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3화
[대상에게 1,507,344,962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믿기지 않는 업적입니다...!]
[크란벨의 얼굴에 스친 고통을 읽은 천상의 신들이 수군거립니다.]
[무신 제라툴의 기세가 올랐습니다. 드래곤과의 협정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 방 제대로 먹였다.
초월종의 궁극,또는 절대종.
으레 군림해온 세계 최강의 생물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리드의 가슴이 후련해졌다.
제라툴의 영문 모를 반응이 은근히 불쾌했지만,그럼에도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불안감이 싹텄다.
브레스의 위력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점.
모든 능력치가 절반 하락한 상태에서 되돌려준 브레스의 위력이 무려 15억이다.
반격 데미지를 최대한 증폭시키는 회룡낙극살의 효과를 감안해도 과했다.
드래곤의 방어력은 그리드의 방어력을 아득히 웃돌 테니까.
천만 단위 데미지만 입혀도 속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저걸 한 방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간다는 뜻인...?’
찰나 동안 이어지던 그리드의 사고가 멈췄다.
그의 얼굴 가죽이 뒤집혔다. 마구잡이로 출렁이는 것에 가까웠다.
무지막지한 압력에 의해서다.
그리드의 몸이 붕괴된 지하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몸에 두른 전설,그리고 신학 등급의 무장들이 무색하게 무력했다.
템빨신 그리드는 크란벨의 간격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법칙이 만든 물리현상이었다.
앞서 추락한 크란벨을 즉시 뒤쫓게 되는 것이다.
"큭...!"
쿠콰콰콰콰콰콰쾅!!
사막의 단면.
아직 사막이 아니던 시절부터 쌓아올린 역사의 산물인 온갖 지층이 그리드의 시야를 복합하게 어지럽혔다.
더 깊이 추락할수록,그리드는 다양한 지층의 촉감과 색감을 학습했다.
고대의 레이단이 어떤 생태계를 이뤘을지 어럼풋이나마 짐작했다.
팔자에도 없던 공부를 하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
그리드의 시야가 역회전했다.
기껏 도달해가던 지하의 끝과 그의 몸이 빠르게 멀어졌다.
이내 시야가 온통 파랗게 물들었다.
하늘이 보였다.
그리드를 굽어보는 은색의 드래곤이 자리한.
‘텔레포트.’
그리드는 자신의 입장이 생각보다 더 나쁘단 사실을 깨달았다.
전투 내내 크란벨의 꽁무니만 뒤쫓다가 제 풀에 지쳐 죽을 수도 있음을 자각했다.
'미친 용언.’
드래곤이 무적인 이유를 알겠다.
용언의 위력을 실감한 그리드가 헛웃음을 흘리는 그때.
[너의 격이 내 생각보다 높구나.]
크란벨이 입을 열었다.
주륵.
미간에서 흐르는 그의 피는 특별하지 않았다. 인간의 것처럼 붉었다.
투명한 비늘의 일부가 빨갛게 물들어서,이프리트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설마 용언을 거역할 줄이야.]
"...?"
영문 모를 헛소리.
그리드는 한 귀로 흘렸다.
붉게 물든 크란벨의 비늘을 보고 떠올린 슬픈 기억도 접어두고 집중했다.
그의 강점은 초월자의 감각에 어느 정도 호응하는 육체 능력에 있다.
절반의 능력치가 하락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빴지만,하늘로 멋대로 솟구치는 몸을 기어코 통제하여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드는 그대로 허공을 박찼다.
끌려가는 몸을 최대치로 가속하는 동시에 보법을 밟아 검무의 위력을 증폭시켰다.
___!
그리드의 검과 크란벨의 꼬리가 연속해서 충돌했다.
의외로 소음은 없었다.
밀집된 힘이 모든 개념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앙!!
수십 차례의 충돌 후 뒤늦게 발생하는 폭음.
이어서 번지는 신성의 잔광이 크란벨의 투명한 비늘을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어떤 감상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이템 합체와 템빨신의 분노 등.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강화 효과엔 제한 시간이 존재했다.
크리티컬,궁극의 무,신장 등.
이로운 효과의 발생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공격 횟수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쩌저저저정!!
템빨신의 검무와 무패왕의 검술,그리고 산군 그레니어로부터 배운 기술들과 아이템,칭호 효과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그리드의 공격은 쾌속했고 방어는 견고했다.
크란벨의 상체를 집요하게 노려댔는데, 드래곤의 짧은 팔이 커버하기 힘든 어깨 위와 긴 목에 가장 파괴적인 스킬들을 퍼부었다.
덕분에 크란벨의 꼬리가 바빴다.
홀로 어지럽게 움직여 전 방위를 감당했다. 워낙 크고 길어서 가능했다.
‘용언에 거역한 게 맞나?’
바삐 움직이는 꼬리와 상반되게 크란벨의 눈빛은 평온했다.
육체를 제어하는 의식과 그리드를 관찰하는 의식을 따로 운영하는 까닭이다.
현재 그의 의식은 수백 개로 쪼개져 있다.
전장 전체를 관조하는 의식과 수백 킬로미터 바깥에 깔아놓은 감시 마법을 관리하는 의식들을 모조리 손쉽게 통제했다.
푸욱!!
크란벨의 긴 목에 뒤늦게 형체를 드러내는 검이 박혔다.
삼십만대군 잠행검.
쫓겨난 신들의 보검,양반 미르의 감각을 속였던 은밀한 일격이다.
크란벨이 확신했다.
‘거역하지 못했다. 처음 공격은 요행이었군.’
크란벨은 절대방어가 무력해진 점에 대해선 동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드래곤처럼 그가 상정하는 적이란 당연히 동족이다.
그리고 크란벨이 바스크를 공격했을 때 증명됐듯,절대방어는 같은 드래곤에게 별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
민간에선 신성시 되는 절대방어가 정작 드래곤에겐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드래곤 입장에선 절대방어가 깨졌다고 해서 동요할 이유가 하등없었다.
다만 크란벨이 놀란 부분은 브레스를 반격당한 순간 느꼈던 심대한 통증이었다.
태어나 처음 맛보는 고통.
몇 개의 비늘이 처참히 박살나고 살갗이 찢겨나가며 뇌리를 통째로 흔든 그리드의 첫 번째 공격은 크란벨에게 커다란 착각을 심었다.
‘힘을 봉한다.’는 용언에 그리드가 거역했다는 착각.
그래,착각이었다.
흥미에 덮여 사그라졌던 크란벨의 살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호의를 거부한 그리드의 오만을 혐오하며 피어올린 살의.
그리드가 실력에 비해 본인을 너무 과신하고 있단 사실을 재차 확인한 지금,크란벨의 살의는 더욱 더 짙어졌다.
유형화되는 수준이었다.
꽈아아아아앙!!
마력으로 빚어진 벼락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나 떨어졌다.
드래곤은 마법을 쓸 때 공식이나 규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캐스팅을 생략하고 주술을 완성하는 대마법사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으로,의지가 곧 마법이다.
검성의 심검(心劍)과 비슷한 개념으로 봐야 옳았다.
[227,3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
벼락에 꿰뚫린 그리드의 시야가 하얗게 명멸한다.
그는 혼란을 느꼈다.
초월자의 감각이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인공 감각을 찢어발기며 떨어진 벼락에 관통당한 후에야 이것이 크란벨의 마법임을 알았다.
‘버근가?’
왜 초월자의 감각이 감지하지 못한 거지?
의문을 품는 그리드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0.1 초조차 안 되는 찰나였다.
그리고 드래곤이란,1초의 시간을 수백 개의 단위로 분절시켜 인식하는 존재다.
[315,0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란벨의 꼬리가 그리드의 옆구리를 때리고 가슴을 꿰뚫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리를 틀어서 그리드의 몸을 공공 묶었다.
"커헉...!"
호흡 불가와 모든 행동 불가.
물리적인 상태이상에 걸린 그리드가 고통에 신음했다.
당연히 질 거란 사실은 알았지만.
애초에 딱 한 방 먹여주는 게 목표이긴 했지만.
아쉽다.
역시,지는 건 싫다.
하물며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 놈이 상대라면...
그리드가 분해서 이를 가는 그때였다.
“퍼니 쉬 먼트.”
파멸의 형상.
새빨간 마력의 구체가 크란벨의 꼬리를 갈랐다.
덕분에 숨통이 트인 그리드의 시야에 브라함의 등이 보였다.
“드래곤의 심상에 따라서 발생하는 현상,혹은 재앙이 바로 마법의 근원이라는 학설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드래곤의 마법은 태풍,해일,지진 따위의 자연현상에 가깝다.
적의를 느끼는 게 불가능하니 초월자의 감각도 무뎌지겠지.”
브라함은 담담히 말했다.
그 어떤 감정적인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각오한 눈치였다.
그리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뭡니까? 여태껏 안 도망치고 뭐했어요?”
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
그리드는 크란벨의 관심을 붙잡아두는 동시에 브라함에게 피하라는 신호를 보냈었다.
만에 하나라도 브라함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길 바랐다.
직계가 영생을 누릴지언정 불사는 아니니까.
직계 뱀파이어도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으면 죽는다.
누구보다 그리드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한데 왜 굳이 버티고 있던 거지?
답답함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도망칠 수가 없는데 어찌라고.’
브라함은 용언에 발이 묶인 자신의 신세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기왕 죽을 거,자존심은 지키고 죽고 싶었다.
“드래곤하고 한 번쯤은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으니까.”
당연히 거짓말이다...
크란벨을 통해서 트라우카의 공포를 상기한 브라함은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드래곤은 싸움이 성립되는 대상이 아니며,승산이 1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어차피 못 도망치는데.
“미친,환장하겠네.”
그리드가 급기야 욕설을 토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태연하게 지낄이는 브라함을 원망했다.
“기껏 그딴 욕심 때문에 죽음을 자처한다고? 그럼 나는? 남겨진 사람들은 어쩌라고요?
평생 당신을 그리워하게 될 텐데...!”
“...흥,내 알 바냐.”
콧방귀 뀌는 브라함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신의 죽음에 슬퍼해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자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오연하게 크란벨을 노려봤다.
어차피 죽는다.
그리드와 함께 놈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고 싶었다.
베리아체의 아들이자 템빨신의 사도인 브라함의 생애가 헛되지 않았음을,놈을 통해 역사에 새기고 싶었다. 그건 불멸할 역사일 것이다.
[...과연,소문이 사실이었나.]
브라함을 바라보는 크란벨의 두 눈이 살짝 커져있었다. 그리드에게 회룡낙극살을 맞았을 때처럼 감탄했다.
[브라함 에슈발트. 염룡 트라우카의 레어에 도전했었다는 네놈의 악명은 익히 들었다.
사실 과장된 소문이라고 여겨왔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네놈의 재능... 우리에게 위협적이군.]
드래곤의 꼬리는 드래곤의 신체부위 중에서 네 번째로 강력하다.
고작 한 방에 두 동강이 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브라함은 해냈다.
베리아체로부터 계승한 피와 동조하는 놈의 마법은 상당히 파괴적인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순전히 재능으로 빚어낸 이적이다.
제논의 날개를 처참하게 찢어발긴 마리로즈의 마기와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언젠간 근접하게 될 것만 같았다.
[네가 섬기는 신과 함께 죽어라.]
스아아아아아!!
크란벨의 살기가 본격적으로 유형화되었다.
수백 개의 마법이 불시에 전개되어 하늘과 지상을 가득 채웠다.
무시무시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온갖 형태의 힘에 영향을 받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가 낱낱이 흩어져 떠올랐다.
뜨겁게 달궈지거나 차갑게 얼어붙었다. 분쇄되어 가루가 되기도 했고,날카롭게 벼려지기도 했다.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며 폭풍을 이루기도 했다.
그 모든 현상이.
파스슥!
허무하게 소멸했다.
마법의 근원이 정녕 드래곤의 심상이라면.
드래곤의 심상은 브라함에게 무력하다.
브라함은 모든 마법을 실시간으로 이해하고,역산해서,파훼하는 지공(智公)이니까.
드래곤의 심상을 마법의 범주에 넣을 수만 있다면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
“도마뱀.”
드래곤의 꼬리가 드래곤의 부위 중 네 번째로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회복력에 있다.
잘려도 즉시 재생한다.
브라함은 그 부분을 지적했다.
꿈틀꿈틀 재생하는 크란벨의 꼬리를 시야에 넣고 코웃음 쳤다.
“미물이면 미물답게 몸을 써서 덤벼라.”
크롸라라라라!!
크란벨이 포효했다.
그리드의 이상한 술수와 다른 드래곤의 개입을 경계해서 억제했던 브레스를 쏘았다.
빛이 번쩍한다 싶더니 이미 그리드와 브라함을 관통했다.
천하의 브라함이 텔레포트를 쓸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블링크를 썼을 정도다.
그리드 역시 반격할 기회를 못잡고 무작정 순보부터 썼다.
브레스의 타이밍을 예상했을 때와 예상하지 못했을 때의 차이였다.
‘브라함,제발 좀.’
도발하지 말고 튀라고.
브레스의 잔여 기파에 스쳐서 날아간 한쪽 팔.
그 탓에 쌍수검 사용이 불가능해지고 <산용수상(山容水相)〉패시브를 잃은 그리드가 브라함을 강하게 노려봤다.
제발 도망쳐 달라는 뜻을 담고서,크란벨의 어그로를 다시 끌어오기 위해 6융합 검무를 준비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이 순간에도 그의 몸은 크란벨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있었으니까.
온 힘을 다해 허리를 비트는 그의 발밑으로.
[타라.]
회색룡 바스크가 날아왔다.
[그대와 함께 날고 싶다.]
드래곤 나이트.
일부 드래곤을 <탈 것>으로 삼는 그 유일한 칭호는,공교롭게도 강제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리드를 태울 것인가,말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그리드가 아닌 드래곤이 선택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리드에겐 현장에 있는 드래곤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상위룡과 싸우는 마당에 도와달라고 부탁해봤자 쉽게 외면당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한데 기회가 스스로 찾아왔다.
그리드는 마다하지 않았다. 즉시 바스크의 목덜미에 올라탔다.
이프리트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며,능숙하게.
[중위룡 <바스크>에 탑승했습니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로 당신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당신을 억압하던 용언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정상 수치로 회복됩니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3배 상승합니다.]
[스킬 <바스크의 브레스〉가 활성화 됩니다!!]
크롸라라라라라!!
크란벨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자신을 덮쳐오는 브레스의 포화너머.
동족의 목덜미에 올라탄 그리드의 모습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놀라기는 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품위를 잃지 않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그가 이내 꿈인가보다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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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 이어서
2021년의 마지막 날과 2022년의 첫날까지 독자님들과 보내게 되었네요.
마치 여러분의 연인이자 가족이 된 기분입니다.
세상에 저보다 많은 연인과 가족을 둔 사람은 없겠죠.
정말로 기뽑니다... 너무 행복하네요.
올 한해도 고생 많으셨고,감사했습니다.
내년엔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