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95화 (1,483/1,794)

74권 18화

놀.

그는 마리로즈와 브라함을 제외한 직계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뱀파이어다.

그리드가 죽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기본적으로 놀이 너무 튼튼했다. 본인과 아군의 생존력을 높이는 기술이 탁월하여 쉽게 죽질 않았다.

그가 지옥 원정대에 포함되지 않은 건 뱀파이어 도시의 영주이기 때문이지,자격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서둘러라!!”

놀은 거의 평생에 가까운 세월동안 관 속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상식적이다.

템빨국의 일원이 된 후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왔다.

드래곤.

저 거대한 생명체의 절대적인 힘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승산이 없음을 알고 큰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끝내 도망치지 않았다.

선두를 굳건히 지킨 채 사람들의 피신을 유도했다.

어머니 베리아체로부터 계승한 성질,‘자애’가 그로 하여금 타인을 우선시하도록 강요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의 순간에 더욱 강해지는 본능이었다.

왜.

어머니께서는 왜 하필 내게 타인을 사랑하게끔 하셨을까.

지옥 같은 삶에서 그가 느껴온 가족애와 동료애는 늘 재앙과 같았다.

질투,원망,분노.

나태의 저주에 걸린 혈족은 미쳐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쉽게 외면하거나 해쳤다.

그들 틈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사랑했던 놀의 삶은 유독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홀로 돌연변이인 기분.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를 원망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순간.

‘은혜를 갚을 때다.’

놀은 어머니께 깊은 감사를 느꼈다.

이 ‘마음’ 덕분에 그리드에게 거두어졌고,그리드와 함께한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을 끝없이 만나왔다.

내가 돌연변이가 아님을 알게 됐다.

악의가 아닌 선의를 교환하는 경험은,피보다 값졌다.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다. 행복했다.

종국엔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다.

어머니께서 나를 사랑하셨기에 내게 이 마음을 주셨음을 깨달았다.

그래,이젠 모든 은혜에 보답할 때였다.

나를 거둬준 그리드와 내게 마음을 주신 어머니께서 보람을 느끼게끔.

나와 함께하며 행복을 가르쳐준 사람들을 도울 차례다.

쿠와아아아아앙!!

다짜고짜 레이단을 침략한 드래곤은 단지 마력을 방출했을 뿐이다.

한데 놀과 뱀파이어들의 몸은 산산 조각났다.

아비규환.

사람들이 절규했다.

우리를 돕기 위해 달려온 자들의 허망한 죽음에 동요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재...생!”

부글부글!

찢어진 입으로 힘겹게 완성시킨 단어가 주술이 된다.

피를 매개로 삼는 혈마법.

나부끼는 핏물과 살점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재구성되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가 몹시 쾌속했다.

전멸했던 뱀파이어 군단이 불시에 되살아난 광경으로 비춰졌다.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죽음을 극복한 놀이 사람들을 재촉했다.

레이단 성 좌우로 쭉 늘어선 채 부유해있는 고리들.

거대하여 건축물 같기도,어떤 상징물 같기도 한 그것들에 마력을 주입하여 레이단 영주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놀... 제길! 이쪽이야!”

크리스와 제드노스에 이어 레이단 영주에 등극한 가릿샤.

백성들을 성으로 인솔하던 그녀가 방향을 틀었다.

워프 게이트.

지금 막 놀의 마력을 에너지로 가동하기 시작한 고리들을 향해서였다.

[지휘 스킬 <행군>을 사용합니다.]

[지휘 스킬 <용맹〉을 사용합니다.]

가릿샤는 템빨단 1군 소속이다.

심지어 체다카 길드 시절부터 쭉 함께해온 인재로,템빨국의 필요에 의해 사령관으로 전직했다.

그녀의 지휘는 신속하고 효율적이었다.

본래라면 충격에 빠져 걸음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했을 백성들을 빠르게 수습해서 이동시켰다.

‘놀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 순 없어.’

워프 게이트는 만능에 가까운 기능을 발휘하는 대신 작동 조건이 까다롭다.

대량의 마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수백 명의 마법사가 마나를 쥐어짜야 간신히 운용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지금 막 4대의 워프 게이트를 동시에 작동시킨 놀의 상태가 온전할 가능성은 낮았다.

제아무리 직계이고,뱀파이어 도시의 영주라지만.

그의 마나는 무한한 게 아니니까.

한편 제논은 일련의 상황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세상이 많이도 바뀌었군.'

뱀파이어와 인간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다.

서로 돕는 행위는 생태에 어긋나는 것으로,명백한 오류였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한 방향도 예상 외였다.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형태였다.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여력이 느껴졌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달했을 공산이 컸다.

혹은 엘프와 연관됐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당할 만했나...?’

인간의 기준으론 고대로 분류 될 시대.

제논에게도 꽤 예전 일로 체감되는 시대에나 볼 수 있던 워프 게이트의 작동이 제논을 보다 신중하게 만들었다.

워프 게이트는 거인족의 기술.

그리고 거인족이 멸망한 이유는 여러 초월종에게 제법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지이이이이잉!!

워프 게이트 하단의 지면이 솟구치며 수십 대의 병기가 모습을 드러 냈다.

흐름상 ‘빔’이라는 물질을 쏘는 거인족의 무기인 줄 알고 경계했으나,다행히 화약으로 작동하는 대포였다.

분주히 움직이는 포병들의 모습이 미개했...

[...!]

쿠콰콰콰콰쾅!!

수십 대의 대포가 일제히 포격을 가함과 동시에 제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챗빛 하늘에 2개 뜯 초승달이 순식간에 만월로 변한 듯한 광경이었다.

템빨포의 위력에 놀란 것이다.

단순한 대포의 구조로 저만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콰아아아앙!!

제논이 놀란 것과 별개로,수십발의 포탄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 한 발도 제논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그의 몸을 항시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마력의 실드에 가로막힌 탓이다.

보이지 않는 유리와 충돌하여 폭발하는 느낌이었는데,이때 발생한 충격파가 꽤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논의 거대한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절대방어조차 아니었다.

드래곤의 절대방어는 ‘입는 데미지를 무효화시키는’ 권능이다.

한데 지금 제논은 데미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단순한 실드 한 장으로.

‘이게...’

‘...드래곤!’

놀과 뱀파이어들의 머리와 가슴이 사늘하게 식었다.

차라리 굳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사고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았다.

초월종의 힘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이미 충분한 학습을 통해 드래곤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체험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드래곤 피어,마법,용언,브레스,결계,절대방어 등등.

저 회색룡이 이렇다 할 기술을 단 하나도 선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절망적이었다.

제논은 레이단의 파악을 마치고 있었다.

‘언제 원군이 도착해도 이상하지 않다.’

도시의 규모와 형태를 봤을 때 이곳은 인간들에게 몹시 중요한 생산 기지일 터였다.

한데 응당 있어야 할 정예 병력이 없다.

저 뱀파이어들을 정예랍시고 주둔시킨 건 아니라고 보았다.

아무래도 워프 게이트를 신뢰하는 거겠지.

언제라도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으니까.

고오오오오!!

마력으로 빚은 수십 개의 구체가 제논을 중심에 두고 선회하기 시작했다.

점차 빠르고 위력적으로 변모해갔다.

구체 중 단 하나만 도시에 떨어져도 도시의 일각이 초토화 될 기세였다.

놀의 동공이 미칠 듯이 떨렸다.

“가릿샤!!”

급하게 외쳐본다.

하지만 놀의 외침보다 구체의 가속이 몇 배는 더 빨랐다.

꽈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에 놀의 외침이 묻혔다.

쿠르릉! 콰콰쾅!!

굉음이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4개의 워프 게이트가 속절없이 무너지며 가릿사와 백성들을 덮치는 소리였다.

놀이 손 쓸 틈조차 없었다.

구체와 워프 게이트가 충돌한 시점부터 가릿샤와 백성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워프 게이트의 중심부에 솟아있던 레이단 성과 함께 챗더미로 변했다.

천운이 따라 운 좋게 소멸하지 않은 몇 명은 워프 게이트의 잔해에 깔려 죽었다.

작은 행동의 결과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재해였다.

[나는 상당히 신중한 편이다.]

제논의 아버지 구젤은 고룡이 아니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절대적인 존재라기엔 애매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인간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고,자신의 힘을 과신하지도 않았다.

제논은 대륙 각지를 차근차근 순회하기로 계획했다. 인간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파악할 요량이었다.

인간들 입장에선 질풍보다 빠른 질주로 체감될 거란 점이 문제였지만.

“놈...”

놀이 이를 갈았다.

도대체 왜 침략해왔냐는 등의 질문 따위 던지지 않았다.

자신의 관점으론 이해하지 못할 초월종이다. 설명을 요구해봤자 무의미할 거라고 판단했다.

대화와 이해에 쏟을 정력을 온전히 마력으로 치환했다.

‘어머니,지금 곁으로 가겠습니다.’

베리아체의 생전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리며 미소 짓는 놀.

그의 창백한 피부 위로 푸른 혈관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마력이 전신의 혈관을 질주하며 혈류를 가속시키는 여파다.

놀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폭발시켜 드래곤의 눈알 하나 정도는 가져갈 계획이었다.

물론 성공할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허무한 개죽음을 당하느니 작은 희망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그를 바라보는 제논의 눈빛이 심유했다.

하루살이를 가엾게 바라보는 인간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모욕감을 느낀 놀의 혈관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르는 순간.

____!

여전히 제논의 주변에 휘몰아치고 있던 마력의 구체 중 하나가 놀에게 쏘아졌다.

소리조차 없었다.

구체는 어느새 놀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이어서 폭발할 때야 비로소 굉음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악!!”

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난 반면 뱀파이어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놀을 터뜨린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중상을 입고 괴로워했다.

제논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한 발의 구체를 더 쏘았다.

그때 나타난 거대한 곰이 구체를 몸으로 막았다.

무의미했다.

구체는 정체불명의 곰을 아무런 무리 없이 꿰뚫었다.

하지만 곰의 숫자가 수십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표적에게 도달하기 전까진 멈추지도, 폭발하지도 않고 온갖 장애물을 꿰둘어야 할 구체가 미세하게나마 속도를 잃어갔다.

급기야 화살이,검이,창이,도끼와 방패가 차례대로 떨어져 앞길을 가로막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마침 재생을 끝낸 놀과 뱀파이어들이 핼쑥한 얼굴로 원군을 바라봤다.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좋은 기회네. 인마대전에선 활약이 적어서 말 꺼내기가 눈치 보였었는데.”

버서커 랭킹 1위.

웨폰 마스터,혹은 무기수집가라고 불리는 금발의 여인 아스카와,“기회가 아니라 재앙입니다만.”

소환사 랭킹 1위.

귀여운 곰 인형을 어깨에 얹은 거구의 사내 블랙테디였다.

“알아. 죽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놀에게도 익숙한 위명의 듀오가 겁 없게도 제논을 마주보고 섰다.

태산처럼 거대한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표정들이 당당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듯했다.

“내가 버티는 동안 네가 저 흡혈귀를 데리고 떠나면 돼. 오케이?”

“네,아가씨.”

“너희들 무슨 배짱으로…!”

놀의 외침은 묵살됐다.

이미 두 번의 죽음을 극복한 놀은 무력해서, 블랙테디의 곰들이 쉽게 입을 막고 들쳐업었다.

아스카는 새로운 무기를 꺼내 쥐었다.

돈과 정보.

가장 위력적인 자본을 투자해 그리드가 만든 무기들을 수집해온 그녀에겐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능력이 있었다.

또한 버서커는 쉽게 죽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죽음을 유예한다.

460레벨 이후 더욱 뚜렷해진 특성이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와 싸워서 이기진 못할지언정 다소의 시간을 버는 게 가능했다.

“나도 드디어 템빨단 1군에 가입하는 거야.”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그리드의 신작들을 구매할 권한.

그건 웨폰 마스터리 스킬을 보유한 아스카 평생의 염원이었다.

블랙테디 또한 그녀가 염원을 이루길 간절히 바랐다.

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결계를 돌파하는 이동 장치,무려 일회성의 최상급 아티팩트를 투자하여 놀과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현장을 이탈했다.

순간 발생한 이질적인 마력의 파장이 지하 깊숙이 잠들어 있는 여왕을 깨웠고,

덕분에 아스카가 번 고작 몇 초의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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