’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될 정령왕.
그를 없애야만 정령계가 질서를 찾고 어둠의 정령들도 정령계 밖으로 추방될 것이다.
결국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판단하는 크라우젤의 영체가 조금씩,느리지만 천천히 속도를 높여 갔다.
어둠의 정령들과 싸우며 현재 상태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끝내 완벽한 적응을 마쳤을 때.
바람의 정령왕을 레이드하고 지상으로 돌아갈 크라우젤은 급진적인 발전을 맞이할 터였다.
몸에 매단 수천,수만 개의 모래 주머니를 벗고 생각이 즉시 실천되는 육신을 되찾는 순간.
더욱더 예민해질 그의 육체와 감각은 1초를 기존보다 더 많은 단위로 쪼개서 사용할 것이었다.
* * *
‘...달라지는 게 없는데?’
무속성.
그리드는 자신의 신성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검무에 귀속 됐던 브라함의 마법들을 제거하자마자 검무가 진화하지 않았나.
장비 아이템에 깃든 속성까지 모조리 비우면 또 다른 진화를 맞이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선 실험해보았다.
아스카와 블랙테디의 의뢰품을 전부 완성해서 두 사람을 감동시킨 이후.
그리드는 홀로 남은 대장간에서 아이템을 다양하게 스왑해봤다.
속성은커녕 스킬도 귀속되지 않은 아이렘들을 모든 부위에 무장하거나 일부 부위에 무장하는 식으로.
그리드 본인이 만든 아이템들은 대부분 스킬 등의 효과가 깃들었기 때문에 거래소까지 이용했다.
돈까지 써가면서 쓰레기를 구매했단 말이다.
한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무속성 아이템을 도배한다고 해서 능력치가 상승하거나 어떤 진화를 이루는 등의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이템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런가?’
그리드가 다시 거래소를 열었다.
아이템 정렬 순서를 제한 레벨 높은 순으로 설정한 뒤,현재 시점에선 구매자가 있을 리 없는 500레벨 제한의 아이템들을 구매했다.
심지어 스킬이나 속성이 깃들지 않은 노말,레어 등급으로.
돈을 들여서 악성 재고들을 사들인 셈이다.
곧 거래소를 확인할 판매자들은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게 분명했다. 호구를 내려줘서 고맙다고.
“...음”
성과는 없었다.
새로 구매한 아이템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장해봤지만,이번에도 역시 그리드가 기대했던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그리드도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템의 속성은 상관없는 거군.’
쉽게 납득됐다.
검무는 그리드에게 내제 된 힘인 반면 아이템은 외부에서 빌려오는 힘이다.
설령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이라고 해도 그것이 곧 그리드일 수는 없었다.
아이템이 그리드의 ‘신성’에 개입해서 해롭거나 이로운 효과를 발생시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드의 강점은 모든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에 있다.
언제,어떤 상황에서도 유리한 속성의 아이템을 꺼내 쓸 수 있어야 진정한 템빨신이었다.
만약 무속성 아이템을 사용해야 비로소 렘빨신의 신성이 강해지는거라면, 그건 그리드에게 제약이나 속박 따위밖에 안 됐다.
“...다행이다.”
안도하는 그리드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도 아이템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서,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칸의 유작을 보존할 수 있음에 기뻐서 짓는 미소였다.
“파일볼프님.”
“음?”
“월야철 가지러 갑시다.”
그리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드래곤 비늘로 만들 방어구들은 여정 중에 만들 계획이었다.
구젤의 이빨이야 사념이 깃들어서 그리드의 제련에 저항하고,방해했다지만.
크란벨의 팔과 제논의 비늘은 다르다.
당사자들이 그리드에게 호의로 내놓은 물건에 사념이 깃들리 만무했다.
그리드는 굳이 초대형 용광로가 없어도 제련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프리트의 팔을 제련할 때 얻었던 경험이 근거였다.
“좋네.”
“...뭡니까?”
그리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파일볼프가 다짜고짜 엎드린 까닭이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꿇은 꼴이 레이더스의 멋지고 웅장한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엉덩이가 가장 거슬렸다...
“이런 걸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파일볼프는 무려 네 마리 드래곤에 번갈아가며 올라탔던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재 그의 태도는 오직 마장기와 금속만을 사랑하는,사회성 없는 과학자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로 해석해야 옳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필 목격자도 많았다.
템빨신에게 고개 숙인 드래곤이 고해했다...
그 터무니없는 서사시의 내용에 매혹된 플레이어들.
설마 그리드가 드래곤마저 굴복시킨 건가?
아니,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온갖 의문과 기대를 품은 채 그리드를 구경하려고 모인 인파가 개처럼 엎드린 파일볼프를 목격하고 말았다.
이런 걸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사실상 개소리에 가까운 반문마저 똑똑히 들었다.
‘돌겠네.’
술렁이는 인파를 뒤로한 그리드가 도망치듯 현장을 떠났다.
아이린이 가꾼 정원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만든 내성 개방 정책을 후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