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8화
“...꿀꺽.”
라인하르트로 돌아온 그리드가 무지막지한 압박감을 느껴서다.
손발이 떨려올 지경이라서, 크란벨과의 격전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의 눈앞엔 메르세데스가 서있었다.
맑은 피부와 푸른 눈동자에 사늘한 표정이 맞물리자 자연히 얼음이 연상됐다.
새파란 바다 한가운데 고고히 떠오른 빙산.
동대륙에 가면 빙결여제쯤으로 불리지 않을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다행히 목소리는 상냥했다. 눈이 웃지 않아서 문제지.
메르세데스는 명백히 토라져 있었다.
당연하다.
드래곤의 레이단 침공 소식을 접했을 당시.
그리드는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쫓아오지 말라고. 만약 쫓아온다면 평생토록 원망할 거라고.
평생과 원망이라는 단어를 함께 입에 담은 것이다.
반칙이었다.
메르세데스는 덜컥 겁이 났다.
함부로 그리드를 쫓지 못했다.
그가 죽지 않는단 사실을 되새기며,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의 속도를 따라잡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했다.
워프 게이트가 가동하지 않던 상황이다.
바르바토스의 시야를 활용한 순보를 연속해서 쓰는 그리드를 따라잡기엔 은익의 성능이 부족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메르세데스는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했다.
1분 1초가 영원 같았다.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난 시간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주인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기사라니.
메르세데스는 엄청난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심정이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었다.
흔들리는 그녀를 지탱해준 사람이 바로 아이린이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이런 기분을 느껴왔을 그녀는,자신이야말로 가장 슬프고 두려울 텐데도 메르세데스의 떨리는 두 손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메르세데스는 황비의 품격을 느꼈다. 자신을 자매처럼 보살펴주는 그녀를 더욱 더 존경하게 됐다.
하여.
“ 폐하!”
아이린의 권리를 감히 빼앗으려 들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안기는 그녀의 모습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마음 졸이게 해서 미안하오.”
그리드는 아이린에게 유독 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평범한(?) 귀족가의 딸로 태어나 황제의,그리고 신의 반려가 된 그녀가 느낄 심리적 부담감이 몹시 클 것으로 보았다.
더군다나 그리드는 상시 전장에 나간다.
아이린은 매번 최악을 상정하고 대비해야하는 입장인 것인데,아직 신격을 쌓지 못했던 시절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샜던 이유가 쉬이 납득이 갈 정도였다.
항상 미안했다.
“어찌 사과하시나요. 자식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돌아온 어버이를 누가 비난할까요.”
바사라가 말했었다. 황제는 백성의 어버이여야 한다고.
아무래도 아이린은 바사라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리드도 마찬가지다.
그리드는 이 자리에 없는 바사라가 떠올랐다.
‘자주 찾아가도록 노력해야지.’
혼인식 이후.
타이탄의 왕으로 책봉 된 바사라는 타이탄에 빠르게 복귀했다.
인마대전을 겪고 무너진 도시를 복구하기 위해선 1분 1초가 중요하다는 이유였는데,그리드가 봤을땐 그녀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정략혼.
그리드는 바사라에게 연심을 품지 않고도 혼인을 올렸다.
바사라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그리드 곁에 있으면 그리드가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쯤 되자 그리드가 미안해졌다.
이유야 어찌됐던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았나.
그리드는 바사라에게 정을 줄 의무가 있었다. 노력해야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마리로즈는 예외다.
마리로즈는... 싫다.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다. 마냥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지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아이린과 메르세데스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운 것이,묘한 착각들을 한 듯했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오늘 밤에 힘들 거라고.
“험험,메르세데스.”
헛기침한 그리드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연금술사들이 목숨 걸고 지킨 보물을 메르세데스에게 건네주었다.
아무리 봐도 코팅지에 가까운 물건.
정녕 이게 보물인지 의문이긴하다.
“네가 의뢰한 물건이라며. 드래곤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드는 와중에도 연금술사들이 그것만은 기필코 지켜냈다더라."
"웃...!"
"...?"
그리드가 당황했다.
놀란 고양이처럼 동공을 확장시킨 메르세데스가 손발을 허우적거린 까닭이다.
기사왕.
세상 모든 기사들의 선망을 받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급기야 얼굴까지 붉힌 그녀가 칼을 뽑아 쥐었다.
유리보다 투명한 백호검에 날카로운 검기가 아른거렸다.
“사,사특한 물건이에요...! 베어없애겠습니다!!”
“아니 뭔 짓... 진정해! 진정하라고!”
제법 큰 소란이 벌어졌다.
그리드는 연금술사들의 피와 땀이 담긴 물건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고,그에게 감히 검을 휘두를 수 없던 메르세데스는 좌충우돌 난리였다.
* * *
“ 감사했다.”
“과연 그리드야. 은원이 확실하네.”
라인하르트,템빨성.
이젠 거의 성역으로 취급 받는 황제의 궁전에서, 그리드와 아스카는 밝은 미소를 교환했다.
[플레이어 ‘아스카’가 템빨단 1군에 가입하였습니다.]
[플레이어 ‘블랙테디’가 템빨단 1군에 가입하였습니다.]
아스카는 꿈을 이뤘다.
그리드에게 아이렘 제작을 의뢰할 권리를 얻었다.
수 년 동안 열망해온 순간이었다.
그리드에게도 흡족한 거래였다.
아스카와 블랙테디의 실력은 예전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하이랭커만 받는 까닭에 여전히 만석을 채우지 못한 템빨단 1군에 가입시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놀과 뱀파이어들을 구출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쉽게 납득했다.
아스카의 가장 큰 변수는 ‘재력’에 있었으니,돈으로 어떤 기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리드는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놀을 지켜준 것도,우리와 함께 하길 선택해준 것도.
“여태껏 가입 신청을 우리한테 원한이 깊은 건가 싶었었는데,다행히 그건 아니었구나.”
"그... 이제는 너도 알겠지만,펜릴의 도시를 지키던 너희 병사들을 내가 해쳤었잖아. 그게 너무 미안하고 무서워서...”
“슬프지만... 이후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앞으론 네 병사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될게.”
“이제부턴 네 동료들이겠지.”
“ 맞네. ”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라는 생각은 너무 낡고 편협하다.
강하고 사악한 적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선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필요가 있었다.
제논과 그랬듯이.
그리드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이후.
“어때?”
“멋진데?”
아스카는 그리드에게 곧바로 제작 의뢰를 맡겼다.
그리드가 먼저 제안했다. 마침 당분간 대장간에 머무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흘륭한 발상이야.”
아스카는 웨폰 마스터 중에서도 특별한 케이스에 속했다.
모든 종류의 무기를 다룰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무기들을 수급할 능력까지 겸비했으니까.
오죽하면 시장에 풀린 그리드제 무기는 전부 아스카 소유라는 이야기가 있을까.
그녀의 무기 지식은 굉장히 해박했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이 수 년 동안 열망해온 무기의 형태를 그리드에게 설명하는데,그리드에게 영감을 줄 정도로 신선한 접근법을 지닌 물건이 더러있었다.
‘철퇴... 나도 써볼까.’
크란벨과 싸우면서 새삼 실감한 사실이 있다.
베기와 찌르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회복력이 특출한 대상들과 싸울 땐 부수고,뭉개는 힘이 더 큰 효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상처의 형태가 복잡할수록 재생에 더 큰 시간이 걸리니까. 내상을 유발하기도 쉽고.’
예를 들어 드래곤의 가슴을 비늘 째 뭉개버리면.
비늘의 파편이 드래곤의 살과 장기까지 파고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물리적인 상태이상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사실 기본 상식에 가깝다.
서브 무기로 둔기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예전부터 많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딱히 둔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왔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검무의 성질 때문이었다.
템빨신의 검무의 액티브 스킬과 패시브 스킬은 도검류 무기를 착용해야만 활성화된다.
그리드의 압도적인 공격력은 도검류 무기를 착용해야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다.
특수한 상황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활 등의 원거리 무기라면 또 모를까,검과 도 외의 근접무기를 사용하는 건 낭비라는 인식이 강했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을 바꿀 차례였다.
‘예를 들어 월야철로 만드는 무기의 데미지 값은 어차피 고정이잖아. 월야철로 만든 둔기를 휘두를 땐 검무의 효과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지.’
그리드는 검무의 강력한 성능이 오히려 자신의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고 잠재력을 억제해왔음을 깨달았다.
아스카가 구해온 새로운 무기의 도안들과,도안을 건넬 때마다 첨언하는 아스카의 발상이 깨우쳐준 사실이다.
“그럼 잘 부탁해.”
“그래,완성되면 연락하마.”
“후흣,새로운 무기 들고 지옥원정대에 합류할 생각하니까 두근두근 하네.”
이후 나흘 동안.
그리드는 아스카가 맡긴 의뢰에 집중했다.
아스카와 블랙테디의 전신을 새로운 아이템으로 도배시켜줄 작정으로 애썼다.
두 사람의 전력이 당장 시급히 필요해서,두 사람에게 어서 은혜를 갚고 싶어서 등의 이유로 초조하게 행동하는 게 아니다.
그리드는 당장 급할 게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팬히 서둘렀다가 졸작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에겐 쏟아지는 영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크란벨의 팔과 제논의 비늘을 제련하기에 앞서서 사고를 최대한 유연하게 풀어놓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극한까지 오른 집중력이 그리드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를 직시시켰다.
화신의 폭풍.
주작의 심장으로 구현되는 심상.
그것은 불이다.
지금의 템빨신에겐 적합하지 않은 속성이었다.
어쩌면 화신의 폭풍 또한 나를 억제하는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사방신의 숨결을 재료로 쓴 방어구들도 마찬가지야.’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하야테에게 선물로 얻었던 드래곤 비늘과 앞으로 레이단에서 꾸준히 생산 될 제논의 비늘을 이용해 방어구부터 싹 다 새롭게 바꾸는 게 급선무다.
심상을 변형시킬 방법은 브라함과 주작에게 조언을 구하도록 하고.
‘서리여왕의 심장이 있긴 하지만…’
서리여왕의 심장은 녹지 않는 얼음이다.
하지만 서리여왕의 위계가 주작과 같을 거라고 보긴 힘들었다.
주작은 신이니까.
서리여왕의 심장이 주작의 화기를 상쇄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주작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그리고 파일볼프의 퀘스트를 수행해서 월야철도 구하고.
크란벨의 팔은... 그 모든 일들을 끝낸 뒤에 제련하는 게 맞겠다.’
사실 그리드는 공격력에 가장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 나이트를 비롯해 모든 버프 효과를 두르고 전개한 6융합 검무.
한 순간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을 초월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크란벨의 생명력 게이지에 흠집조차 못 냈으니까.
크란벨보다 강력할 것으로 추정되는 바알을 족치기 위해선 더 강한 파괴력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무기 제작을 가장 뒤로 미뤘다.
심상과 방어구를 바꾸고 생길 변화에 발맞춰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리드의 표정이 문득 굳었다.
칸의 선물.
칸이 최후의 생명을 불태워 만든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에 깃든 독이 떠올라서였다.
그렇다.
발할라의 속성 또한 무(無)가 아니었다.
어찌면 이번에야말로 발할라와 작별해야 할 수도 있었다.
“싫은데...”
꽈악.
그리드가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칸의 마음씨처럼 따뜻한 발할라의 온기를 피부로 느끼며,이를 악 물었다.
‘꼭… 반드시 구하러 갈게요,칸.’
간신히 눈물을 삼키는 그리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 * *
“바로 여기가 악명 높은 윤회의 강이군.”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절규하고 있다.
이제는 저주에 불과한 생전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강에 붙잡힌 영혼들이었다.
“이곳은... 가장 하류에 불과해요. 이 강은 끝없이 펼쳐져있고,위로 거슬러갈수록 더 많은 영혼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죠.”
설명하는 유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같았다.
한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저곳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분노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냥 이대로 개의 아가리까지 쳐들어가서 엘리고스를 레이드하면 안 되나?”
지옥 원정대의 기세는 굉장히 높았다.
플레이어들은 인마대전에서 크게 성장한 반면 지옥은 수많은 병력과 대악마를 잃었으니까.
게다가 원정대 전원은 헬가오 레이드를 수차례 진행했다. 헬가오의 인정(?)을 받고 지옥 페널티를 극복했단 말이다.
온갖 불길한 색깔을 켜켜이 겹쳐놓은 듯한 하늘과 우그러진 별들,그리고 수천 개의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달과 대기에 자욱한 독무는 원정대에게 아무런 위협을 주지 못했다.
종횡무진 지옥을 누비며 활약해 온 그들은 흑기사 엘리고스도 두렵지 않았다.
한 자릿수 대악마를 초월하는 강자라는 정보는 이미 접했지만 그게 뭐 대순가?
원정대는 데빌슬레이어 유라와 궁성 지슈카,그리고 페이커와 카츠의 엄청난 활약들을 목격했다.
그들을 보좌하는 레가스,폰 등의 템빨단원들도 하나 같이 강력했고 자신들 역시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템빨단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유라가 엘리고스의 저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20번 지옥의 난이도는 전보다 훨씬 높아졌을 공산이 커요. 이미 한 번 적침을 겪은 엘리고스가 아무런 방비도 해두지 않았을리 없으니까요.”
윤회의 강을 관리하는 개의 아가리는 지옥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다.
엘리고스가 그곳의 책임자로 선택 된 배경엔 확실한 근거가 있을 터였다.
레라지에의 명성을 좌시하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났던 태도를 고려해보면 신중한 전략가에 가까운 기질을 지닌 듯한데... 침입자들을 대폭 약학시키고 자신을 강학시키는 모종의 결계를 몇 겹으로 준비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이야. 나는 여전히 네가 탐나는구나.
“...”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유라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똑똑히 기억한다.
먼 옛날 큰 분기점이 됐었던 존재.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의 목소리를 잊을 리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