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1화
예로부터 인류는 별을 각별하게 여겼다. 머나먼 우주에서도 빛나는 모습을 숭상했다.
고절한 인간이 종종 별로 비유되는 이유다.
브라함이 자신을 최고라고 믿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는 별을 떨어뜨리는 존재니까.
고작 별로 비유되는 인간들을 자연히 하찮게 여겼다.
최근 더욱 도드라진 기질이다.
가미긴과 싸우며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재구축한 마법 이론,마리로즈의 변덕으로 되찾은 직계의 힘,급격히 강화 된 마력과 체력,그리드의 호의로 말미암은 무장(武裝)의 진화.
브라함은 역대 최고의 전성기에 돌입했다.
그리드의 등을 지키기에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는 수준으로,드래곤과 무신 같은 규격 외의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상대가 누구라도 대적 가능하다고 믿었다.
조금 전,한층 더 확신했다.
마리로즈의 기척을 느끼고 날아왔다가 마주친 드래곤.
양쪽 날개가 찢겨나간 상태임을 감안해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과거에 트라우카를 만났을 때완 느낌이 전혀 달랐다.
브라함과 감각을 공유하는 대기의 마력이 일제히 외쳤다.
어찌면 승산을 논할 만하다고.
실시간으로 현장에 난입한 세 마리 드래곤의 훼방만 없었다면,브라함은 역사상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노려봤을 수도 있다.
오만이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없다.]
용언이 세운 법칙에 붙들린 브라함은 자신의 계산에 심대한 오류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 같은 드래곤이 아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드래곤의 생리를 모른다.
인간이 우주의 지극히 일부만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브라함은 드래곤에게 큰 흥미를 품지 못했다.
불가해에 집착하느니 마법에 몰두했다.
베리아체의 지식이 유도하는 것 이기도 했다.
브라함은 모친이 자신에게 모든 지식을 물려주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 믿음은 진즉 깨졌어야 옳다.
혈족을 지배하는 저주의 근원을 망각시키지 않았던가.
베리아체는 브라함에게 몇 가지 지식을 주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드래곤과 관련한 지식이다.
브라함에게 드래곤을 완전한 미지로 만들고 마냥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게끔 유도했다.
베리아체가 브라함을 사랑했다는 증거다.
그녀는 자격도 없는 아이가 드래곤에게 어설픈 흥미를 품었다가 허망한 죽음을 당할까 저어했다.
도리어 주제를 모르고 트라우카의 레어에 침입하는 미친 짓을 벌일 거란 사실을,천하의 베리아체도 예측 못했단 뜻이다.
"..."
진실을 눈치 챈 브라함의 얼굴은 창백했다.
염룡 트라우카,악룡 번헬리어,광룡 네바르탄,미식룡 레이더스.
브라함은 성체가 된 드래곤이 모두 그들과 같을 줄 알았다. 개인의 성질에 따라 무력의 우열이 나뉠지언정 격이 다를 거라곤 예상 못했었다.
한데 달랐던 것이다.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색감의 비늘을 두른 저 네 마리 드래곤은 트라우카와 비교가 안 되는 하등품이었다.
어딘가에 도사린 채 지금 막 용언을 전개한 또 다른 드래곤의 존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차원이 다르다.
‘죽는다.’
이 자리의 모두가 곧,소멸한다.
추측 따위가 아닌 직감이었다.
수십 만,수백 만 갈래로 흐르는 대기의 마나 하나하나를 감각으로 삼는 브라함의 계산은 터무니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기까지 찰나였다.
‘외통수로군.’
브라함은 지공이기에 앞서서 마법사다. 매 행동마다 무수히 많은 대비책을 마련하고 최악을 피해야 옳았다.
한데 그러지 못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한 브라함이 제논에게 시선을 돌렸다.
습격을 당하고 채 1분조차 지나지 않았건만,비늘 곳곳이 뜯겨나간 상태였다.
본능에 가까운 마법으로 위장했던 색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제논의 비늘이 흐린 하늘처럼 회색임을 알게 됐다.
“다시 말하지.”
브라함에게 트라우카를 상기시킨 존재.
드래곤의 위계를 모르는 입장에선 고룡이라고 착각하는 게 당연한 상위룡의 출현.
그를 인지하고 굳어 있던 드래곤들의 청각에 브라함의 터무니없는 육성이 스며들었다.
“네 심장을 내낙라. 그 방법 외엔 희망이 없다.”
브라함은 분명히 제논에게 말했다.
하지만 반응하는 건 제논의 목덜미에 이빨을 쑤셔 넣었던 드래곤이다.
[너는... 잠자코 있어라.]
3천 년을 생존한 회색룡 바스크.
그는 장장 5백 년 동안 수면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한 번.
단 한 번만 더 포식의 기회를 얻으면 상위의 위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레어를 중심으로 대륙 중앙에 뻗치는 마법 감각을 연성한 그는 동족의 동향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긴 지루함을 견뎌냈다.
그리고 커다란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다.
첫 번째는 석상룡이다.
광룡에게 상처를 입고 약해진 그를 추적하는 중에 결사들의 눈속임에 속아 번헨 열도와 멀어졌었다.
결사들의 위장술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쯤 되니까 여태껏 탑의 위치를 들키지 않은 거겠지.
두 번째는 화룡이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이프리트는 분명히 약해져 있었다. 그녀를 노렸다간 자칫 고통과 마주칠 확률이 높았지만 일단 뒤쫓고 보았다.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과실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녀의 목적지를 눈치 채고 선회하고 말았다. 곧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트라우카가 더 강해지지 않은 걸 위안으로 삼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기회가 도래했다.
앞선 기회들보다 오히려 상황이 좋았다.
하위룡은 고룡의 시선을 끌기엔 위계가 너무 낮았다. 최근 소멸한 이프리트 탓에 상위룡들이 조심스러워진 상태이기도 했다.
어쩌면 의외로 쉽게 포식할 기회라고 여겼다.
마리로즈가 필요 이상으로 설친 탓에 소란이 커져 경쟁자가 둘이 나 따라붙긴 했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였다.
흐름이 좋았다.
드디어 오늘 염원을 이룰 거라고 보았다.
조금 전.
한 순간 드러난 목단롱의 기척을 느끼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존재를 알게 된 것만 해도 운이 좋은 상황이다. 목단룡을 상대로 기습에 방비할 수 있다는 게 고무적이니.’
안력이 미치지 않아서 목단(目斷)이다. 본래 목단룡은 쉽게 인식할 수가 없다.
마력으로 음영을 만들어서 시야를 차단하는 수법을 즐겨 쓰기 때문인데 마나의 운용법이 굉장히 신묘했다.
굴절룡의 자식인지 혹은 목단룡 본인이 굴절룡인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굴절룡이 실존한단 사실을 그 누구도 입증하지 못했으니까.
'우선 제논을 살려둬야 한다.’
바스크는 중위룡이지만 상위 위계에 가깝다. 여기에 하위룡 셋이 협력하면 제아무리 상위룡이라도 홀로 감당하기 난처해진다.
필승을 논할지언정 시간이 끌리기 때문이다.
엄청난 소란을 감수해야만 했고,그래서야 목단룡 자신도 피식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었다.
아마 목단룡은 제논을 먹고 진화하는 대상을 최우선 표적으로 삼을 공산이 컸다.
효율적으로 힘을 취한 뒤에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거나,여의치 않으면 그대로 물러날 심산일 터였다.
제논을 죽이지 않고 도리어 보호해야 할 이유다.
[힘을 합치는 편이 낫겠다.]
바스크가 말했다. 딱히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드래곤의 머리엔 우주가 담겼다. 삼라만상을 자연히 꿰뚫어본다.
개체별 성격에 따라서 지식을 활용하지 않는 드래곤은 종종 있어도 상황 이해가 느린 드래곤은 광룡이 유일할 것이다.
[제논,힘을 회복해라.]
다른 두 하위룡이 바스크의 제안에 동의했다. 제논을 호위하듯 서는 태도가 증거였다.
제논이 욕설을 삼켰다.
'오늘 겪은 수모를 앞으로 몇 번이나 악몽으로 꿀까.’
도와줄 것처럼 굴다가 떠난 결사들.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었다가 도리어 손을 내미는 동족들.
어느 쪽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끌려 다니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그놈을 짐으로 달고 있느니 죽이는 편이 낫지 않나? 드래곤의 생리를 모르니 함부로 의견을 내기가 어렵군. 쯧.”
뱀파이어들이다.
날개를 찢어놓고 유유자적 사라진 마리로즈와 자꾸 심장을 내놓으라고 지껄이는 브라함.
같은 핏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생물들이 아닐까 싶었다.
[브라함 너는... 계속 잠자코 있어라.]
드래곤이 동족을 포식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다. 살아남기 위해선 강해져야만 했고,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동족포식일뿐이다.
고룡들이 알려주고 정착시킨 야만적인 문화였다.
패도적인 염통이나 광룡이 아닌 이상에야 포식이 생존보다 우선시 될 순 없는 것이다.
바스크는 살고 싶었다. 제논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협력하고 싶었다.
자꾸 초를 치려고 드는 브라함이 제발 닥쳐주길 바랐다.
브라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귀밑으로 늘어진 은발이 아름답게 물결쳤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속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브라함이 흥미를 품었다.
“드래곤은 인계에 관심이 있는건가? 한데 굳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단순히 동족포식이 두려워서 조심한다고 보기엔 과한데.
[...]
“세상이 워낙 넓지 않은가. 불과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북쪽 땅의 소식이 남녘에 닿기까지 족히 서너 달이 걸리곤 했다.
어디까지나 범인들의 기준이긴 하지만,너희들이라고 해서 대륙 전역을 항시 감시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설마 드래곤이 대륙 어디에나 존재하는 흔한 생물일 리는 없을 테고... 혹시 제약이 있나? 어떤 형태의 제약이지?”
드래곤을 파악할 기회다. 두 번 다신 얻기 힘든 기회일 수도 있기에 브라함은 무척 적극적이었다.
드물게 말이 빨랐다.
저놈을 닥치게 하려면 용언을 써야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바스크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크게 불리한 상황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조력자가 필요했다.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고 대충 어울려줬다.
[우리는 우리 외의 존재에게 별 관심이 없다. 다만 네가 유명할 뿐이다.]
“내가... 드래곤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뭐,이유야 짐작되는군.”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브라함의 눈가가 경련했다.
드래곤.
마법의 종주가 관심을 보일 정도로 뛰어난 자신의 마법 실력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과 별개로 미소가 지어지려고 했다.
이제 같은 편이 된 바스크와 드래곤들은 그에게 관심을 거뒀다.
시야의 한쪽에 검게 드리운 음영에 집중하기 바빴다.
[크란벨,여기선 다 같이 물러나는 게 좋지 않나. 비긴 걸로 하자.]
바스크의 제안에 목단룡 크란벨이 답했다.
[스스로를 과신하는구나.]
4마리 드래곤과 브라함의 눈동자가 동시에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목단룡으로 추정되는 음영의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브라함은 이질감을 느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브라함과 감각을 공유하는 대기의 마나가 침묵하고 있다. 저 음영을 구성하는 마력의 짜임새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실로 놀라웠다.
브라함은 목단룡의 용언을 떠올렸다.
이곳에선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즉,홀로 이곳의 모두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설령 적들이 협력할 수도 있다는 변수를 감안하고도 내비친 자신감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역시 전멸인가.’
브라함은 상위룡과 고룡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에겐 트라우카나 목단롱이나 모두 항거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공격에 곧 죽게 될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와 동시였다.
콰아아아아앙!!
브라함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음영은 일행이 지켜보고 있는 지점에 여전히 고정되어 있건만,바로 곁에서 행렬한 공격이 날아왔다.
은빛 비늘로 뒤덮인 꼬리였다. 바스크의 두꺼운 허리가 움푹 들어갔다. 드래곤의 늑골이 몇 갠지는 모르겠으나,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부러진 듯했다.
바스크는 신속하게 반응했다.
충격의 역방향으로 꺾인 긴 목을 비틀어 올렸다. 이마에 달린 뿔로 허공을 찔렀다.
동시에 브레스도 쏘았다.
꼬리가 날아온 방향을 토대로 목단룡의 위치를 특정한 눈친데,회색 브레스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듯 새겨졌다.
개세적인 위력이다. 거대한 기둥같았다. 주변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기둥에 태양이 가려진 여파였다.
바스크의 표정이 굳었다.
반격에 실패했다. 목단룡이 응당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일방적인 피해만 입은 것인데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순식간에 불리해졌다.
‘동귀어진을 빌미로 물러나게 만드는 게 유일한 방법인가.’
브레스를 남발하면 결국 누군가 새롭게 현장에 난입하게 되어있다.
그때 생길 변수에 걸어야한다.
목단롱은 누구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였지만,정작 상성이 나쁜 적이 나타나면 목단룡의 태도도 바뀔 것이다.
[저항은 무의미하...?]
사방팔방에서 울려 퍼지던 목단룡의 음성이 도중에 뚝 끊겼다.
“땅굴룡이라는 이름이 어울리겠다."
브라함의 홍옥 같은 눈동자가 목단룡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스퀘이크로 무너뜨린 지면의 틈새로부터다.
“쥐새끼라고 불려도 나쁘지 않을 듯하고.”
내내 침묵하던 대기의 마나가 목단룡의 꼬리가 나타난 순간 반응했었다.
브라함은 거기서 눈치 했다.
목단룡이 마나에 음영을 드리우는 건 사실이지만,그것이 꼭 은신의 수단은 아님을.
목단룡은 자신의 정교한 마나 운용 능력을 이용해서 지하를 유영했다.
지상의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끔,작은 진동조차 없이 땅굴을 파고 다니며 적을 교란시켰다.
상리에 어긋났다. 브라함도 저런 식으로 마나를 운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필시 대단하다. 다만 폼이 안나서 문제지.
[...닥쳐라.]
땅굴룡 아니,목단룡 크란벨이 땅 위로 튀어나왔다.
바스크나 제논과 비교해서 족히 1.5배는 더 거대했다. 작은 움직임만으로 온갖 파급력을 일으켰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토하면 그게 곧 브레스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쯤 되자 바스크도 실감했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크란벨이 품은 힘은 바스크의 상정을 초월했다.
모습을 드러내자 비로소 깨닫게 되는 힘이었다.
바스크와 드래곤들은 억지로 개안했다.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이다. 네놈들 전부 이 도시처럼 가루로 만들어주마.]
발에 닿는 건물의 잔재를 느끼며 한 말이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크란벨은 단지 적들을 위협하는 용도로 무너진 도시를 언급했을 뿐이다.
타이밍이 나빴다.
“너냐.”
막 현장에 도착한 그리드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크란벨을 노려봤다.
“왜 죄 없는 사람들을 해쳤지?"
뜨거운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삭풍이 휘몰아쳤다.
제 발로 사지에 뛰어든 그리드를 브라함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가운데 드래곤들이 경악했다.
그리드가 품고 있는 화룡의 잔재가 드래곤들의 마력과 공명하며 그들에게 어떤 장면을 보여줬기때문이다.
극광처럼 번지는 신성에 이프리트에 올라탔던 그리드의 모습이 영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