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20화
지성은 선함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한낱 곤충보다 영리한 생물일수록 더욱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마련이었다.
인간을 생각하면 쉽다.
[구젤인가?]
[아니,놈의 아들이군.]
[군침을 흘리는 자들이 많겠어.]
드래곤.
궁극의 초월종인 그들은 필시 위대했다.
지혜와 무력 양면에서 다른 모든 종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세계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포악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먹고,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이 흔한 그들이 서로 협력하여 큰일을 도모한다는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드래곤이란 어디까지나 각자 존재하는 생물이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자기자신뿐이었다.
꽈아아아아앙…!!
태양이 지상에 떨어진 듯하다.
과장을 조금 많이 보태면 퀘이사가 연상됐다.
마리로즈가 일으킨 혈류의 파도와 제논이 쏜 브레스의 충돌이 발생시킨 에너지가 주변의 모든 물질을 집어삼키며 거대 도시 레이단을 침식시켰다.
‘위험하다.’
제논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동시에 대류권까지 떠오른 그의 시선이 멀리 동쪽으로 향했다.
자신의 레어가 있는 방향이다.
태어나 성체가 되기까지.
장장 천 년 이상의 세월을 들여 쌓아올린 보금자리다.
심지어 성체가 된 이후에도,잠들어있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순간을 제논은 레어의 건설에 투자했다.
보다 튼튼하고 은밀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건 제논이 유독 신중해서가 아니라 드래곤의 습성이었다.
성체가 되고도 수천 년이 지나 충분한 힘을 쌓기 전까지,드래곤의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은 레어에 틀어박히는 것이었으니까.
“괘씸하구나.”
제논의 거대한 대가리 앞으로 작은 인영이 떠올랐다.
장막처럼 펼친 붉은 피로 하늘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면서다.
뒤쫓아 온 마리로즈였다.
제논이 산이라면 고작 점에 불과한 크기.
마리로즈는 제논과 비교해서 몹시 작았다.
하지만 제논은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시선에 닿는 모든 면이 붉게 물든 세상.
이곳은 이미 마리로즈의 영역이었다.
“내 낭군의 도시를 먼지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니. 너는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단다.”
[이 지경까지 온 건 네 탓이다.]
“물론 나 또한 벌을 받을 생각이란다. 낭군이 원한다면.”
[이 요마가…]
그윽한 눈길로 얼굴에 홍조를 띄우는 마리로즈의 모습이 제논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저 정신 나간 존재에게 낭군이라고 불리는 누군가를 가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죗값으로 날개 하나를 놓고 가럼.”
마리로즈는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제논이 괘씹하긴 했지만 굳이 목숨을 취하려고 무리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소란을 듣고 잠시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벌써 한계였다.
베리아체로부터 계승한 나태의 저주가 그녀의 몸과 사고를 다시 좀먹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네게도 좋을 일은 없을텐데? 적당히 하고 비켜라.]
마리로즈 본인은 이성적이라고 믿는 판단에 제논은 공감하지 못했다. 과한 욕심으로 여겼다.
당연하다.
다른 드래곤에게 쫓기게 생긴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시간이 촉박한 입장이었다.
제논은 마리로즈가 곧 잠들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억지에 굳이 어울릴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으르렁거리는 제논을 바라보는 마리로즈의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긴 속눈썹이 내려앉는 광경이 꼭 붓이 움직이는 듯했다. 크고 짙은 눈동자를 그린 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회색. 잡종답게 수준이 낮네.”
사실은 심미안을 충족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그런 의문을 품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마리로즈는 독설을 퍼붓는 모습마저도 잘 어울렸다.
모멸.
어린 시선이 제논에게 여태껏 몰랐던 형태의 자극을 줬다.
앞서 미리 용언을 써두지 않았다면,그는 이 순간 마리로즈에게 현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잘린 날개쯤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랄 텐데,헛된 자존심 때문에 명을 재촉하는구나.”
콰드드득!!
하늘을 가린 피의 장막.
마리로즈의 영역이 변학를 일으켰다. 소용돌이를 그리며 제논의 시야와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드래곤의 정신 방어가 관통 당했다는 의미다.
경악한 제논이 급히 마법을 써서 사념을 정화했다.
피의 장막은 두 번째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곳곳이 부풀어 오르더니 수만 개의 송곳이 튀어나와 영역의 중심에 있는 제논을 불시에 꿰뚫었다.
까가가가가가가강!!
붉은 송곳이 제논의 비늘에 닿을 때마다 불똥이 튀어 올랐다.
절대방어의 위용이 드러났다.
수만 개의 송곳 중 단 하나도 제논의 비늘을 꿰뚫지 못했다. 도리어 불똥에 녹아 한 줌의 피가 되어 흘러내렸다.
하지만 제논은 안도하지 못했다.
송곳이 녹아 만든 거대한 피 웅덩이.
허벅지까지 차오른 그 깊은 늪을 경계했다.
[피는,나를 해치지 못한다.]
쥐어짜듯이 용언을 외치는 제논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피’라는 물질 자체를 면역 대상으로 지정한 여파다.
마리로즈라는 ‘특정 개체의 피’를 거부했을 때완 비교가 안 되는 후폭풍을 겪었다.
대신 효과는 탁월했다.
꽈아아아아앙!!
제논의 허벅지까지 차오른 채 꿈틀거리던 피의 웅덩이가 사방팔방으로 흘어져버렸다.
제논은 해방감을 느꼈다.
지금이 탈출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마리로즈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기 전까진.
“단순하구나.”
마리로즈의 머릿속엔 베리아체의 잔재가 부유한다.
태초의 3악이 쌓아올린 지식과 경험들 말이다.
“어머니의 이론이 맞았어.”
편의성은 사고를 단순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용언은 독이다.
용언에 의지하는 드래곤은 반드시 퇴행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베리아체의 예측은 정확히 옳았다.
제논.
회색 비늘을 달고 태어나 위계가 낮은 어린 용은 과도하게 용언에 의지하고 말았다.
의미 없는 눈속임에 속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마(魔).
마리로즈가 베리아체로부터 계승한 혈(血)만큼 강대한 그 힘에 양쪽 날개를 붙잡히고,뜯겨졌다.
[크아아악...!]
마기에 붙들린 순간 일시적으로 무너진 절대방어를 느낀 제논이 뒤늦게 깨달았다.
태초의 3악.
그들의 본질적인 힘은 당연히 마기다.
한데 그 기본을 간과하고 피에 너무 집착하고 말았다.
마리로즈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요란하게 피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인데,수 싸움에서 완전히 밀렸다고 봐야 옳았다.
“그럼 안녕.”
이쯤하면 충분한 벌을 내렸다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든 마리로즈는 정말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땅을 흥건히 적신 제논의 피를 매개로 삼아 이동하여 지하로 꺼져 버렸다.
제논은 그녀에게 브레스를 쏘지 못했다.
지금쯤 자신을 추격해오고 있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위치를 재차 알려주는 셈이 될 테니까.
한쪽 날개를 지키려다가 양쪽 날개를 모조리 잃어버린 자신의 선택과 무능을 원망하며
마법을 전개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서 떠나야한다.’
파지직!
제논의 눈앞에 포탈이 열렸다.
당연히 레어가 아닌 다른 장소를 좌표로 삼았다.
레어의 좌표를 역추적 당했다간 그때야말로 끝장이니까.
앞으로 한동안.
최소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동안 포탈을 통한 추격전을 벌여야할 것이다.
그 끝에 도사리는 건 생환보다 죽음일 확률이 높지만... 날개를 잃은 제논의 선택지는 이외에 없었다.
‘잠시만이라도 추격을 따돌려서 동대륙으로 피신하면 생존할 가능성이 없진 않...?’
포탈에 몸을 날리려던 제논이 흠칫 놀라서 뒷걸음쳤다.
서걱!
거의 동시에 포탈이 반으로 갈라져 쪼개졌다.
제논은 포탈을 벤 검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아버지의 유해로 만든 검이었다.
[네놈은...?!]
제논이 크게 당황했다.
막 잠에서 깨어난 그가 느꼈던 아버지의 기척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인간들이 말하는 템빨제국의 황도,라인하르트가 있는 방향이다.
한데 눈앞에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기척이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그 정체는 <구젤의 검>.
검성 비반의 손에 쥐어진 신검이었다.
“현 시간부로 당신의 신변은 지혜의 탑이 확보하겠소.”
무엇이든 베는 검.
공간을 왜곡시키는 포탈을 베어 제논의 활로를 끊어버린 비반이 말했다. 명령에 가까웠다.
한낱 인간이... 드래곤에게 명령을?
황당하고 불쾌하게 여기기엔 탑의 이름이 갖는 무게가 너무 컸다.
제논의 떨리는 시선이 비반의 등 뒤에 못 박혔다.
종의 한계를 초월하는 품격을 갖춘 사내.
용살자 하야테가 조용히 제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동족에게 포식 당하느니 탑에 올라 스스로를 변호 할 기회라도 얻는 편이 나을 게요.”
망설이는 제논을 2좌 프론잘츠가 설득했다.
지혜의 탑의 목적은 드래곤이 일으킬 재해를 억제하는 것.
제논과 드래곤의 추격전이 대륙 곳곳을 초토화시키는 상황을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어떤 드래곤이 제논을 먹고 진화하는 사태도 방지하고 싶었다.
“시간이 없다.”
드래곤 레이더를 확인한 라드볼프가 재차 제논을 재촉했고.
[...알겠다.]
제논은 저항을 포기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일단 결사들을 쫓아가 기회를 엿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뜻과 다르게 흘러갔다.
파지직!
“...!?”
[...!!]
갑자기 현장에 새로운 포탈이 열렸다.
누군가가 이곳의 위치를 특정하고 넘어오려 하는 흔적이었다.
“흠!”
비반의 검이 포탈을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다만 문제는.
파지직!
포탈이 베이자마자 다시 열렸다는 점이다.
심지어 4개가 동시에 열렸다.
위치도 제각각 달랐다.
조금 전 베인 포탈의 위치를 중심으로 사방위에 생성됐다.
“끈질긴...”
혀를 찬 비반이 검으로 만월을 그렸다.
사방위에 생성 된 포탈을 시간차 없이 베어서 소멸시켰다.
그러자.
파지직!!
이번엔 32개의 포탈이 열렸다.
방금 소멸한 4개의 포탈을 각자 중심에 두고 팔방위로 열렸는데 몹시 쾌속하고 정확했다.
“대체 어떤 놈이 자꾸 훼방을...!”
급기야 비반이 무쌍검법을 전개했다.
새로 생긴 포탈마저 모조리 베어버린 뒤 동료들을 눈짓으로 재촉했다.
어서 제논을 탑으로 전송시키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드래곤을 전송할 때 필요한 마력과 인간을 전송할 때 필요한 마력의 요구치는 차원이 다르다.
제시카와 프론잘츠가 협력하는 주술이 완성되기도 전에 64개의 포탈이 추가로 열렸다.
이번엔 포탈에서 음성까지 들려왔다.
64개의 포탈을 동시에 연 것만 해도 기함할 만한 사건인데,포탈마다 음성 전송 마법까지 융합시킨 것이다.
“놓치지 않는다.”
“...!”
사방팔방에서 울리는 음성에 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목소리의 정체를 파악한 탓이다.
브라함 에슈발트.
템빨신의 사도이자 전설의 대마법사.
그리고 베리아체의 직계.
속세를 관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주목했던 인물 중 하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이런 빌어먹을?”
하필 그리드의 부하에게 방해를 받다니?
당황하는 비반에게 제시카가 말했다.
“상대가 나빠요. 이래서는 결국 저자가 먼저 현장에 난입할 거예요.”
탑의 존재가 발각되고 말 것이다...
위기를 느낀 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야테에게 향했고,
“우선 물러나겠소.”
하야테는 빠르게 판단했다.
[나는...?]
제논이 급히 물었으나 부질없었다.
결사들은 이미 현장을 떠났다.
제논 역시 다시 포탈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뒤늦게 펼친 포탈보다,앞서 발생한 64개의 포탈 중 한 곳에서 브라함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먼저였다.
용언의 연속 사용으로 제논의 마력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점도,브라함의 마법 전개 속도가 드래곤을 범접하는 점도 문제였다.
“...?”
현장에 도착한 브라함의 표정이 굳었다.
마리로즈의 기척을 쫓아 날아왔더니 드래곤이 있는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됐다.
[...]
이미 크게 가까워졌을 추격자들을 경계하는 제논의 표정 역시 편치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크롸라라라라!!
아득한 상공에서부터 추격자들의 고성이 들려왔다.
‘망했다.’
막 탑으로 전송 된 결사들이 드래곤 레이더를 확인하고 침음했다.
레이더에 표시되는 드래곤의 숫자,제논을 포함해서 무려 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