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2화
선망과 동경은 닮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킨다.
라인하르트의 대장장이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이유는,단순히 혜택이 많아서일 뿐만 아니라 그리드의 존재 때문이었다.
저 셸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제2의 그리드를 꿈꾸고 있었다.
“대장장이가 레시피에 변형을 주는 건 대개 상황이 나쁘기 때문일세. ”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
그는 그리드가 '제작 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전제로 설명했다.
아이템 오토 제작 시스템을 몰랐던 그리드의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이다.
파그마의 후예는 의외로 만능의 대장장이가 아니었으며, 도리어 시스템의 견제를 받는단 사실을 판미르는 진즉부터 눈치 했다.
“레시피가 요구하는 재료를 제때 수급하지 못했거나,레시피가 요구하는 기술에 실수라는 변주를 줬거나,혹은 환경의 급변에 영향을 받았거나. 대부분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사건들이지.”
Satisfy에서 환경의 급변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당장 누가 근처에서 냉기 마법이나 화염 마법을 썼다고 생각해 보라.
상당히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Satisfy는 인구가 워낙 많고 사건사고도 잦아 의외로 자주 겪는 일이다.
“결손. 레시피에 가해지는 변형은 99.99퍼센트의 확률로 불량품을 낳는다네.”
뻔한 상식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대수롭게 넘기지 못했다.
100퍼센트가 아닌 99.99퍼센트라는 확률에 주목했다.
“그리고 0.01 퍼센트의 확률로 기적이 탄생하지.”
오래 전부터 길드의 지원을 받아온 그리드는 늘 완전한 조건을 갖추고 아이템을 제작해왔다.
제작 중 그가 겪는 변수는 ‘등급의 고하’가 고작이었다.
물론 새로운 레시피를 창조할 때는 온갖 변수를 감내해야 했지만,지금은 ‘레시피에 따라’ 아이템을 제작하는 경우를 논하는 중이다.
“이게 그 기적 중 하나라는 겁니까.”
날이 묘하게 훤 검을 살피는 그리드의 얼굴에 감탄이 스쳤다.
<도안:돌개바람>이 탄생시킨 레전드리 등급의 검.
‘최대’ 유니크 등급으로 제작되는 돌개바람이 레전드리 등급으로 태어났다.
그리드가 아닌 평범한 대장장이의 손에서.
“맞네. 예전부터 종종 있던 일이지. 나를 비롯한 극히 소수의 대장장이는 레시피의 한계를 초월하는 결과물을 얻은 경험이 한 번쯤은 있어.”
판미르가 일부 대장장이에게 ‘레시피에 변화를 줘서’ 작업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유다.
라인하르트엔 대장장이가 너무 많았다.
보급품을 만들 때 쓰는 재료 수급엔 한계가 있는 반면 인력은 남아돈다.
그나마 최근엔 마이너가 제국 도처에서 새로운 광산을 발견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잉여 전력은 존재했다.
판미르는 그들을 활용할 묘안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일부 남아도는 재료,즉 레시피에 맞지 않는 재료를 이용해 아이템을 생산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수천,수만 개의 불량품이 쏟아졌고 그중 극히 일부가 기적적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설마 레전드리 등급의 무기가 만들어질 거라곤 꿈에도 몰랐네.”
본래 레전드리 등급의 무기와 방어구는 그리드만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전드리 등급의 ‘레시피’가 출현한 시점부턴 장인급 대장장이도 가끔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을 생산하기 시작했고,이번 돌개바람은 장인도 아닌 평범한 대장장이가 레전드리 등급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래도 자네가 신화가 된 영향인 듯해. 세계의 전반적인 수준이 오른 게지.”
최고의 대장장이가 전설이 아닌 신화가 된 지금.
다른 대장장이들의 수준도 발맞춰 진화했다고 봐야 옳다.
시대의 흐름,혹은 S.A그룹이 집착하는 밸런스일 것이다.
“…잘 됐군요.”
그리드가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꾸준히 발전해온 대장장이들이 기특했다.
남는 재료와 인력을 활용해서 의외의 결과를 내고 있는 판미르에게 존경심을 느끼기도 했다.
판미르는 칸과 다른 형태의 스승이었다.
칸은 가르쳐주지 못했던 ‘시스템’의 활용 방법을 토대로 많은 깨우침을 줬다.
칸과 판미르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오늘따라 칸이 사무치게 그립다.
쓸쓸한 걸음으로 대장간을 떠나는 그리드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드래곤이 레이단 습격. 원군으로 참전했던 놀과 뱀파이어들,블랙테디의 도움으로 탈출. 그 외 생존자 소식 전무. 궤멸적인 피해예상.
***
“왜 죄 없는 사람들을 해쳤지.”
그리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바르바토스의 시야와 순보를 반복 연계해 스스로를 매 순간 격발시켰다.
도중에 몇 번이고 숨이 턱하고 막히는 고통을 감내했다.
특히 레이단과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마력의 흐름이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초월적인 인내력으로 견뎠다.
워프 게이트는 이용할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에서 레이단으로 연결되는 루트가 삭제돼 있었으니까.
도착하고 보니 납득이 됐다.
레이단의 모든 게 챗더미가 되어 있었다.
성도,워프 게이트도,수많은 저택들과 공업단지,그리고 연금술 시설까지도.
저놈.
은색의 비늘을 두른 드래곤이 자신의 소행이라는 듯이 지낄인 차였다.
‘오만하다. 강하다는 증거겠지.’
다른 네 마리의 드래곤은 어떤 인위적인 방법으로 비늘 색을 감추고 있었다.
반면 크란벨은 아니다.
붉은 비늘을 자랑하듯 무장했던 이프리트와 달았다.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속성,기질 따위를 드러내도 약점이 되지 않다는 듯이.
그리드는 직감했다.
<드래곤 나이트>로 통제할 상대가 아님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인식을,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속도를 넘나들며 매 순간 구역질이 치솟는.
초월적인 인내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극기를 체험하게 되겠지.
심지어 승산도 없다.
솔직히 두려웠다.
하지만.
“됐다. 이유를 들어봤자 네놈들을 내가 어찌 이해할까.”
그리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국의 근원이 되는 땅.
레이단은 그리드의 시작이다.
템빨단을 세운 직후부터 템빨국을 건설하기까지 쭉 근거지로 삼았다.
수많은 인연이,추억이,기반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한데 지도에서 삭제됐다.
이곳을 살아가던 수만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버린 저놈을 두렵다고 외면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을 잃게 되는 격이다.
피해선 안 되는 싸움이었다.
드래곤들의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테니까.
스윽.
그리드가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보이지 않는 은사에 끌려온 검들이 그의 양손에 차례대로 잡혔다.
첫 번째 검은 열망의 무아검이었다.
크란벨의 차가운 눈빛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템빨신 그리드.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자. 나 또한 너를 안다.]
두 번째 검은 염룡검이었다.
크란벨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극광에 영사되는 그리드와 이프리트의 비화를 보면서도.
[너를 위대하다고 추켜세웠던 이프리트의 주장엔 공감할 수 없다만,존중할 의사는 있다.]
촤르륵!!
핏줄이 꿈틀거리는 그리드의 왼손에서.
열망의 무아검과 염룡검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드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만든 두 자루의 검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엮인 것이다.
그리드의 신성을 상징하는 노을빛 극광이 맹렬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합쳐진 검을 매개로 삼아서 기운을 가일층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물러나라. 그럼 해치지 않으마.]
크란벨을 자극하진 못했다.
사막을 달구는 뜨거운 햇살과 겹쳐 거대해진 극광을,그 극광이 진동시키는 대기를,크란벨은 오연하게 마주했다.
촤르륵!
그리드의 오른 손에 세 번째,네번째 검이 쥐어지고 합쳐졌다.
무형검과 구젤의 도였다.
[...]
크란벨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어떤 위협을 느껴서가 아니라 모욕감을 느껴서다.
동족의 유해를 낱낱이 해부해 만든 병기가 한낱 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것이다.
드래곤이라는 종 전체가 욕보인 기분이었다.
“선심 쓰기 전에 사과를 먼저 하는 게 도리 아닌가?”
감히 태양에 도달한 자가 저럴까.
노을빛 신성을 휘장처럼 두른 그리드는 마치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지럽게 산란하는 신성의 기세가 그만큼 맹렬했다.
얼핏 화염과의 일체로 보였으나,크란벨은 관조했다.
저건 무(無)다.
드래곤의 비늘을 부수는 철퇴가 될 수도,드래곤의 비늘을 베는 검이 될 수도 있는.
‘혹은 브레스를 막는 방벽이 될 수도 있겠지.’
구속되는 속성이 없다는 건 무한한 잠재력을 의미하니까.
‘물론 그 잠재력이 온전히 개화할 일은 없을 테지만.’
레베카가 제라툴을 만들 때 모티브로 삼은 존재가 바로 치우다.
제라툴의 속성 또한 무였다.
제라툴의 성정을 고려했을 때,놈은 그 누구보다 템빨신을 경계하고 증오할 터.
크란벨은 장담했다.
템빨신은 단명할 것이다.
그의 성장을 좌시하지 않을 강자들이 세상엔 너무 많았다.
속세에 진정으로 무관심한 군체는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 드래곤이 유일하다.
“너희에게 도리를 바라는 것도 우습...”
[사과하마.]
"...?"
[모든 상황을 떠나서 너를 분노케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용서를 구하고 싶구나.]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재차 사과한 크란벨이 이내 물었다.
[사죄했으니 물러나줄 텐가?]
"..."
[전혀 후련한 표정이 아니군. 인간들이 말하는 도리가 우스운 이유다. 도리는 면죄의 빌미가 되지 못한다. 약자들이 성토할 때나 이용하는 편의에 불과하지.]
“...애초에 도리를 지킨다면 죄를 지을 일도 없어.”
[그런 말은 적어도 죄인 없는 세계를 예시로 제시하면서 지껄여라. 지금의 너는 환상 속에 사는 미치광이로밖에 안 보인다.]
크란벨의 표정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미간이 좁아지고,거대한 두 눈의 끝이 무섭게 치켜졌다.
우주의 단면을 닮은 안광이 일렁이며 차츰 붉게 물들어갔다.
그는 서서히 분노하고 있었다.
존중은 끝이라는 듯이.
[템빨신,패배를 모르므로 신의 죽음에 깃든 무게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여. 스스로를 과신한 끝에 나의 호의를 무시한 네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죽어라. 좌절하고 교훈으로 삼아라.]
패배를 모른다.
그 말이 증명했다.
적어도 크란벨은 인간 시절의 그리드를 몰랐다.
신이 된 이후에도 썩 자세히 관찰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드가 겪어온 수많은 패배를 전혀 몰랐으니까.
신이 된 이후 그리드의 전투 승률은 의외로 낮은 편이다.
다만 인연의 도움을 받아 매번 목숨만은 부지해서 죽은 적이 없을 뿐이었다.
그런 자세한 내막을 모른 채 가르치듯 지껄이는 크란벨의 태도가 그리드는 같잖았다.
“너도 꽤 아플 테니까 각오해.”
냉정은,처음부터 잃었다.
레이단의 상황을 보고도 침착할리 없잖은가.
그리드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을 뿐 머릿속이 분노로 들끓는 상태였다. 이성적이지 않았다.
싸움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이유다.
고작 한 방 먹여주겠다고.
감히 나의 도시를,나의 백성들을 해친 놈에게 잠시나마 후회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템빨신 그리드의 힘을 봉한다.]
“...!”
기수식을 취하던 그리드가 탈력감에 휩싸였다.
완전한 저항에 실패해서,모든 능력치가 2배 하락했다는 알림창을 마주한 채다.
[템빨신 그리드는 내 간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그리드의 몸이 제멋대로 이동했다. 자력에 이끌리듯 크란벨의 근처까지 날아갔다.
갓 핸드들이 그리드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같이 끌려갔다.
용언의 강제력이었다.
플레이어는 절대로 해치지 못하는 생물.
궁극의 초월종 드래곤은 인신의격 따위 무시했다. 입맛대로 주물렸다.
“쿨럭…!”
그리드의 코와 입에서 피가 몇 움큼 쏟아졌다.
몸에서 피를 바가지로 퍼내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많은 피를 흘렸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 일격.
아무리 모든 능력치가 2배 하락했다지만 단 일격에 절반이 넘는 생명력을 잃은 여파다.
그리드의 초점이 한 순간 흐릿해졌다.
잠시뿐이다.
고통의 인내는 익숙하니까.
순식간에 똑바로 초점을 되찾은 그의 시선에 크란벨의 이마가 못 박혔다.
뿔이 솟은 지점이었다.
마침.
쿠와아아아아아앙!!
예상대로 브레스가 날아왔다.
꼬리로 그리드의 심장을 꿰뚫고 높이 들어 올린 크란벨은 이 전투.
아니,학살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리드가 노리던 기회였다.
인공 감각으로 즉시 반응했다.
“회룡낙극살(回龍落極殺).”
그리드는 템빨신의 검무의 융합가능 흿수를 이용했다.
새로운 융합 검무를 실시간으로 창조하여 브레스를 반격했다.
용을 죽이는 심상을 담았다.
지금 이 순간처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온 세월 동안 쌓아올린 모든 힘을 더해서.
___!
온갖 폭음과 충돌음이 불시에 사그라졌다.
두 자루 검이 만드는 소용돌이에 삼켜졌다.
은빛의 브레스가 선회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두 자루 검에 스며들어갔다. 검무의 위력을 몇 곱절로 부풀리며 크란벨의 미간에 꽂혔다.
절대방어는 진즉에 벗겨졌다.
<영웅왕>이자 <드래곤 슬레이어?>의 개세적인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말했지? 아플 거라고.’
다소 커진 크란벨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는 그리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온갖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사막이 반으로 갈라졌다.
드래곤을 지하로 추락시킨 신의 뒷모습이 넋 놓고 있는 네 마리 드래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욕망했다.
비화 <광신광룡>을 재현하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