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04화 (1,492/1,794)

75권 6화

베리아체의 부고는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었다. 충격을 받는 이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태초의 3악.

비록 저주의 낙인에 시달리는 신세로 전락했다지만, 베리아체는 무려 야탄의 딸이었다.

고통들과 태초신들 바로 다음가는 위계를 지녔다는 의미로,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이라 할만했다.

영생을 누리며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루는 게 당연한 위치였다.

한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물려준 대가로.

그녀가 바알에게 품은 복수심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했다는 뜻이 됐고,그녀의 힘으론 도무지 바알을 해치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마리로즈.’

베리아체의 힘과 염원을 계승한 존재.

베리아체가 바알을 감당할 수단으로 선택한 그녀의 실력은 과연 대단했다.

혈류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심장으로 흡수한 마나를 즉각 마기로 정제하여 육체와 마법에 한계가 없었다.

육체와 마법이 의식과 완전히 연동된 경지로 보였다.

뜻을 품는 즉시 실현시키는 경지.

상시 심검을 운용한다고 비유해야 옳다.

물론 뭘러의 심검이 아닌 보통의 심검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의 풍모는 초월자를 넘어서는 절대자에 가까웠다.

푸화하하하학!!

크란벨의 왼쪽 팔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무지막지하게 쾌속하게 접근해서는 태초의 마기로 절대방어를 관통하고 비늘과,살과,뼈를 모조리 찢어발긴 것이다.

무력과 마법,그리고 권능이 완전히 일체되어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크란벨은 확실하게 통찰했다.

‘이 상태론 승산이 없는 상대다.’

그러므로 순순히 팔을 내줬다.

저항하지 않았다.

마리로즈가 눈치 했다.

“죽을죄를 지었단 사실을 알고 있구나.”

[드래곤에게 죄를 논하는가. 무도하다 싶을 정도로 패도적인 것이,바알과 맞서 싸운 악마의 자식답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다 같은 드래곤인가,뭐.

맞받아치려던 마리로즈가 입을 다물었다.

크란벨의 격을 고려해서다.

굴절룡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한 존재.

크란벨은 필시 고통의 직계일 터였다. 존중받아 마땅했다.

이런 녀석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낭군은... 정말이지 멋지네.

“후훗”

“...?”

마리로즈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문득 시선을 돌려온 그녀가 눈웃음을 짓는데,평소 이상의 애정과 집착이 느껴졌다.

이대로 납치를 당해서 평생 관에 처박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히 샘솟았다.

[템빨신 그리드.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대한 자여.]

크란벨의 시선 또한 그리드에게 향해있었다.

그리드를 죽이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였다.

[현 상황에서 그대를 해치기 위해선 나 또한 죽음을 각오해야 할 터. 나는 이치에 순응하여 언약의 이행을 포기하겠다. 허락하겠나?]

그리드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허락이라는 단어에 담긴 존중을 느꼈기 때문이다.

크란벨은 그리드의 눈치를 볼 이유 따위 하등 없는,지고한 존재였다.

지금 그가 꺼려하는 대상은 마리로즈지 그리드가 아니었다.

한데 마리로즈가 아닌 그리드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드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그리드는 크란벨이 레이단을 멸망시키고도 사람들을 해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크란벨은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자다.’

대단히 훌륨한 성품을 지녔다.

마치 제논처럼.

절로 존경심을 품게 된다.

희미한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마리로즈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새 그리드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크란벨의 팔을 건네주었다.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렀으니까,뭐. 이 뒤는 낭군의 뜻대로 하렴.”

보내줘도 좋다는 의미.

마리로즈 역시 크란벨과 생사결을 치르는 건 부담이 컸다.

승산이 높긴 했지만 희생이 클 거라고 판단했다. 드래곤을 죽였을 때 생길 후환을 염려하기도 했다.

용살은,독이 든 성배다.

자칫 고룡의 표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바알을 죽이는 대업을 이뤄야 할 마리로즈 입장에선 수지가 맞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취향이 독특하네.’

마리로즈는 그리드의 마음을 우선시했다.

정신 나간 드래곤이 뭐가 그리 좋다고, 그리드는 자신을 넝마로 만든 크란벨을 호의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크란벨을 죽였다가 그리드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청혼을 거절당한 마당에 미움까지 사버리면 결합이 요원할 것이다...

“좋습니다. 단,조건이 있어요.”

드래곤에게 조건을 거는 그리드의 모습이 마리로즈의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언젠가 자신의 봉인을 풀었던 그리드가 살려줄 것을 요구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았었다.

색정이라곤 전혀 없이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별을 달았다고 생각했었다.

[조건이 뭐지?]

“나중에라도 제게 보복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이다. 보복이란 원한에서 비롯하는 것. 그대에게 호감을 품은 내가 그대를 해칠 일은 영원토록 없을 것이다.]

그리드는 드래곤의 미소를 봤었다.

정작 드래곤 본인들은 모를 표정.

이프리트가 보여줬던 그 표정을 이 순간 크란벨이 짓고 있었다.

대신 금방 지워졌다.

[두 번 다신 마주칠 일도 없겠지.]

크란벨은 따로 인사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투명한 은색 비늘이 무너진 천장의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달빛을 반사한다 싶더니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췄다.

실버 드래곤의 강점은 단연코 은신에 있는 듯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겠다.]

[함께해서 영광이었네.]

바스크를 비롯한 다른 드래곤들도 하나둘씩 현장을 떠났다.

그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어보였다.

함께 싸우면서 정이 들었다는 식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히 마리로즈의 눈치를 보는 것에 불과했다.

어째선지 나태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의 영역에서 굳이 소란을 피울 드래곤은 고룡이 아닌 이상에야 굳이 없었다.

“치료할 방법이 없나...?”

그리드는 홀로 떠나지 못한 드래곤을 걱정스레 살펴보았다.

제논.

그리드를 보호한 대가로 대부분의 비늘이 떨어져나간 그의 숨결이 희미했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살갗과 그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 온 부러진 뼈들이 안타까웠다.

그나마 뿔은 온전한 것이 다행이랄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민간에서 드래곤이란 신과 다를게 없는 존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평생 드래곤을 보지 못한다.

한데 오늘.

레이단의 백성들은 무려 다섯 마리의 드래곤을 봤다.

그들이 도대체 왜 이곳 레이단에 찾아왔고 싸움을 벌인 것이며,이젠 또 왜 순순히 물러난 것인지...

정황을 유추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어럼풋이 폐하께서 또 새로운 업적을 남기셨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제논이 레이단을 잿더미로 만든 당사자라는 사실 또한 아무도 몰랐다.

평범한 사람들은 드래곤의 생김새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엔 오늘 본 드래곤이 전부 똑같아 보였다. 다만 몹시 거대하다고 인식하는 게 한계였고 누가 레이단을 없앤 흉수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드래곤이 객사할 리 없잖니. 알아서 금방 회복할 거야.”

마리로즈는 제논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한 장본인이다.

제논이 레이단을 잿더미로 만드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하지만 굳이 그리드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제논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였다.

현재 제논의 명줄은 사실상 마리로즈가 쥐고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릴 제논이 만약 그리드를 기만한다면, 마리로즈는 그 즉시 제논의 사지를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반려의 순박한 마음씨를 이용하는 쓰레기들은... 좌시하지 않아.

[...]

잠시 후.

제논이 눈을 떴다.

마리로즈의 말대로 회복되는 속도가 상식을 초월했다.

부러졌던 뼈들이 순식간에 다시 붙어 제자리를 찾았고 새카맣게 타들어갔던 살갗은 모조리 윤기를 되찾았다.

‘미카엘이 생각나는군.’

다만 미카엘은 ‘전투 중’에도 뛰어난 재생력을 보였던 반면 드래곤은 전투 중엔 제약이 생긴다.

드래곤의 성향이 공격적이기 때문일 터였다. 마력의 흐름이 회복보다 공격에 중점을 둬서 그런 거겠지.

그리드가 감탄하는 동안 제논의 몸 위로 비늘까지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께가 몹시 얇았다.

드래곤에게 있어서 갑주인 비늘은,견고한 만큼 재생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리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짙은 순막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제논의 커다란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다.

그리드는 자신을 등에 업고 싸워 준 제논에게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상처 입은 몸으로,마지막 순간엔 죽음까지 불사하고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나.

[...]

그리드의 따스한 눈길이 제논에게 낯선 증세를 겪게 만들었다.

심장이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는데,고통의 정도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무척 피로웠다.

제논은 떠올렸다.

자신이 챗더미로 만든 도시의 백성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광경을.

그때 그들이 교환했던 감정이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인간을 해친 행위.

대수롭지 않아야 할 그 행동이 문득 죄악으로 다가왔다.

[미안하오... 그대의 도시를 없애고 백성들을 해친 드래곤은... 다름 아닌 나요.]

그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잠시뿐이다.

그리드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드래곤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호의도,악의도,살의조차 품지 않았다.

한데 이 순간 제논이 짓는 표정엔 슬픔과 후회가 교차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리드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자신이 해친 인간들에게 여태껏 없던 감정을 품은 눈치였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지금 제논이 보여주는 모습은 언젠가 다가올 거대한 변학의 전조가 아닐까,하고.

“정녕 미안하다면 당신에게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도와주십시오.”

[...기꺼이.]

쏟아지는 달빛이 그리드와 드래곤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 숙인 드래곤의 거대한 눈은 차마 그리드를 마주하지 못했고,그리드는 그런 드래곤의 콧등을 말없이 쓰다듬어주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일곱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고개 숙인 드래곤의 고해에서 비롯합니다.]

***

크란벨이 목단룡(目斷龍)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그에게 안력이 미치지 않아서다.

실버드래곤 크란벨은 왜곡의 대가(大家) 였다.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떤 현상이나 개념도 쉽게 왜곡시키고 은폐시켰다.

[쿨럭...!]

오늘 전투에서 크란벨은 은신하지 않았다. 렘빨신 그리드 때문이었다.

은신을 유지하면서 감당할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크란벨은 모습이 아닌 다른 걸 왜곡시켰다.

강인한 생명력.

쉽게 말해서 허장성세를 펼쳤다.

무신 치우를 연상시켰던 그리드의 검술에 베였을 당시.

크란벨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상당히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물론 죽음과 직결되는 수준의 상처는 아니었지만,겉으로 보이는 만큼 멀찡하지도 않았다.

크란벨은 생각해봤다.

만약 그리드가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간파했다면.

하여 좌절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싸움은 조금 더 치열하지 않았을까...

세계에 각인되는 제논의 고해와 그를 용서하는 템빨신의 서사시를 들으며.

크란벨은 천천히,조심스럽게 사막을 건넜다.

그가 지나는 자리에 드리우는 음영은 그림자가 아닌 피였다.

아득히 먼 곳에서 다른 드래곤들의 접근을 막아주고 있는 결사들의 존재가,크란벨은 새삼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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