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21화
“다시 갑시다.”
요란하게 점멸하는 드래곤 레이더를 명하니 응시하던 비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호흡할 때마다 투명하게 산란하는 기파가 칼날의 형상을 갖추길 반복했다.
수천 자루의 무형검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오의를 발출할 기세다.
“자랑은 아니지만,사실 나는 브라함과 안면이 있소. 그자도 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할 게요.”
“새삼 고백하지 않아도 잘 안다. 그대가 청소 당번을 독점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브라함은 탑의 존재를 어럼풋이나마 눈치 채고 있을지 모르오. 군자답게 영리하고 입이 무거워 발설하지 않을 뿐.”
“브라함이 군자는 아니죠.”
“확실히,그쯤 되는 마법사는 필시 광인에 가까울 겁니다.”
“출신 성분부터가 불길하다. 흡혈귀지 않나. 그리드 덕분에 흡혈귀의 성향이 크게 바뀌었다지만 음습한 본질이 어디 갈까.”
"..."
네 마리 드래곤의 출현.
긴박한 상황 탓인지 결사들의 분위기가 몸시 요란했다. 봄에 달뜬 숫총각의 마음보다 가벼운 느낌으로,거의 마구잡이로 떠들어댔다.
비반의 말이 자꾸 끊길 정도여서,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비반의 눈살이 다소 찌푸려졌다.
“나를 한 번 믿어보시오. 아니,그리드를 믿어보시오. 설령 브라함이 우리를 보고 탑의 존재를 확신하게 될지언정 그리드가 입단속을 단단히 시킬 게요.”
“그럴 이유가 없다.”
비반의 확신에 찬 의견을 라드볼프가 간단히 묵살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설 사안이 아니야.”
제시카가 근거를 첨언했다.
“우리가 전원 나선다고 해서 제논을 구출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문제예요.”
무려 셋의 드래곤이 현장에 난입했다. 지금쯤 제논을 완벽하게 포위했을 것이다.
상위룡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피의 여왕을 만나 허망하게 양쪽 날개를 잃은 제논의 수급을 취할 전력으론 충분하고도 남았다.
결사들이 어떤 수를 써보기도 전에 제논은 잡아먹힐 신세였다.
“자칫 새로운 상위룡이 태어나는 현장이 되겠죠. 이를 다른 드래곤이 좌시할 리 없고요.”
“지금쯤 현장을 주목하는 시선이 무척 많을 거다. 우리가 놈들을 탐지하는 기술을 갖췄다는 사실을 알고 기척을 감춘 채로.”
첨언에 첨언이 붙는다.
비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결사들이 들이는 공이 엄청 컸다.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었지만 비반의 오성을 감안하면 꼭 치러야할 과정이었다.
“셋이 전부가 아니라니? 그럴리가? 그리 많은 드래곤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도 있소?
놈들은 서로가 서로를 가장 경계하는데단체 활동을 한다고?”
“장소와 자극의 역치가 문제입니다.”
설명이 결사들의 예상보다 길어졌다.
“레이단은 과거 베리아체가 터를 잡았던 지역이다. 그 지하엔 여전히 뱀파이어들의 도시가 묻혀있지.
지리학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는 반증이고 실제로 수많은 공허와 맞닿아 있을 확률이 높다."
공허.
결사들이 '식별 불가의 장소’ 즉, 드래곤 레어를 지칭할 때 종종 사용하는 은어다.
“게다가 피의 여왕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비록 하위룡이라도 단 몇 수만에 제압했으니 경천동지할 사건입니다.”
마리로즈가 제논의 양쪽 날개를 잡아 뜯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3분 남짓이다.
그녀의 무력이 역사에 남은 흔적과 세간의 추측을 명백히 초월한다는 의미다.
그녀가 짊어진 저주가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레이단엔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요.”
“용들의 잔칫상이다. 우리가 찾아가 봤자 제 발로 차려지는 진미에 불과해. 천 년을 공들인 탑이 즉시 무너질 거다.”
이런 빌어먹을. 그걸 왜 이제야 말하오? 진즉 알았으면 아까 무리해서라도 제논을 데려왔을텐데.”
제논은 하위룡이다.
게다가 용언의 연속 전개와 날개의 상실 탓에 크게 약해진 상태였다.
결사들이 목숨 줄을 거머쥐고 뜻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한 수준이었다.
신변 확보에 성공했다면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았을 텐데 실패하고 말았으니 속이 쓰렸다.
“그래서,잠자코 지켜볼 건가?”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던 켄이 끼어들었다.
그는 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다.
특히 침투경의 달인으로,드래곤의 절대방어와 두꺼운 비늘을 무시하고 내부에 손쉽게 충격을 전파시켰다. 그의 권과 각이 드래곤 하트에 꽂히면 상위룡도 잠시나마 주춤할 정도였다.
자신 있는 무력을 써보지도 못하고 상황을 좌시해야한다는 사실이 그는 영 달갑지 않았다.
하야테가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아직 기회는 있소.”
비반과 켄의 귀가 쫑긋 섰다. 반면 다른 결사들의 표정은 썩 편치 못했다.
하야테가 말하는 기회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 * *
“함정에 된통 걸렸군.”
잠시 굳어있던 브라함이 한 발 늦게 입을 열었다. 고운 얼굴에 떠오른 짜증이 인상을 날카롭게 벼렸는데 매우 잘 어울렸다.원래 저런 낯짝인 듯했다.
“이 몸을 유인하기 위해 드래곤을 반병신으로 만드는 소란을 일으키다니...
과연 마리로즈...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님께 물려받은 솜씨만큼은 인정해야겠다.”
크롸라라라라!!
고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법으로 거리를 추적해 보니 무려 성층권 끝자락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육성에 깃든 힘이 기적에 가깝단 뜻이다.
드래곤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생물인지 새삼 실감됐다.
드래곤을 이용해서 함정을 판 마리로즈의 사악하고 현묘한 계략은 더욱 대단하게 다가왔고.
[자의식이 몸시 강하다 싶더니,너 역시 베리아체의 자식이었구나.]
제논이 무덤덤하게 지껄였다.
그는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동족들의 육성에 실려 온 마나가 주술로 변모해 펼친 걸계가 이중,삼중으로 덧씌워진 탓에 공간이 봉쇄 된 까닭이다.
탈출할 시간이 부족하다.
이제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저 세 놈 중 과연 어떤 놈이 나를 포식하게 될까.
제논에게 남은 마지막 호기심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천한 것이 어머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덜 괴롭게 죽고자 즉사를 바라고 도발하는 건가? 아서라. 나는 네놈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울상 짓게 될 네놈의 최후를 감상하는 걸 내 생의 마지막 낙으로 삼을거니까.]
브라함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드래곤이 그를 알고 있었다.
염룡 트라우카의 레어를 발견하고 숨어들어 보물을 홈쳐 나온 놈.
트라우카의 레어를 탐지한 것도,레어에 숨어든 것도,보물을 훔친 것도.
하나 같이 광기였다.
트라우카의 레어를 털고도 살아남은 걸 보아 직계 중 마리로즈 다음가는 실력자가 아닐까 싶었는데,실력과 무관하게 상종해선 안 될 부류에 속했다.
“천것이 품기엔 너무 과한 꿈이군.”
브라함의 반응은 과연 괴이했다.
자신의 목숨 따위를 매우 가치있게 생각하는 눈치다.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생물을 천하다고 업신여기는 태도부터가 납득이 안됐다.
단순히 주제를 모른다는 수준으로 규정하기 힘들 정도.
‘말을 섞지 말자.’
제논은 브라함의 투정을 한 귀로 흘리기로 결정했다.
그래,투정.
브라함이 어떤 말을 하든 그에겐 투정으로밖에 안 들렸다.
당연하다.
제 발로 사지에 뛰어든 놈이다.
원가에 홀려서 최소 셋 이상의 드래곤에게 스스로 표적이 됐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수백 회 연달아 얻어맞는 확률에 당첨 된 꼴이다.
저런 재수 없는 놈이 투정을 부리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겠나.
‘녹색,청색,회색...’
연신 중얼거리는 브라함을 무시한 제논이 다가오는 추격자들의 정체를 가늠했다.
위계는 전원 자신과 같았다.
상위룡의 자식들.
둘은 막 성체가 됐고, 한 놈은 그나마 3천 년쯤 산 듯하다.
가장 노회한 놈이 하필 회색이라는 점이 티끌만 한 희망조차 품지 못하게 만들었다.
회색.
종이 다른 드래곤이 교배했을 때 낳는 혼종이다.
제논과 같은 그들은 다른 순수 개체들과 비교해서 손색이 있다.
특학 된 속성이 없어서 브레스의 위력이 특히 떨어졌다.
그 사실을 스스로 잘 알기에 신중한 것이다.
회색룡이 3천 년쯤 생존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고 극복하며 온갖 지혜를 쌓았거나 운좋게 부모를 포식했다는 뜻이 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속성을 개화했을 확률이 높아 사실상 상위룡이 되기 직전의 단계라고 봐야 옳았다. 머잡아 제2의 석상룡이 될 수도 있었다.
‘저런 놈은 결코 방심하는 법이 없지.’
제논의 생각이 옳다고 증명하기라도 하듯.
번쩍!
하늘 끝에서 거대한 별이 빛났다.
유성처럼 떨어졌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을 터뜨리며 점차 가까워지는 그것의 정체는 회색의 빛줄기.
회색룡의 브레스였다.
놈은 속전속결을 노리고 있었다. 이곳에 많은 이목이 쏠릴 거란 사실을 알았다.
다른 두 놈도 한 발 늦게나마 눈치 챈 듯하다.
2개의 브레스가 꼬리를 물고 떨어졌다.
‘여기서 저항해봤자 고통만 커진다.’
제논은 진즉부터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눈을 감았다.
그때야 비로소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기도라도 올리나?”
여태껏 한 귀로 흘렸던 브라함의 음성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어떤 확신에 차있었다.
[...!!]
감았던 눈을 다시 뜬 제논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삼중으로 덧씌워졌던 결계의 일각이 무너져 있는 광경을 목격한 까닭이다.
파괴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계의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고 해체한 느낌에 가까웠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제논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제논 또한 이 삼중의 결계를 해부했을 것이다.
드래곤은 마법의 종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속도였다.
드래곤도 아닌 한낱 뱀파이어에 불과한 브라함이 결계를 무력화시킨 속도는 제논의 계산보다 2배 이상 빨랐다.
[마리로즈가 계승한 지식은...잔재에 불과했구나?]
태초의 3악.
태초신,고룡들과 비교해서 고작 한 발 늦은 시기에 태어난 그들의 지식은 바다보다 깊고 넓다.
그것을 온전하게 활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지식적 잠재력만 놓고 보면 어지간한 드래곤을 초월한다는 의미다.
눈앞의 존재가 그랬다.
브라함을 바라보는 제논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점차 불신을 지우고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3개의 브레스가 반파 된 결계를 완전히 박살내며 현장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브라함과 제논은 현장과 크게 벗어난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포털을 열 시간은 없어도 단거리 텔레포트를 쓸 시간은 충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의 여파를 완전히 피하진 못했지만,아슬아슬하게 중상은 면했다.
“내놔라.”
산산조각 난 마나 실드를 다시 두른 브라함이 제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핏줄을 속일 순 없는 걸까. 피칠갑을 하고도 아름다운 손이다.
“네놈의 심장.”
브라함은 제논의 마법 발동 속도가 자신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놈이 단순히 날개를 잃은 수준을 넘어서 깊은 내상을 입고 있음을 확신했다.
“내가 네놈보다 잘 써주마.”
처음부터,브라함은 제논의 아군 따위가 아니었다.
“허망하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너를 사지로 몰아넣은 원수를 저승길 동무로 삼는 편이 낫지 않겠나.”
브라함은 제논의 기분과 안위따위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효율을 논할 뿐이었다.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네가 놈의 심장을 얻는다고 해서 드래곤과 대적하는 게 가능하리라 보느냐?]
마침 현장에 도착한 세 마리의 드래곤이 콧방귀 뀌었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적대하는 경쟁자였지만,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공통되게 브라함을 괘씸하게 여겼다.
브라함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네놈들과 대적할 거라고 말한 적 없는데.”
[...?]
제논이 가장 크게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원수와 함께 죽을 기회라고 설득하던 자가 곧장 말을 바꾸는 것이다.
태세 전환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빨랐다.
브라함이 설명을 덧붙였다.
“마리로즈의 목을 따주겠다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어디까지나 그 계집 아니더냐?”
[...]
옳은 말이긴 했다.
하지만 제논은 왠지 마음이 답답하고 씁쓸했다.
먼저 손을 내밀어놓고 저들끼리 도망친 결사들의 뒷모습을 봤을 때부터 불편했던 심사가 더욱 뒤틀렸다.
어색한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제논의 고민과 별개로,드래곤들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논을 습격했다. 브라함은 완전히 무시했다. 거의 벌레 취급이었다.
‘역시 안 되나.’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쉬움에 혀를 찬 브라함이 현장을 떠나기 위해서 포탈을 열었다.
그때였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선고.
근거 따위 없음에도,그것은 강력한 법칙을 세웠다.
브라함의 포탈을 강제로 닫아버렸다.
"..."
브라함이 입을 다물었다.
등골이 오싹해진 그는 잊고 있던 악몽을 떠올렸다.
염룡 트라우카.
모든 상식과 지식을 무용하게 만들었던 놈의 압도적인 힘을 상기했다.
이 근처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존재.
하지만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는 그 존재가 강제로 상기시키는 기억이었다.
‘죽는다.’
자신을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가 곧,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