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7화
[네놈들...! 숨어 사는 쥐새끼들 주제에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훼방을 놓는구나...!!]
상위룡 쿠바트로스의 안광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연상시켰다,
따위의 표현보단 피눈물을 흘리는 듯하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쿠바트로스는 살심보다 원한을 품었다.
함부로 분노하여 살심을 품기엔 결사들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정확히는 하야테를 자극하는 게 꺼려졌다.
드래곤 슬레이어.
이미 한 번 용살을 이룬 그는,모순되게도 살기를 배제하고 있었다.
의념(意念)이 곧 힘으로 직결되는 경지임에도 그랬다.
쿠바트로스를 해치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으니.
[길을 비키란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쿠바트로스는 자신의 운이 몹시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마침 잠에서 깨어있었고,그의 레어는 대륙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다섯 마리 드래곤의 소란을 감지하고 포식의 기회로 여겼다.
수백 개로 분절 된 목단룡의 의지가 왜곡을 일으켜 현장에 도착하는 시간이 지체됐지만,쿠바트로스의 위계는 목단룡과 같다. 목단룡이 설치한 미로를 돌파할 저력이 있었다.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급기야 목단룡의 의지가 사그라지고 곳곳에 펼쳐졌던 왜곡이 지워진 순간,쿠바트로스는 현장의 좌표를 특정해내는데 성공했다.
텔레포트로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 희열의 순간에 결사들이 나타나 훼방을 놓은 것이다.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비늘을 무색하게 만드는 검성 비반과 무투가 켄이 꽤 거슬렸고,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거인족의 보물을 복원한 프론잘츠는 과거의 거인족이 왜 멸망해야만 했는지,그 이유를 여실히 상기시켰다.
하야테는... 군계일학이었다.
놈이 뒤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쿠바트로스는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다.
“우리 또한 비켜드리고 싶소.”
하야테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피어에 짓눌려 울부짖듯 일렁이는 대기에 금발을 흩날리면서.
또렷하게 드러난 그의 얼굴엔 수심이 짙었다.
“우리라고 해서 감히 드래곤의 앞길을 가로막고 싶겠소. 다만 우리는,그대가 지금보다 월씬 더 막강해졌을 때의 사태들을 염려하여 물러나지 못할 뿐이오.”
[...가증스러운 놈.]
쿠바트로스는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만약 자신의 위계가 조금만 더 낮았어도 하야테의 겸양을 몰라보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일으켰을 테니까.
필시 생사결을 각오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하야테의 푸른 눈동자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피의 여왕이 눈을 뜬 듯한데. 이쯤하면 그대도 포기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칫…]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태산 같은 몸으로 달을 가린 거룡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짝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결사들의 얼굴에 한 순간 안도의 빛이 스쳤다.
[네놈들은... 언젠가 반드시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것은,반드시 실현 될 저주였다.
쿠바트로스의 용언이 결사들의 운명을 휘감았다.
하야테가 그린 검광에 지워지기 전까진.
“결단에 감사드리오.”
[하야테...! 네놈은 가장 잔혹하게 죽게 되리라.]
하야테를 죽일 듯 노려박준 쿠바트로스가 결국 자리를 떠났다.
결사들은 안도하고 환호하는 반면 하야테는 조용했다. 등 뒤로 감춘 그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절대자.
하야테는 영원불멸하는 존재다.
스스로의 의지론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는 언젠가 반드시 고룡들에 의해서 이뤄질 것이며,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형태일 것이었다...
“쿠바트로스가 이리 쉽게 물러나줄 줄이야.”
“결국 하야테님의 말씀대로 됐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탑으로 돌아온 결사들의 말문이 제대로 트였다.
무려 다섯 마리의 드래곤이 충돌을 일으킨 대사건.
언제 또 새로운 드래곤이 나타날지 몰라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 무사히 끝난 것이다.
하야테가 말했던 기회.
바로 드래곤 나이트 그리드의 활약 덕분이었다.
설마 네 마리 드래곤과 힘을 합쳐 상위룡을 물러나게 만들고 사건을 무마할 줄이야... 기대 이상의 활약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리드만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박야 옳았다.
“그리드는 인류의 큰 복이지.”
비반이 말했다.
구젤의 검을 쓰다듬으면서다.
하야테의 용살검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보검.
하야테의 진짜 검술과 비교해서 손색이 크다곤 하나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쌍검과 결합시켰을 때 위력은 드래곤의 비늘을 쉽게 가를 정도였다.
비반은 그리드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만약 자신에게 자식이 있었다면,자식에게 이런 감정을 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드가 최고야.”
베티 또한 동의했다. 그녀는 자신의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착각마저 느꼈다.
“만약 그리드가 없었다면... 오늘엄청난 괴물이 탄생했을 수도 있겠지."
프론잘츠 형제를 비롯한 모든 결사가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지혜의 탑의 결사들.
오랜 세월 세계의 평학를 위해 싸워온 영웅들이 그리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마침 세계에 템빨신의 새로운 서사시가 각인되고 있었다.
드래곤이 신에게 직접 고해를 바치는 내용으로,여태껏 그 어떤 신학에도 없던 내용이었다.
하야테가 전율했다.
***
"오오...!"
레이단의 백성들이 경악을 금치못했다.
잿더미가 됐던 도시가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탓이다.
제논은 하위종이 세운 문명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했다.
마법과 용언으로 법칙을 세워 자신이 파괴했던 모든 것들을 어렵지 않게 복구시켰다.
단,드래곤이라고 해도 죽은 사람들을 되살리진 못했다.
하물며 현재 지옥은 변질 된 상태였다.
윤회의 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으므로 환생을 유도하기도 힘들다.
[나로 인해 죽은 2,788인의 목숨은... 나의 비늘로 갚겠소. 그뿐만 아니라 유족들을 최대한 보살피도록 노력하리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템빨제국의 도시 ‘레이단’에 새로운 특산물 <드래곤의 비늘〉이 추가됩니다. 앞으로 20년 동안 유지됩니다.]
[템빨제국의 도시 ‘레이단’에 신규 효과 <드래곤의 속죄〉가 추가됩니다. 특정 조건에서 여러 이로운 효과가 발생합니다.]
"..."
그리드의 마음은 무척 무거운 상태였다.
서사시를 쓰고 격의 상승을 누리게 됐음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는 죽은 백성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을 원망했고,그들을 해친 원흉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그리드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백성들의 원한을 갚겠다고 제논을 해쳤다간 도리어 더 많은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는 셈이니까.
게다가 제논은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리드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거기에 더해서 이젠 레이단을 완벽하게 복구하고 축복마저 내려준 상황이었다.
‘...이래서야 무작정 미워하기가 힘들잖아.’
그리드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더욱 짙어진 것을 엿본 걸까.
“드래곤은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라고 배워왔습니다.”
유족들이 도리어 그리드를 위로했다.
“죽은 저희의 가족들은... 재해를 겪은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유족들 또한 제논의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을 마냥 원망하고 복수를 꿈꾸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폐하,부디 저희의 가족을...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을 그들을 구원해주시옵소서.”
환생.
윤회의 강에 갇힌 사람들을 구할 유일한 방법.
끝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는 유족들에게,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반드시.”
이번 전투는 그리드에게 많은 공부가 됐다.
드래곤의 강함을 확실하게 실감했고,고통과 견준다는 바알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일지 깨달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크란벨의 팔과 제논의 비늘,그리고 격의 상승.
그리드는 많은 전리품을 챙겼다.
앞으로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 마리로즈.”
자신에게 얼마나 든든한 아군이 있는지 새삼 확인했다.
“지옥 원정에 동참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야. 하지만 당장은 어렵단다.”
지옥 원정이야말로 마리로즈의 탄생 이유다.
그녀에겐 바알과 그에게 협조했던 악마들을 죽이고 지옥을 본래 상태로 되돌려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리드가 부탁하지 않아도 언젠가 스스로 지옥을 찾아갈 거란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나태의 저주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마리로즈는 크란벨과 견주며 파악했다. 힘이 부족했다.
애초에 시기가 너무 일렀다.
그녀가 베리아체로부터 힘과 격을 계승한 시기는 고작 수백 년 전.
잠재력을 충분히 개학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드가 가속시킨 세계의 흐름은 그녀에게도 너무 빨랐다.
“사람들을 좀 만나야겠어.”
“사람...?”
“세상엔 숨어 지내는 겁쟁이들이 제법 많잖니. 썩어 사라질 힘들은 내가 거두는 편이 낫지.”
사뿐히 그리드 앞으로 다가온 마리로즈가 발꿈치를 살짝 세웠다.
그녀의 고운 이마와 눈썹이 그리드의 시야 중심을 채웠을 때,그리드의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변해있었다.
길고 축축한 무언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촉감을 느낀 여파다.
“...”
부드러운 손길로 그리드의 뒷머리를 제압하듯 붙잡은 마리로즈는 평생 이날만을 기다려온 짐승 같았다.
그리드의 입속을 철저하게 범했다. 긴 혀로 그리드의 타액을 모조리 끌어 모아 빨아들이는데,그리드를 말려 죽일 기세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쉬지 않고 교차하는 쾌락과 수치심 속에서 잠시 넋을 잃었던 그리드가 가쁜 숨을 토했다.
떨어져나간 마리로즈의 도톰한 입술이 전보다 훨씬 붉게 물든 모습을 보면서다.
그리드는 뒤늦게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입술이 살짝 뜯겨나갔다. 저 뾰족하고 흰 치아에.
“낭군은 내 생각보다 더 맛있구나.”
"..."
“이걸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겠어. 다음에 또 맛보게 해주렴.”
쏴아아.
검은 재가 되어 흩어진 마리로즈가 현장을 떠났고,
‘미친... 미친...’
숨죽인 제논과 백성들 사이에 선 그리드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는 마리로즈가 한층 더 두려워졌다. 언젠가 반드시 그녀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서였다.
잘근잘근 씹혀서,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