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02화 (1,490/1,794)

75권 4화

새 삶을 얻은 뒤.

브라함은 자신의 과거를 늘 반성해 왔다.

질투심이라는 추악한 감정에 매몰되어 제자의 업적을 빼앗고 욕보인 죄,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여 파그마를 신뢰하고 배신당한 실수 따위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는,이번 삶만큼은 지공에 걸맞고자 했다.

감정이 아닌 이성과 지혜로 세상을 마주했다.

패도적인 뱀파이어의 피가 이따금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지만,

말 그대로 간혹 있는 충동에 불과했다.

브라함은 잘 인내해왔다고 자부한다.

재능 없는 천것들을 기피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왔음이 증거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삶에 대한 집착으로 완성시킨 부활의 주술.

그것이 흔적도 없이 소멸할 때까지 이 땅에 갇혀 죽음을 반복하고,종국엔 지옥으로 끌려갈 거란 미래를 관측했음에도 그는 공포와 절망에 휩쓸리지 않았다.

심상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영원불멸할 크란벨의 육신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생애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의 이름을 세계에 새길 각오를 마쳤다.

한데 이 순간.

"..."

두근!

잠잠했던 브라함의 심장이 의지와 달리 힘차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목덜미에 올라 탄 그리드의 모습을 보면서다.

그리드의 신성이 드래곤의 속도와 맞물려서 점차 비대해지고 있었다.

드래곤이 선회할 때마다 휘장처럼 펼쳐지는 주황색 극광이 세상을 뒤덮어갔다.

꿈결 같은 광경이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손톱으로 그은 손목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의 감촉이 증명하고 있었다.

“드래곤을... 탄다?”

상식에 구애되지 않는 지공의 지혜를 아득히 뛰어넘는 발상.

브라함은 웃는 수밖에 없었다.

코웃음 따위가 아닌 대소였다.

반면.

[...]

크란벨은 웃지 못했다.

처음 렘빨신이 난입했을 때.

그 또한 광신광룡의 비화를 목격했었다.

이프리트의 마법 잔재가 강제로 영사하는 광경을 통해서였다.

드래곤에게도 불가해로 다가오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크란벨은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의외로 쉽게 납득했다.

죽음을 앞둔 이프리트.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리드를 목덜미에 태웠던 건지 눈치 채고,동정하면서다.

그렇다.

크란벨은 이프리트가 그리드를 이용했던 거라고 보았다.

단순히 당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크란벨은 그리드가 이프리트의 뿔을 만들어줬다는 사실까진 몰랐으니까.

광신광룡이 서로에게 품은 신뢰와 호의가 몹시 강력하단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격이... 얼마나 오른 거지?’

그리드가 자신의 간격으로 끌려오지 않는단 사실을 눈치 챈 크란벨의 비늘이 곤두섰다.

칼날을 세워 만든 철갑을 두른 듯한 모습이었다.

얼핏 위협적이나,사실 그건 공포의 표상에 불과했다.

크롸라라라라라라라!!

그리드의 신성은 바스크의 육신을 뒤덮을 정도로 비대해져 있었다.

바스크가 쏜 브레스가 주황빛으로 보였을 지경이다.

콰쾅! 쿠콰콰콰콰쾅!!

어느새 시야를 가득 채운 바스크의 브레스를 크란벨은 좌시하지 못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똑같이 브레스를 써서 맞받아쳤다.

한 발 늦은 대응이었지만 문제없었다.

크란벨의 위계는 드래곤 중에서도 상위다.

상대보다 늦게 대응해도 도리어 선수를 치는 경지였다.

마력의 순환,의지의 발현,육체의 활동 등.

모든 게 상대보다 빨랐다.

꽈아아아아앙!!

크란벨이 한 발 늦게 쏜 브레스가 바스크의 브레스와 충돌했다.

크란벨은 다음을 준비했다.

자신의 브레스가 바스크의 브레스를 분쇄하고 관통하는 동안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브레스를 피하기 위해 회피 기동할 바스크의 경로를 계산하고 쏘아졌다.

여기까지 찰나였다.

폭발과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라고 표현해야 옳았다.

[...!]

크란벨의 성벽 같은 가슴이 짓뭉개졌다.

자신이 쏜 브레스의 경로를 쫓아 이동한 여파다.

상상조차 못했다.

자신의 브레스가 설마 역으로 분쇄당할 줄은.

쿠콰콰콰콰콰콰콱!!

크란벨의 비늘을 깨부수고 가슴을 짓뭉갠 바스크의 브레스는 좀처럼 기세를 잃지 않았다.

크란벨을 그대로 관통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크란벨을 하늘의 저편까지 날려 보냈다.

‘이럴 수가.’

크란벨보다 도리어 바스크가 놀랐다.

브레스는 드래곤의 순수한 힘,선천지기에 가깝다.

바스크의 브레스가 크란벨의 브레스와 싸워서 이기는 건 하늘이 뒤집혀도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리드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증폭공>

활성학 시,사용하는 마법과 스킬의 위력을 2배로 증폭시킵니다.

단,소모 자원과 재사용 대기시간도 2배 증가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을 단축하는 아이템과 스킬의 효과를 65퍼센트만 받습니다.

바스크의 브레스가 그리드의 스킬창에 활성화 된 시점부터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다.

바스크는 위계를 초월하는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는 규칙.

그 새로운 규칙이 크란벨에게 위기를 선사한 것이다.

‘조금 더 빨리!’

그리드가 바스크의 목덜미에 납작 달라붙었다. 당당하게 허리를 폈던 조금 전 모습과 비교해서 상당히 볼품없었지만,가속할수록 강해지는 바람의 저항이 압박이라 어쩔 수 없었다...

[꽉 잡아라!]

더 강한 저항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 말하는 듯한 그리드의 자세 변환이 바스크를 채찍질했다.

날카롭게 솟은 수백 개의 이를 악 물고 온 힘을 다해서 크란벨의 뒤를 쫓았다.

크란벨은 순식간에 따라잡혔다.

애초에 그는 브레스에 휩쓸리는 중이었다. 일시적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위력이 2배 증폭된 바스크의 브레스가 그만큼 강력했다.

콰작!!

바스크가 크란벨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꽈아아앙!!

창처럼 쏘아진 바스크의 꼬리와 크란벨의 꼬리가 충돌했다.

대기가 울부짖었다.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그리드의 신성이 요동쳤다.

크란벨의 시선이 그리드를 쫓았다.

외팔이가 된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위력적인 쌍수검이 봉인 된 상태였으니까.

성급했다.

크란벨에게 점차 가까워지는 그리드의 인벤토리에서 수십 종의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고,그것은 한데 뭉쳐 팔의 형상을 갖춰갔다.

갓 핸드와 꼭 닮은 모양의 의수

그리드가 지옥의 진실을 전파하고 보상으로 얻었던 2개의 권능 중 하나.

템빨신이 ‘만물의 지배자’라는 근거로 발생한 권능을 써서 만든 의수다.

[<지배의 권능>으로 잃었던 팔을 되찾았습니다.]

<지배의 권능>

2개 이상의 아이팀을 합쳐 물질,혹은 현상을 빚습니다.

물질과 현상의 위력은 합친 아이템의 총 내구력 수치와 일정량 비례합니다.

★내구력이 무한인 아이템은 대상으로 지정하지 못합니다.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스킬 지속 시간:3분

자원 소모가 없는 스킬이다.

하지만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지배의 권능을 활성화시킨 뒤 원하는 물질이나 현상을 만들기까지 모든 과정을 ‘상상’으로 채워야했으니까.

지금처럼 갓 핸드라는 정확한 ‘표본’이 있지 않은 이상,원하는 물질이나 현상을 정확히,하물며 신속하게 만드는 건 굉장히 힘든일이었다.

철컥!

신체의 결손을 재생,혹은 결합으로 무마하는 다른 초월자들과 달리 차가운 금속으로 채운 그리드.

다소 어색한 동작으로 쌍수검을 무장하는 그에게 시스템이 즉각 호응했다.

[< 산용수상 (Lil 容水相)>이 활성화됩니다.]

[누군가가 평생토록 지켜온 풍경을 당신의 검으로 그려냅니다.]

“낙룡...”

[용의 추락을 논할 정도인가!!]

크란벨이 소리쳤다.

목덜미를 깨물고 있는 바스크의 주둥이를 두 손으로 붙잡아 비틀고 찢어발기는 기세가 흥흉했다.

그때.

화르륵!

불길이 세상을 뒤덮었다.

이젠 템빨신의 심상으로 부적절한 게 아닌가 싶은 <화신의 폭풍>이다.

그리드의 심장에 머무는 주작의 기운이 회전했다.

그리드의 치솟은 격을 음미하듯,맹렬하게.

쿠와아아아악!!

심상의 위력은 격의 영향을 받는다.

여태껏 무수히 많은 적들이 증명했다.

대부분의 초월자가 그리드의 심상을 어렵지 않게 허물어뜨렸었다.

하지만 지금.

[큭...!?]

크란벨은 화신의 폭풍을 허물어뜨리지 못했다. 빠르게 회복하는 바스크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그리드의 무력을 저지하지 못했다.

"...극연살파!!!”

붉은 폭풍과 노을이 넘실거리는 세상에서.

신이 춤을 췄다.

거대한 용의 머리 위에서,두 자루 검과 함께.

탐욕의 룬에서 피어오른 온갖 힘들이 춤사위와 융화되어갔고,

딸랑ㅡ

또렷하게 들려오는 방울소리가 그리드를 누군가와 겹쳐보이게끔 만들었다.

발악적으로 포효하는 크란벨을 개세적인 검기가 난도질했다.

[궁극의 무가 발동합니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5,378,922,746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천상의 신들이 기함합니다!]

[당신을 노려보는 무신 제라를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됩니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신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당장 가까운 신전으로 피신하십시오!]

오싹한 쾌락과 끔찍한 통증이 동시에 그리드를 엄습했다.

무너지는 그리드의 시야에 은색빛줄기의 잔재들이 보였다.

바스크의 척수를 관통하고 그리드의 몸까지 넝마로 만든 크란벨의 브레스가 남긴 흔적이었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끝났습니다.]

연속적으로 큰 공격을 허용하고 ‘드디어’ 생명력게이지를 드러낸 크란벨의 커다란 두 눈에 추락하는 그리드의 모습이 투영된다.

[템빨신, 네 덕분에 이프리트가 나보다 낫음을 알게 됐다.]

찰나지경에 완성된 크란벨의 언어가 하얗게 물든 그리드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그리드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이대로 탈출하느냐,아니면 끝까지 남아서 싸우느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드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이곳에 브라함이 있었으니까.

“브라함...! 당장 도망쳐요!!”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리드.

바스크에 탑승하고 격의 상승을 이뤘을 때,그는 온전히 느꼈다.

현장을 지배하고 있던 크란벨의 용언을.

그 용언이 효력을 잃었음을.

이제 브라함은 도망칠 수 있다.

그때까지 내가 시선을 끌어주면 된다...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없다.]

크란벨이 희망을 무너뜨렸다.

너무나도 손 쉽게,고작 몇 마디 말로.

[오늘,나는 이프리트를 넘어선다. 너희 전부를 포식하고 이루리…]

크란벨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지상에 추락한 바스크를 대신해서 또 다른 드래곤이 그리드를 목덜미에 태운 까닭이다.

그리드의 격이 재차 상승했다.

크란벨의 용언은 또 다시 효력을 잃었다.

“브라함! 꺼지라고!!”

피칠갑한 그리드.

턱밑까지 조여오는 죽음을 느끼면서,그는 크란벨에게 돌진했다.

이번엔 녹색의 브레스를 위시했다.

신격으로 재차 아이템 합체를 전개하여 무기를 완성하고,다시 한 번 춤사위를 펼쳤다.

아쉽게도 방울 소리는 없었다.

크롸라라라라!!

크란벨은 상처를 감수했다.

감수해야만 했다.

브레스를 허용하고,대신 그리드의 검무를 마법과 꼬리로 쳐냈다.

"큭..."

두 번째 충돌 역시 그리드를 마모시 켰다.

그를 태웠던 녹색룡이 바스크와 마찬가지로 사막 위에 추락했다.

하지만 아직 괜찮다.

크롸라라라라!!

이번엔 청색룡이 그리드를 태웠다.

그리드는 다시 시작했다.

격을 높였고,청색 브레스를 위시하여 크란벨에게 접근했다.

이번에 그가 춘 춤은,짧고 초라했다.

융합 검무가 모조리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렸기 때문이다.

"크악...!"

세 번째 충돌은 그리드에게 치명적이었다.

의수가 박살났다.

청색룡마저 지상으로 추락했다.

크란벨은 브레스의 위력을 견디는 반면 다른 드래곤들은 크란벨의 브레스를 견디지 못했다.

절망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강함이다.

그나마 위안인 사실은.

“...이걸로 됐어.”

브라함이 현장에서 탈출했다는 점이다.

떠나기 전 그가 남긴 욕설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피식 웃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갱신되고 있었다.

[‘긴급 복귀’ 시스템의 비활성화까지 2초 남았습니다.]

[주의! 사망 시 막대한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불사 후 5초가 지났다.

그리드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반응했다. 혹시 몰라 드래곤들을 갓 핸드로 챙기며 점멸하는 긴급복귀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하지만.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크란벨이 어느새 다시 세운 법칙에 발목이 붙잡혔다.

[말에 깃드는 힘은,언약을 이행할수록 강해진다. 그러므로 템빨신,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대한 자여. 나는 네게 품게 된 경외와 호감과 별개로 너를 죽이겠다.]

수백 개의 마법이 떠올랐다.

브라함의 공백을 절실히 실감시키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싸웠다.’

[〈긴급 복귀〉시스템이 비활성화 됩니다.]

급기야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고 마음을 내려놓는 그리드의 곁으로.

[타시오.]

마지막 남은 드래곤이 날아와 고개를 숙였다.

제논.

가장 볼품없는 드래곤이었다.

다른 드래곤들과 비교해서 유독체구가 작았고,그 작은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날개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최후의 희망이었다. 애초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제논 위에 올라타는 그리드를,크란벨은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하위룡과 어린 신.

저 둘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꽈아아아아아아앙!!

수백 개의 마법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온갖 궤도와 형태로,그리드의 모든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그에 맞서는 제논의 브레스는 미약했다.

마법의 세례를 돌파하지 못하고 도중에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크란벨의 얼굴은 굳었다. 수백 개로 분절되어 있는 그의 의식이 모조리 경악했다.

반사적으로 의식이 일체됐다.

늦었다.

차가운 달빛이 그의 몸과 사막을 통째로 갈랐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현장의 모두가 지하의 깊은 곳까지 추락했다.

너무 지친 나머지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결국 전원 지하의 끝에 도달했다.

공교롭게도 마리로즈의 성이 있는 장소였다.

“폐,페하아아아!!”

“...?”

그리드는 한 순간 이곳을 지옥으로 착각했다.

죽은 줄 알았던 레이단의 백성들이 그를 맞이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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