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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03화 (1,491/1,794)

75권 5화

딱,딱딱...

몸을 잃고 흩어진 템빨골들의 두개골이 말없이 턱을 부딪친다.

힘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

신격의 사용 가능 횟수를 모조리 소모할 때까지.

그리드는 자신의 능력 전부를 활용해서 싸웠다.

아이템과 칭호,템빨신의 검무와 무패왕의 검술,권능과 심상,마안과 혈마법,산군의 기술들과 이정의 격투술, 룬의 힘과 공(公)의 능력 등.

심지어 아주 오래 전 번헨 열도에서 얻었던 스피어 샷과 연속 찌르기까지 쿨타임에 걸려있을 정도다.

드래곤에게 으레 겁을 먹고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노에를 강제로 전투에 참전시키기도 했다.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이쯤하면 됐다.

충분히 잘 싸웠다.

그럼에도 진 이유는 단지 크란벨이 나보다 강해서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던 그리드가 이내 자책했다.

[타시오.]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을 유예시킨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다.

상처 입은 드래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가 그리드에게 목을 내밀어왔다.

뜯겨나간 두 날개가 뭉클하게 다가왔다. 마법의 포화를 간신히 견디는 거대한 몸체에서 홑뿌려지는 핏물이 숭고해 보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를 믿고 함께해주겠다는 용이 남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줬다.

어찌 외면할까.

제논의 목에 올라타 점차 거세지는 수백 종 마법의 폭격을 마주하는 그리드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진즉부터 켜졌던 <산중지왕>의 효과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크란벨이 그리드의 생명력이 회복될 틈을 주지 않았단 증거다.

절망이 아닌 희망이었다.

철컥.

그리드의 외팔에 새로운 무기가 쥐어졌다.

달을 떨어뜨리는 검.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그 검은,그리드의 스탯과 공격 대상의 레벨에 비례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낙월검으론 크란벨을 벨 순 있어도 죽이진 못한다.

제논에 탑승한 그리드의 능력치가 평소의 3배이고 크란벨의 레벨을 999라고 가정해봤자 데미지 기댓값은 고작 억 단위.

생명력이 최소 수천 억,어찌면 조 단위로 추정되는 크란벨에게 치명상을 입힐 순 없다.

하지만 그리드는 드래곤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드가 처음부터 집요하게 노렸던,크란벨의 이마에 솟아있는 저 기관이야말로 힘과 권위의 원천이다. 이프리트가 알려줬다.

‘마지막 기회다. 이번엔 기필코 벤다.’

크란벨은 처음부터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본래 성정이 완전을 추구하는 것인지,아니면 본인의 주장대로 그리드의 실력을

인정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그리드 입장에선 개 같은 놈이었다.

강하면 강한 만큼 즐길 줄도 알아야지,융통성이라곤 전혀 없어서 벽처럼 느껴졌으니.

‘바알 같았으면 일부러 뿔을 잘리고 싸워줬을 것 같은데.’

하다하다 바알이 그리워질 줄이야.

어이없어서 실소를 흘린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유독 큰 모래폭풍이 발생한 지점으로 제논을 인도하면서다.

날개를 잃은 제논은 앞서 탑승했던 다른 드래곤들보다 느렸다.

상당량의 마법을 비행과 회피에 소모하는 탓인지 크란벨의 마법폭격을 제대로 요격하지 못했다.

거센 폭풍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비늘이 뜯겨지고 살갗이 벗겨졌다.

하지만 제논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폭풍 틈에서 튀어나온 마력의 사슬이 두 다리를 묶자 이로 물어끊고,

이때 기울어진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마법 철퇴를 맞아 주춤거리면서도.

제논은 그리드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서 꿋끗이 나아갔다.

레이단을 멸망시킨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니까.

사라진 도시를 보고 분노하는 그리드에게 부채 의식을 느꼈다.

...아니,어쩌면 다 핑계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제논은 현재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크란벨의 비늘을 몇 번이고 가르는 그리드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함께 싸우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됐을 뿐이다.

"..."

그리드는 집중하고 있었다.

유성처럼 쏟아지는 마법 세례를 아직 1.5초 남은 불사로 견디며 마법의 너머를 엿봤다.

갓 핸드로 펼쳐놓은 인공감각이 그에게 제논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뚜둑, 뚜두둑.

거센 풍압과 폭발의 연쇄에 시달리는 외팔이 낮은 비명을 토한다.

뼈마디가 둥개지고,근육이 가닥가닥 끊기는 듯한 소름 돋는 감각이 그리드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 감각을 외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외면하지 못했다.

낙월검을 쥐고 있는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낙월검을 신경에 연결하는 심상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만든 낙월검의 구조를 낱낱이 해부하고 이용했다.

검과 하나가 되어갔다.

불사의 남은 시간은 1.2초.

끼릭,끼기긱.

낙월검의 궤도가 미세하게 바뀐다.

시야를 가리는 마법 너머 존재하는 크란벨의 위치를 인공 감각으로 더듬고,전투 중 파악한 크란벨의 습관을 상기하면서.

그리드는 자신이 베야 할 공간을 가늠해갔다. 낙월검의 각도를 실시간으로 조절해갔다.

쿠우웅!!

제논이 불현 듯 솟구친 장벽과 충돌했다.

제논의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그리드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백호 자세>를 활성학시켜서 스스로를 ‘이동 불가’ 시킨 것이다.

꽈르르르르릉!!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낙뢰에 휩쓸릴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자연히 그렸다.

크란벨은 신이란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신의 죽음이 최대 10초까지 유예된단 사실을 알고 마법의 현현 타이밍을 쟀다.

불사의 남은 시간은 어느새 0.5초.

흉포한 모습을 드러낸 벼락들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한 바로 그때.

‘지금...’

백호 자세를 해체하는 그리드의 외팔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번쩍인 푸른 섬광이 전방의 모든 마법을,사막을,크란벨을 베어나갔다.

이십만대군 분쇄검.

그리드가 전투 내내 회(回)를 적극 활용한 탓에 나설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검술이 마지막 비장의 한 수로 화하는 것이다.

[...!]

제논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으로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 선 크란벨이 경악하는 표정을 목격한 여파였다.

서걱!

크란벨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고,

[우오오오…!]

이를 악 문 제논은 몸을 크게 비틀었다.

불사를 상실하고 기우는 그리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벼락을 대신 맞아주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곧 죽을 몸.

제논은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동족에게 포식당하는 평범한 최후보다야 위대한 신을 지키기 위해 맞이하는 최후가 여러모로 특별할 테니까.

그래,위대한 신.

‘이게,선망인가.’

꽈르르르릉!!

뒤늦게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제논의 몸이 벼락에 휩쓸려 백열했다.

진즉부터 내구력을 상실한 비늘들이 바싹 곤두 선 채 파사삭,재가 되어 홑날린다.

사막 위에 쓰러져있던 세 마리 드래곤은 진즉부터 지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크란벨과 나란히 떨어지는 그리드의 시선이 제논에게 머물렀다.

‘약자를 위한 희생...’

초월적인 존재를 만날 때마다 실망을 거듭했던 그리드가 이 순간 드물게 감격했다.

이프리트와 제논,그리고 바스크 등.

드래곤은 그리드가 초월자에게 품었던 여러 편견들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마치 강자가 약자에게 손을 내밀듯이,일면식도 없는 그리드를 도와 함께 싸워주지 않았나.

지닌 힘과 비례하는 성품이라 할만 했다. 그리드는 고매한 그들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절로 존경심을 품었다.

솔직히 말해서 크란벨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게 품게 된 호감과 별개로 언약을 이행하겠다던 그의 선언엔 어떤 품격이 있었다.

만약 그가 레이단을 궤멸시키지만 않았어도 이 살심을 억누를 수 있지 않았을까,그런 의문을 품었을 정도다.

덥썩!

지하의 끝에 추락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리드를 뒤쫓아온 갓 핸드들이 그리드를 지탱해 주었다.

덕분에 추락사를 면한 그리드는 안도할 틈도 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바스크와 드래곤들이 크란벨과 대치하고 있었다.

뿔이 베이기 직전에 고개를 비틀어 얼굴의 절반을 잃은 크란벨은,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고했다.

긴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외눈으로 적들을 굽어보는 모습이 오래 전 신화의 한 장면 같았다.

꿀꺽,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키는 그때였다.

“폐,폐하아아아아아!!”

"...?"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크란벨이 등지고 서있는 고성에서부터 였다.

처음엔 수십 명쯤이었는데 순식간에 수백 명,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선두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드에겐 애증의 대상인 레이단의 연금술사들이었다.

“저희가 이것만큼은 끝까지 지켜냈사옵니다...!”

Satisfy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물질.

플라스틱처럼 투명한 정체불명의 판때기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연금술사들에게 그리드가 다급히 외쳤다.

“그만! 물러나라!”

저 인간들이 단체로 미쳤나.

여기 드래곤이 몇인데 무슨 정신으로 뛰어오는 거지?

생존자들을 보고 기뻐할 틈도 없이 황당해하던 그리드가 이내 사람들에게 믿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단의 생존자들에겐 하나 같이 붉은 핏자국이 도장처럼 찍혀있었다.

본인들이 흘린 피가 아닌 타인의 피다.

이곳이 어디인지,크란벨이 등지고 있는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린 그리드가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마리로즈가...?’

혈족에게조차 무심해서 도통 인간미를 느낄 수 없던 그녀가 레이단의 백성들을 구했다고?

그리드가 당황하는 그때.

스아아악!

그리드의 바로 곁으로 핏줄기가 솟구치더니 반으로 갈라졌다.

심연처럼 짙은 어둠과 얽힌 긴 머리카락이 그리드의 뺨을 어루만지듯 간질인 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드를 보고 울부짖던 레이단의 백성들이 불시에 현혹되어 침묵하자 적막이 내려앉은 지하에 오직 그녀의 음성만이 메아리쳤다.

“누가 내 낭군의 팔을 먹었니.”

태초의 3악 중 하나인 베리아체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낳은 존재.

마리로즈의 홍옥 같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상처 입은 드래곤들을 차례대로 훑어보는 눈빛에 일말의 권태도 없었다.

혈왕.

다름 아닌 그리드가 그녀를 세계에 또렷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

현장의 드래곤들이 숨을 죽였다.

태풍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 필멸자들의 모습을 닮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길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빚어내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쿠우웅!!

뒤늦게 떨어진 제논이 현장의 적막을 깨뜨렸다.

크란벨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템빨신을 해친 건 나다.]

크란벨은 다만 진실을 알릴뿐이었다.

다른 드래곤들을 변호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 따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과연 고매한 드래곤다웠다.

탑의 결사들이 드래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광룡과 악룡,미식룡과 염룡 같은 일부 정신 나간 고룡들이 심은 잘못 된 편견 때문임이 확실했다.

‘하야테님은 모든 드래곤이 미쳤다고 재차 말씀하셨지만... 내 눈엔 전혀 그렇게 안 보여.’

생존자들을 보고 크란벨에게 품었던 적의가 한풀 꺾인 그리드가 생각하는 순간.

푸화하학!

그리드의 시야에 붉은 선혈이 덧칠 됐다.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간 마리로즈가 크란벨의 왼쪽 팔을 통째로 뽑아내자 솟구치는 핏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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