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19화
제논이 부친의 유해를 되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닥치는 대로 브레스를 쏘면 된다.
속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려하는 결사들의 성정을 고려했을 때,오히려 크게 소란을 피우는 편이 결사들을 피할 방법이기도했다.
하지만 제논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쓸 생각이 없었다.
소란을 일으키면 결사들을 피할 순 있어도 상위룡의 눈길을 끌 테니까.
그랬다간 도리어 자신이 피식자로 전락하고 만다.
드래곤의 활동에도 나름 많은 고충과 제약이 있는 것이다.
제논은 되도록 조용히,원만하게 일을 해결한 뒤 어서 레어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드래곤이 날뛴다는 소문 자체를 차단하고 싶었다.
조금 전,급히 결계를 펼쳤던 이유다. 제논은 뱀파이어들의 탈출을 용인하지 않았다.
현장에 난입한 인간이 발동시킨 아티팩트의 술식을 용안으로 단숨에 간파하고 ‘공간 이탈 불가’의 결계를 만들어 세웠다.
일련의 과정이 몹시 쾌속했다.
드래곤의 의지는 즉각 실현되므로 당연하다.
아티팩트가 발동하기 전에 결계가 먼저 펼쳐졌다.
한데 놓쳤다.
아티팩트에 각인 된 술식이 의외로 강력해서였다.
단 1회 발동한 것으로 아티팩트는 가루가 됐고,결계는 무용지물이 됐다.
‘달갑잖은 흐름이다.’
드래곤에겐 보물의 가치를 판별하는 안목이 있다.
제논이 보기에 조금 전 소멸한 아티팩트는 상당히 훌륭한 물건이었다.
아마 인간의 기준으론 대체품을 찾기 힘든 지고의 보물이었을 터였다.
그만한 보물을 희생시켜서 뱀파이어들을 탈출시켰다?
단순히 의리라기엔 과하다. 어떤 노림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놈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유추하기 쉬웠다.
뱀파이어는 베리아체로부터 비롯한 존재.
베리아체의 가장 강력한 유산인 ‘피의 여왕’ 마리로즈가 이끄는 일족이다.
‘뱀파이어들을 이용해서 마리로즈를 깨울 방법이 있는 건가?’
제논이 잠들기 전.
마리로즈는 교황 크레이슐러에 의해 봉인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봉인은 사실 마리로즈가 ‘허락’한 것에 가깝다. 마리로즈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벗어날수 있는 봉인이었다.
물론 나태의 저주는 달랐다.
나태의 저주는 태초신으로부터 파생 된,가장 강력한 저주 중 하나로 쉽게 뿌리칠 수 없다.
하지만 제논은 마리로즈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태초의 3악 중 하나인 베리아체가 자신을 초월하도록 낳은 존재가 마리로즈 아닌가.
그녀쯤 되면 일시적으로나마 나태의 저주를 극복할 공산이 컸다.
‘만에 하나 그녀와 적대하게 됐다간 상황이 난감해진다. 이만 물러나야겠군.’
인간과 뱀파이어를 통틀어서 제논이 경계하는 단 한 명은 당연히 드래곤 슬레이어 하야테다.
하지만 마리로즈를 우습게보진 않았다.
그녀가 자유롭지 못한 점을 감안해도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승산이 낮기도 했고,그녀와 충돌하는 순간 결사들에게 꼬리를 잡힐 확률이 높았다.
퍼어어엉!
제논이 등을 돌림과 동시에 그의 주변을 선회하던 마력의 구체들이 아스카에게 쏘아졌다.
떠날 땐 떠날지언정 훼방꾼을 응징하려는 것이다.
제논은 황당하게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인간을 죽일 생각이었다.
한데 죽이지 못했다.
지우개 검.
확률적으로 안티매직 효과가 발생하는 유니크 등급의 검이 운 좋게 구체를 베어낸 탓이다.
지우개검은 그리드가 약 3년 전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됐는데,시장에 풀린 물건 중에선 그나마 신품에 속했다.
촌스러운 이름과 별개로 위력이 훌륭했다.
물론 안티매직 효과가 발동했을 때의 이야기다. 발동 확률은 9퍼센트에 불과했고 검의 공격력 자첸 그리 높지 않았다.
템빨단이 쓰기엔 손색이 있는 물건인 것이다...
“하핫! 운이 좋았네!”
십년감수한 아스카가 용작살을 던졌다.
대형 몬스터를 구속하기에 최적화 된 아이템이다.
개량형 용작살이 최근 몇 년 동안 템빨국 군대에 대량으로 보급됐고,덕분인지 구버전 용작살은 비교적 구하기가 쉬웠다.
따앙!
기세 좋게 쏘아져 제논의 회색비늘과 부딪친 용작살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비늘을 꿰뚫기는커녕 흠집조차 못 냈다.
제논이 몇 차례 일으킨 폭발의 여파로 이미 상당량의 생명력을 잃고 있던 아스카 입장에선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공격력이 43퍼센트나 오른 상태인데도 아무 효과가 없어?’
드래곤의 절대 방어가 얼마나 강력한 권능인진 아스카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제3차 국대전 당시에 드래곤의 비늘을 베었었다.
비록 작은 흠집을 낸 수준에 불과했지만,당시 하이랭커들의 레벨이 300대였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의 아스카가 당시의 그리드보다 월씬 더 강하다는 의미다.
한데 용작살까지 쓰고도 비늘에 흠집조차 못 냈다고?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뭔가 특별한 방법을 써야하는 건가?’
아스카는 진취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가설을 세운 순간 그리드제 무기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무기를 꺼냈다.
보스를 레이드하고 얻었던 낫이다. 비늘의 틈새를 노려 볼 요량이었다.
죽음을 피해 달아날 생각 따윈 없었다.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았고,처음부터 죽을 각오로 나섰던 거니까.
뱀파이어들을 탈출시키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녀에게 남은 미련은 드래곤 공략법의 힌트를 얻는 것,그 외엔 없었다.
하지만 제논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엄하다.]
제논이 처음으로 마법을 썼다.
레이단 주둔 병력을 궤멸시키고 놀과 뱀파이어들을 위기에 빠뜨렸던 마력의 구체는 단순히 ‘마력을 몽쳐서 움직인 것’에 불과했던 반면 마력으로 법칙을 세워서 현상을 만들었다.
“...”
아스카의 두 발이 지면 깊숙이 처박혔다. 늘씬한 몸매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 기이했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듯했다.
그라비티와 싱크홀의 연계.
생명력 손실로 발생한 능력치 상승을 무용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머리 쓰는 거 봐라?’
아스카가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디딜 지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중력이 몸을 짓누르는 상황.
온갖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인벤토리에서 아이렘을 꺼내는 '동작'을 수행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제논의 단 한 수가 모든 변수를 차단했다는 의미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췄음에도.
단순히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으면서,제논은 힘을 과시하지 않고 효율을 추구했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굳이 싸워줄 필요는 없지.’
버서커는 쉽게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몇 번은 버틴다.
그 몇 번의 기회에 행운이 더해질 경우를 제논은 경계했다.
자신에게 위협을 주는 어떤 수단을 강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
‘게다가 사용하는 무기들의 수준이 범상치 않아.’
보통의 인간이 만든 물건들은 아니다.
아스카가 사용했던 무기들의 면면을 돌이켜본 제논이 아스카를 집어삼킨 구멍에 불꽃을 집어던졌다.
잠시 후.
일대의 지면이 붉게 달아오르며 새카만 연기를 피어 올렸다.
콰아아아아아앙!!
폭발이 이어졌다.
지축이 흔들렸고,폭발의 중심부에서 회색의 빛줄기가 솟구쳤다.
아스카의 죽음을 뜻하는 빛이었다.
제논은 진즉에 현장을 벗어나 있었다.
레이단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
아니,성이 챗더미가 된 덕분에 이제는 가장 큰 건물이 된 연금술시설의 지붕 위에 올라 도시의 전경을 살폈다.
처참하고 고요했다.
쉬지 않고 물건을 생산하던 시설들은 대부분 붕피됐고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금 제논이 밟고 선 건물 안에선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차피 뱀파이어들을 놓친 이상.’
몇 명의 목격자를 더 살려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논은 굳이 지붕을 짓밟았다.
건물의 천장을 무너뜨리고 그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뒤룩거리는 거대한 눈동자를 목격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연금술사들이다.
최소 10년 이상을 밥만 축내다가 드디어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한 사람들.
그들이 가릿사의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자리를 지킨 이유는 미련이 많아서였다.
그들은 그간 눈칫밥을 먹어가며 발전시킨 이 시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시설을 버리고 도망쳐봤자 쓸모없는 사람으로 되돌아갈 뿐이니까.
“메르세데스 사도님의 의뢰품만은 반드시 지켜라...!”
소장이 외쳤다.
특히 방수 기능이 뛰어난 코팅제.
얇고,투명해서 그림 등에 덧씌워도 티가 나지 않을 필름을 갖고 싶다고 몇 달 전 메르세데스가 의뢰했었다.
여섯 사도.
무려 황제폐하 다음으로 위대하다고 추앙 받는 존재 중 하나가 친히 찾아와 한 의뢰를 어찌 실패하겠는가.
소장은 기필코 의뢰를 완수하고 싶었다.
드래곤인지 나발인지.
아무튼 괴수에 불과한 놈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의 눈빛에 깃든 적의를 읽은 제논이 짐짓 당황했다.
‘동족의 활동이 너무 오랜 세월 뜸하긴 했나.’
어째 만나는 인간마다 드래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다.
화르륵!
제논의 발밑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시설은 인간의 문명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두 발 뻗고 잠들기 위해선 미리 말살시켜야 할 필요가 있…
[너의 피는 나를 적시지 못한다.]
밟고 선 지붕의 틈새로 불꽃을 흘려보내려던 제논이 입을 열었다.
용언이다.
힘이 담겨 실재가 되는 언령.
쿠콰콰콰콰콰콱!!
피의 폭포가 제논의 육체에 닿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나부꼈다.
하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수백 만,수천 만 개의 방울로 분열되고도 힘을 유지하며 날아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짙은 피비린내가 일대를 잠식했다.
[나는 피 냄새를 맡지 못한다.]
제논이 재차 용언을 읊었다.
미간을 좁히는 모습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용언의 연속 전개가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논은 무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어른이 된지 얼마 안 된 아이구나.”
피의 여왕.
새카만 마력과 붉은 혈류가 나부끼는 가운데 떠오른 새하얀 얼굴이 미소 짓는 광경은,구젤의 드래곤 하트를 철렁 내려앉게 만들정도로 오싹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길한 존재의 미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중성.
자칫 현혹될 만해서,구젤은 또 다시 용언을 읊어야만 했다.
[나는 매혹당하지 않는다.]
드디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걸까.
가슴을 한 번 크게 부풀린 구젤이 호흡을 길게 토하며 말했다.
[나를 아이라고 칭하기엔 네가 살아온 삶이 나의 삶보다 훨씬 짧을 텐데.]
구젤은 굳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마리로즈가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대화를 주도하고 화제를 교란시킨 뒤,기회를 틈타 자리를 뜰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리로즈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평균 수십 년에 한 번.
그것도 고작 몇 분만 잠에서 깨어있는 그녀가 시간의 가치를 모를 리 없다.
“항렬을 정하는 건 힘이란다.”
베리아체가 가장 마지막에 낳은 자식.
그러나 다른 모든 형제를 제치고 후계로 지목 된 존재다운 주장이었다.
“‘나’의 피는 너를 적시지 못한다고 했지.”
콰르륵!!
도시의 그림자가 크게 들썩였다.
정확히는 도시 곳곳에 뿌려진 혈흔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광경이었다.
“내 낭군의 백성들이 흘린 피는 어떨까.”
[...!]
두 눈을 부릅뜬 제론이 결국 브레스를 쏘았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핏물을 막아내고 도망칠 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꽈아아아아앙…!!
강력한 힘의 충돌이 무지막지한 파장을 일으켰다.
레이단 사막의 지하에 잠들어있던 마리로즈가 소란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듯,
대륙 각지의 드래곤이 서서히 눈을 떴고 탑의 결사들 역시 이변을 눈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