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17화
칠악성 에피소드는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위한 안배가 아니다.
다수의 플레이어가 칠악성 각자와 인연을 맺고 퀘스트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비밀을 파헤치는 구조였다.
그리고 현재 칠악성 에피소드를 진행 중인 플레이어는 총 다섯명이다.
1악 제이크와 엮인 ‘강운’의 지발
2악 디아나와 엮인 ‘용장’ 하스터.
3악 레일리와 엮인 ‘패왕’ 아그너스.
4악 타렌과 엮인 ‘신장’ 그리드.
5악 이하와 엮인 ‘비장’ 크라우젤.
이중 누가 먼저 칠악성의 개념을 알게 됐는가.
당연히 크라우젤이다.
크라우젤의 에피소드 진행률이 가장 높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칠악의 힘을 가장 먼저 얻은 사람은 그리드였다.
반면 지발은 칠악의 힘을 가장 늦게 얻었다.
한데 지발이 6악 지크의 성장과 생존에 가장 큰 기여를 했고 칠악성의 봉인처가 무저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전후 과정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의미다.
칠악성과 얽힌 플레이어들은 그 순서에 관계없이 칠악성의 비밀을 함께 알아갔다.
접점이 없어도 자연히 그렇게 됐다.
칠악성이 워낙 유명한 까닭이다.
태초신 중 하나인 한울이 직접 지크를 섭외하려하지 않았던가.
지상,지옥,아스가르드,심지어 무릉도원과 환국에 이르기까지.
막말로 온 세상이 칠악성에 대해 알고 있는 탓에 그들과 관련한 소식 전파가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이뤄졌다.
그리고 현재.
사실상 칠악성 에피소드는 종막을 향해가고 있었다.
6악 지크를 제외한 칠악은 모두 사멸했다.
죽어 영혼만이 남은 채 무저갱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유일하게 육체가 보존됐던 지크는 이미 부활했고,나머지 칠악성의 힘은 플레이어들이 나눠 가졌다.
이제 남은 과제는 지크를 제외한 칠악성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과,아직 등장한 적 없는 7악의 힘을 밝혀내는 것인데…
사실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보기엔 애매했다.
칠악성 에피소드의 ‘엔딩’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징벌하는 거니까.
신들의 추악한 실체를 밝혀서 신격을 잃게 만드는 것,혹은 아스가르드를 물리적으로 정복하는 것.
그것이 칠악성의 바람이었다.
그들의 바람을 이뤄줄 수만 있다면 중간 과정쯤이야 얼마든지 생략해도 좋은 구조였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굳이 무릉도원을 찾아왔다.
5악 이하와 관련 된 퀘스트를 집요하게 파헤친 끝에 간신히 도달했다.
이하를 이해할수록 비장의 위력이 강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예상이 틀리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무릉도원에 검선이 있다는 확증을 얻었으니까.
검선과의 만남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충분히 이롭다.
“속세와 동떨어진 이곳처럼,세상엔 여러 개의 차원이 존재합니다. 정령들이 뛰노는 세계 또한 존재하지요.”
복숭아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
초입에 선 오두막 앞 평상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막 마을에 들어선 크라우젤을 등진 채다.
탁,탁,탁…
청아한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비자나무 위에 바둑돌을 얹는 소리였다.
“정령게는 4개의 원소가 질서를 이루어 성립시킨 세계입니다.”
“흙이 가장 낮고,물이 그 다음 으로 낮아 흙보다는 위에 있으며,공기는 그 둘 보다는 위이고,불이 가장 위에 있다. 이와 같은 질서를 말씀하십니까?”
크라우젤의 이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착한 마을의 정체를 즉각 파악하고 적응했다.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면서다.
홀로 앉아 바둑을 두는 사내가 신선임을 확신하고 선문답에 어울려줬다.
어떤 퀘스트의 전조임을 알았다.
“옳습니다. 검성께서 잘 알고 계시니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탁.
백돌이 흑돌을 에워쌌다. 집을 완성하기 직전이었다. 흑돌에게 남은 수는 없어보였다.
“이미 완성 된 세계의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며 나타난 빛은,과연 옳은 것이었을까요.”
정령계를 구성하는 다섯 속성은 본래 불,물,바람,땅,그리고 빛이었다.
며칠 전의 크라우젤이었다면 ‘빛은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빛의 정령왕은 그리드가 토벌했고 새로이 태어난 무의 정령왕이 빈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불이 비추는 세계에 빛은 불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서와 법칙이 성립되어 완성된 세계라는 전제를 완전하다고 해석하시나 보군요.”
“네.”
“하지만 이 세상에 완전한 건드문 법이지요.”
신의 한 수.
흑돌을 에워쌌던 백돌이 단 한 수에 집어삼켜졌다.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그제야 돌을 내려놓은 사내가 등을 돌려 앉았다.
오답이라는 평가에 이어진 바둑판 위의 반전을 목격한 크라우젤은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애써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정령계는 전제부터 잘못 됐습니다. 저희 또한 마지막에 태어난 정령왕을 보고 눈치 했죠.”
벤타오.
크라우젤을 마주보고 앉은 신선의 이름이었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같기도,인자한 노인 같기도 했다.
“하늘이 물을 내리고,물이 나무를 생기게 하며,나무가 불을 내고,불이 흙을 생기게 하며,흙이 금을 내어 가장 나중에 생기니 오행의 극치다.”
“...!”
“정령게는 4개의 원소가 아닌 오행을 추구하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섯이라는 숫자에 집착해온 겁니다.”
정령계는 ‘다섯’의 정령왕이 다스린다.
정령계를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마지막에 태어난 무(無)가 금(金)의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완성 될 세계였던 것인데,제대로 완성되지 못했지요.”
이유야 뻔하다.
크라우젤은 말의 행간을 파악했다.
“바람의 정령왕이 문제입니까?”
“맞습니다.”
바람,공기는 오행에 속하지 못한다.
그 자리엔 목(木)이 있어야 옳다.
바람의 정령왕이 숨은 빌런이었다.
밝혀진 진실에 이어질 말은 당연히.
“검성께서는 진즉 눈치 채셨겠지만,저희들 신선은 세태와 타협한 반신쯤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신의 눈을 잠시간 속일 수는 있어도 본질적인 뜻엔 거역하지 못하지요.”
촤르륵!
벤타오가 넓은 소매를 펄럭이자 노란 부적들이 나부꼈다.
선회하며 원을 그리는 모양새가 나비들이 노니는 모습을 닮아있었다.
그것은 곧 문이 되었다.
정령계로 이어지는 문일 터였다.
“청컨대 우리를 대신하여 정령계의 질서를 바로잡아주시지요.”
[★히든 퀘스트★ <바람을 베는 검>이 발생합니다.]
퀘스트 내용을 빠르게 스캔하는 크라우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무엇이든 베는’ 검성의 검이 심화단계에 진입하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소마저 베서... 호흡 불가의 영역을 만든다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 대상의 스태미나를 급격히 떨어뜨리는 패시브 스킬의 개방.
물론 바람의 정령왕을 베는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크라우젤은 당연히 퀘스트를 수락했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많지만 뒤로 미루겠습니다.”
4원소와 오행이 각각 무엇을 암시 하는지.
신선들은 왜 정령계를 돕고자하는지.
혹시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등등.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의문을 접어둔 크라우젤이 차원문으로 일단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야 더 심도 깊은 대학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까닭이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불안해하진 않았다.
그는 벤타오를 신뢰했다.
칠악성이 선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가장 먼저 전파한 존재가 바로 벤타오였으니까.
“두 가지 사실만 미리 말씀드리지요.”
서서히 사라지는 크라우젤에게,벤타오가 미소 지었다.
일말의 불안감마저 씻겨내는 미소였다.
“저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정령계의 완성은 템빨신과 속세의 모든 인간들에게 이로울 것입니다.”
* * *
레이단.
한때 템빨국의 국경이었던 이곳은 제국 중앙의 물자를 책임지는 산업도시로 변모했다.
영토가 넓은데 반해 사막으로 황폐했던 땅이다.
피아로와 농부들의 헌신으로 사막의 절반 가까이를 논과 숲으로 가꿨지만 여전히 사막은 흔했고 종종 모래폭풍이 불어 닥쳤다.
연금술 시설을 중심으로 온갖 공업이 발달하기도 한 터라,굳이 거주 지역으로 삼기보단 산업도시로 활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애초에 렘빨제국은 대륙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초거대 국가다.
백성들이 살기에 레이단보다 좋은 땅은 차고 넘친다.
“어이! 야! 새꺄! 황도로 가는 물건들부터 싹 다 실어놓으라니까!”
레이단의 공기는 매우 쾌적했다.
노동자들의 덥수룩한 수염만큼 새까만 매연을 내뿜는 굴뚝이 무려 수백 개였지만,
굴뚝마다 설치 된 공기청정기가 오염물질들을 순식간에 정학시켜주었다.
레이단 연금술 시설이 만든 세기의 발명품이었다.
처음 이 장치를 발명했을 때,
위대하신 황제폐하께서 ‘드디어 밥값을 제대로 했다.’며 연금술사들을 치하했다는 소문이 있다.
...드디어 밥값을 했다기엔 연금술 시설의 역사가 핑장히 오래되긴 했지만,아무튼 공기청정기는 황실 최대의 수입원 중 하나로 등극했다.
각종 사이즈와 디자인으로 생산돼 전국 각지의 시설과 귀족들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서민들에게는 무상으로 보급됐다.
물론 자신의 분야에서 공을 세워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면 되는 수준이라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응? 뭐지? 모래폭풍이 불 시기가 아닌데?”
분주히 움직이던 노동자들이 이변을 감지하고 웅성거렸다.
굴뚝마다 설치 된 수백 대의 초대형 공기청정기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소음을 발생시킨 까닭이다.
공기청정기에서 필터 역할을 담당하는 마나가 역류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엄청 큰 바람이 온다.”
레이단 출신의 노동자가 중얼거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평화로운 세상이다.
악마들의 침략을 받고 합심한 인류는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소수민족을 존중했던 그리드와 바사라의 혼인은 인종의 화합마저 이끌었다.
인간은 모두 같은 편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레이단에 주둔 중인 병력이 적고,도시를 대표하는 실력자들은 지옥 원정에 참가해 대부분
자리를 비운 상태라지만,노동자들은 일체의 불안감도 느끼지 못했다.
적의 침략 자체를 상정하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리기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대피! 전원 대피하라!!”
“성으로! 성으로 피신하시오! 빌어먹을!! 어서 뛰라고!!”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발악적으로 외치는 성벽 위 병사들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드디어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챈 노동자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단지 바람일 거라고 여겼던 위험의 정체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침략자는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그들의 수백 걸음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괴상한 물건이 많구나.]
“아... 으아아아...”
검게 드리우는 그림자의 정체.
드래곤.
해출링과는 차원이 다른 전설 속 괴물을 목도한 사람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죽음,전멸,멸망을 직감했다.
회색룡 제논은 숨죽인 채 벌벌 떠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도시 곳곳에 설치 된 괴상한 장치들과,온갖 물건을 생산하는 각종 시설에 주목했다.
[인간의 문명이 이토록 급격히 발전할 수도 있던 건가?]
아버지의 죽음이 조금쯤은 납득되려 한다.
당대의 인간들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판단한 제논이 크게 날갯짓했다.
광풍을 일으켜 온갖 시설을 무너뜨렸다.
쿠콰콰콰콰쾅!!
“으,으아아악!!”
“히이이익!!”
광풍에 휩쓸린 수천 명의 사람들이 허우적거렸다.
기둥을 붙잡고 버티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하늘 위로 떠올랐다.
무너진 건물의 잔재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 전부를 구원하는 존재가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무기를 쥐고 나머지는 전부 지하로 도망쳐라!”
뱀파이어 군대를 이끌고 막 현장에 도착한 놀이었다.
놀.
모친 베리아체에게 따뜻한 마음을 계승한 그는 직계 중 거의 유일하게 자애를 베풀 줄 알았다.
그의 혈마법은 보호와 생존에 특화되어 있었다.
[뱀파이어... 흐음.]
제논이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인간을 보호하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을 낯설게 느꼈다.
[농장인가.]
멋대로 해석한 제논이 마력을 일으켰다.
그의 관점에서 뱀파이어와 인간은 별 차이가 없는 종족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똑같이 하찮았다. 한꺼번에 몰살시킬 작정이었다.
레이단 역사상 가장 큰 위기가 도래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