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16화
“볶음밥에 치즈 좀 그만 넣으세요. 안 그래도 돼지기름에 볶는 밥에 치즈를 과도하게 넣으니까 보기만 해도 속이 느글거리잖습니까. 차라리 김치를 더 넣으시죠.”
영우빌딩 근처의 삼겹살집.
한국에 거주 중인 템빨단원이 전원 한 자리에 모였다.
오늘 템빨국에서 열린 축제의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에서다.
처음엔 분위기가 학기애애했다.
철판에서 자글자글 익어가는 볶음밥.
그 위로 추가한 치즈를 쏟아 붓는 극검에게 라우엘이 태클을 걸기 전까진.
라우엘에게 극검이 태클을 건 게 아니라,반대가 맞다.
“...내 볶음밥엔 신경 끄고 네 볶음밥에나 집중하지?”
“당신이 늘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음식을 잘못 된 방식으로 섭취하는 사람에겐 가르침을 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잘못 됐다고? 볶음밥에 모차렐라를 뿌리는 게 잘못 됐다고? 진심이냐?
지금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음식 문학를 비하하는 거야?”
“양이 너무 과하다고 지적했을 뿐입니다만. 게다가 저는 해결책으로 김치를 제시했는데요.
볶음밥에 김치를 넣는 방식이야 말로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 문학 아닙니까?”
“편견이다! 너 그거 인종차별이야! 한국인은 어떤 음식에든 김치를 때려 넣는다고 비하하는 거잖아!”
잠시 분위기가 사늘해졌다.
잠시뿐이다.
일행은 곧 극검과 라우엘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두 사람의 언쟁은 어차피 늘 라우엘의 승리로 끝난다. 극검은 곧 벙어리가 될 터라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지슈카는 날치알 뿌리지?”
“응,응!”
“유라는 김가루 안 뿌리고.”
“네.”
그리드는 처음부터 지슈카와 유라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커다란 철판의 중심에 서서 두 사람 몫의 볶음밥을 직접 조리했다.
실력이 현란했다.
불을 갖고 논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Satisfy에서의 요리경험이 현실에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철판구이&볶음 40년 경력의 명인이자 삼겹살집의 총지배인이 놀라 입을 떡하니 벌릴 정도였다.
“단시간에 밥을 눌리면서 날치알의 식감을 완벽하게 살렸다...? 아니,뭡니까? 영우씨 혹시 CIA 출신이세요?”
“네? 씨 뭐요?”
“미국의 중앙정보국을 뜻합니다.”
“요리학교 말하는 거야,바보야.”
그리드,세희,유라,예림,복자(엘리자베스)가 포식이불족발,극검 등등.
안 그래도 템빨단엔 한국인이 제법 많다.
거기에 지슈카,라우엘,툰 등 한국으로 이주한 사람도 많아서 한 번 회식을 열면 모이는 숫자가 족히 수십 명이었다.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다.
함께 사선을 넘어온 동료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나눌 대학가 얼마나 많겠는가.
프라이빗한 장소에서 이어진 2차 술자리에선 보다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갔다.
“난 카츠가 일식이라고 외칠 때 역시 저놈이 일본인은 일본인이구나 싶더라.
...극검은 무시했다.
“크라우젤이 무릉도원에 도착했다며?”
“신선 중에 검선이 있다는 모양이야. 히든 퀘스트가 발생할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던데.”
“만약 일이 잘 풀리면 검술에 도술을 접목시키게 되는 건가?”
“멋은 덜하겠네. 검성의 낭만은 검 한 자루로 뭐든지 베어내는 건데.”
“낭만이 밥 먹여주는 시대가 아니니까.”
그리드를 기점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상향평준화되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다양한 방법’으로 능력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드만 해도 족히 수십 종류의 기연을 얻고 성장해왔다.
단일클래스에 자부심을 느끼고 집착하는 사고방식은 낡아빠진 것이다.
“애초에 검성의 강점은 이제 큰 메리트가 없죠.”
최강의 검성이었다는 뭘러의 최대 업적이 헬가오 봉인이다.
물론 그게 뭘러의 한계였다는 보장은 없다. 단순히 월러 시대 최대의 위협이 헬가오였을 뿐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Satisfy에선 업적이 곧 격이 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한다.
뭘러 이상의 업적을 쌓은 당대의 인물들.
대표적인 예로 그리드,브라함,메르세데스 등은 이미 진즉에 뭘러를 초월했을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크라우젤에게 문제가 생긴다.
<최강의 검성〉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뭘러가 다른 이들보다 못해진 시점부터 검성의 가치는 하락한 셈이니까.
본래부터 뭘러라는 이름의 그늘에 가려진 크라우젤의 격은 한층 더 떨어지게 된다.
템빨단원들은 크라우젤이 더 발전하기 위해선 검성에의 집착을 버려야한다고 보았다.
반면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글쎄... 나는 검성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그리드는 사람들이 모르는 뭘러의 일화를 몇 가지 더 알고 있다.
세상에 알려진 뭘러의 모든 업적들은, 뭘러가 산군에게 ‘격을 나눠준 후’에 쌓아올린 것임을 알았다.
게다가 검성의 위대함은 지금 이순간에도 비반이 살아서 증명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내 생각에 크라우젤의 목적은 검선에게 가르침을 얻는 게 아니라 검선과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닐까 싶은데.”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말하는 그리드는 귤껍질을 까는 중이었다.
손놀림이 대단했다.
귤락을 쉽게 벗겨냈다. 그물 모양으로 생긴 하얀 섬유질을 말끔하게 제거해서,그리드가 까는 귤은 그야말로 황금을 뭉쳐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너무 부드럽네~”
그리드가 입에 넣어주는 귤을 앙 받아먹는 지슈카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예림이 세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찔렀다.
“저 언니 볼수록 개 같지 않니?”
“히익...!”
기겁한 세희가 예림의 입을 가로 막았다.
“아무리 도둑고양이 같은 여자라고 해도 그렇지,너무 심하게 욕하지는 마! 오빠의 애인이기에 앞서서 우리의 대장이잖아!”
"웁웁...!"
예림이는 순수하게 개 같다고 했을 뿐이다.
표범 같은 인상과 달리 의외로 지고지순한 면이 있는 지슈카를 보고 강아지를 떠올렸을 뿐이지,개땡땡이라고 욕할 의도는 전혀없었다.
‘왜 이렇게 힘이 세?’
예림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입을 막는 세희의 손을 도무지 뿌리치지 못했다.
힘 센 건 유전인가 싶었다.
‘...갑자기 왜 또 개판이 됐지?’
다짜고짜 몸싸움을 벌이는 세희와 예림,자꾸 복자의 이름을 부르다가 원성을 사기 시작한 포식이불족발,재차 라우엘에게 시비를 거는 극검...
술은 입에도 안 댄 툰이 필요 이상으로 산만해진 분위기를 경계했다.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 입국한 친구들에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라고 무전을 날렸다.
템빨단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대장 선발전 이후 며칠이 지난 날.
“오오오...!”
드디어 지옥 엘리베이터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지하에 묻힌 시설들이 일제히 빛을 뿜자 일대의 대지가 푸르게 물들었다. 마치 호수를 보는 듯했다.
“무운을 빕니다.”
그리드가 지옥 원정대를 직접 배응했다.
소속을 가리지 않고 자원한 랭커들을 선별해 조직한 12개의 부대.
그들 수백 명에게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만든 각종 비약이 지급됐다.
그들의 역할은 단발성이 아니다.
최대한 날될 것.
지옥 엘리베이터가 민간에 개방될 때까지,되도록 오랫동안 지옥에서 깽판을 치며 마물과 악마들을 소모시켜야했다.
지속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템빨국은 그들을 마땅히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단,안전지대의 마족들과는 친분을 쌓도록 노력해주시고요.”
라우엘의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원정대 전원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악마들에게 일방적인 침략을 당해온 인류가 드디어 역습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은 복수이자,미래를 위한 성전이었다.
* * *
어째서 우리는 선인과 악인을 구분해야 하는가.
악인에겐 죗값을 치르게 하고 선인에겐 윤회의 기회를 제공하는 우리의 삶은 마치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모순이다.
지옥은 개정(改IE)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바알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던 군주가 바로 아모락트다.
제2위 대악마.
태초의 3악 중 하나인 그녀는 바알의 편에 섰었다.
지옥을 개혁하여 지금의 형태로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반대파의 선봉에 섰던 베리아체를 자신의 힘으로 직접 무찔렀다.
평생 동안 후회해온 일이다.
지옥이 변질됨에 따라 악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야탄을,그녀는 동정했다.
자신의 선택이 아버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단 사실을 깨닫고 깊이 좌절했다.
그래서 야탄교를 세웠다.
지금의 지옥이 존재하는 이상 아버지는 평생 오명을 씻지 못할 테니,차라리 악의 개념을 바꾸고자 시도했다.
아버지가 우리를 만드신 것에 이유가 있듯, 악에도 가치가 있음을 설파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야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모락트는 조금도 만족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태초신이다.
레베카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셔야 옳건만 레베카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다.
이게 다 자신이 만든 업보임을,
반드시 만회해야 할 실수임을 아모락트는 깨닫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지옥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녀야말로 가장 바알의 파멸을 원했다.
그녀야말로 가장 베리아체를 그리워했다.
하여 많은 사건을 외면해왔다.
내심 인류를 응원해왔다.
그런 그녀가 인류의 지옥 침공 소식을 접하고 분노했다.
“안 된다. 안 된다,아이들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우리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맞다.
아버지께서 악을 빚으신 이유는 인간을 향한 경고였다.
악을 보고 배워 너희는 악하지말라는 가르침이었고,언젠간 모든 인간을 천국으로 올리기 위한 자비였다.
인간들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으셨을 리 없다.
“너희가 감히 아버지의 바람을 어겨선 안 되느니라.”
초월은 즉 일반과 동떨어졌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초월자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 순간 침입자들에게 향하는 아모락트의 감정은 적의와 완전히 동떨어진 살의였다.
***
“잘못 느꼈던 게 아니다.”
드래곤의 수면 시간이 긴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삶이 길어서다.
인간에게 수백 년은 일생으로 감당하지 못할 역사인 반면 드래곤에겐 수백 년도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이군.”
구젤의 아들 제론은 시간을 느끼는 감각을 인간에 가깝게 맞춰가고 있었다.
자신이 잠깐 잠들어있던 사이에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이다.
심지어 인간에게.
이는 즉 드래곤의 시간 감각을 인간에게 맞춰야한다는 경고에 가까웠다.
잠들어있는 동안 눈과 코를 베이는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제론은 인간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문명이 상당히 고도화된 걸까. 빼앗긴 물건을 돌려받을 겸 정리를 좀 해놔야겠다.’
드래곤의 유해는 같은 드래곤에게도 보물로 인식됐다.
제론이 석상롱을 계승하기 위해선 구젤의 유해를 포식할 필요가 있었다.
고작 인간의 손아귀에 쥐어질 물건이 아닌 것이다.
크롸라라라라!!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포효하는 잿빛 드래곤의 그림자가 광야를 검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