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15화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드는 문득 생각했다.
환히 웃는 지슈카의 모습을 보면서다.
고작 힘내라는 한 마디 말에 기뻐해주는 사람.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리드는 행복했다.
여태껏 겪어온 모든 고생의 보답이라고 느꼈다.
여전히 질어진 온갖 책임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을 나눌 시간도 부족한데,언제까지 지금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하는 걸까.
그런 회의감마저 들었다.
물론 잠시뿐이다.
그리드는 자신이 쌓아올린 제국을 바라보았다.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 목숨을 바쳐서 충성하는 병사들, 환호하는 백성들...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들의 모습을 재차 확인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여유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아직 사치야.’
우선 무조건 바알을 죽여야 한다.
놈에게 왜곡 된 지옥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지 못하는 이상 인류에겐 꿈도,희망도 없다.
죽음은 안식이 아닌 영원한 고통의 시작이란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
그들이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이유는 순전히 그리드와 템빨국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리드와 템빨국이 늘 그랬듯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주 이러네.’
지슈카를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건지,그리드는 이 순간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내가 지슈카를 엄청 좋아하는구나.’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함께하는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그로 인해 범람하는 온갖 생각이 괴상하게 꼬여서 간혹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처음에 이별을 통보했을 때처럼 말이다.
연애 초보들이 종종 보이는 행태였다.
‘진정하자.’
지슈카를 향한 그리드의 마음은 깊을 수밖에 없다.
외모가 취향인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드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존중해준 사람이 바로 지슈카였다.
인간관계에 서투르고 인성에 하자가 있던 그리드를 몇 번이나 바른 길로 인도한 사람 역시 바로 그녀다.
어쩌면 그리드는 처음부터 지슈카에게 반해있던 걸 수도 있다.
다만 친구로 시작한 관계이기 때문에 자각이 늦었을 뿐.
여러모로 타이밍도 나빴다.
첫사랑 아영이 사건으로 현실 여자를 불신하게 되고,아이린과 혼인을 올리게 되는 등.
지슈카와의 관계는 순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론 다를 것이다.
“...!”
다짐하던 그리드가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디스트로이어.
폰의 새로운 궁극기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순보를 강제하는 수준의 기술이다.’
수백 개의 투사체를 자력으로 끌어당긴 후 발출하는 스킬.
내포하고 있는 힘이 초월자의 감각을 자극할 정도다.
노멀 클래스의 잠재력을 증명하는 스킬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5차 전직부턴 진짜로...’
히든 클래스와 노멀 클래스의 격차가 좁혀질 거라는 임철호 회장의 말이 현실이 될 듯하다.
깨닫는 그리드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지슈카가 패배하는 모습을 자연히 머릿속에 떠올린 것이다.
그리드는 늘 폰의 승전을 바라왔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지슈카가 의기소침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 바람에 호응하듯.
“만천화우.”
지슈카는 궁성의 저력을 발휘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수백 발의 화살을 불시에 멈추더니 폭풍을 만들어 폰에게 반격했다.
전황을 뒤엎는 한수였다.
황좌에 딱 붙어있던 그리드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저건 단순히 화살을 통제하는 스킬이 아니야.’
심상 구현에 가깝다.
그녀가 지정한 범위의 모든 물질과 개념.
돌,풀,먼지,바람,마나,심지어 디스트로이어의 잔여 기파까지도.
그 모든 게 지슈카의 의지에 호응했다. 날카로운 암기로 변모해 회오리쳤다.
위력은 놀라웠다.
온 하늘을 꽃비로 적신다는 이름처럼,폰이 흘린 혈화를 하늘에 널리 퍼뜨렸다.
‘대단해. 정말로 강해졌구나.’
지슈카와 폰 두 사람 모두를 상대로 느끼는 감상이었다.
앞으로 겪게 될 온갖 위기 때마다 두 사람에게 큰 도움을 받을 거란 사실을,그리드는 직감했다.
이후.
레가스와 데미안.
극검과 유페미나.
페이커와 휴렌트.
반트너와 후로이
제드노스와 지발.
대회가 진행될수록 그리드의 어깨는 차츰 가벼워졌다.
짊어진 책임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인마대전이 끝난 뒤에도 꾸준히 발전해온 동료들의 모습에 가장 열광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드였다.
‘데미안이 조금 아쉽지만... 조만간 해답을 찾겠지. 상대가 너무 나쁘기도 했고.
비룡으로 거리를 벌리고 욕설과 독설을 남발하는 식으로 싸우는 후로이는 대중의 인식보다 월씬 강력하다.
플레이어 최초로 얻은 세컨드 클래스의 위력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한때 퇴물 소리마저 들었던 휴렌트 또한 전성기를 되찾았다.
사운드 플레이로 페이커의 은신을 일부 무력화시키는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들이 대회의 수준을 떨어뜨릴 것으로 예측했던 몇몇 사람들의 콧대를 보란 듯이 짓눌러줬다.
반면 데미안은 약세를 보였다.
바퀴벌레로 비유 될 정도의 우수한 생존력과 마법능력,거기에 탱킹력과 검술까지 겸비했던 교황 시절과 달리 지금의 그는 단순히 검사에 불과했다.
템빨신교 교주답게 일찍이 완성시킨 3융합 검무는 몹시 강력했고,덕분에 여러 공식석상에서 파격적인 활약을 해왔다지만...
이번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레가스.
그에게 있어서 데미안은 '그리드를 답습’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긴 세월 그리드와 선의의 경쟁을 했었고, 여전히 그리드의 그림자를 쫓고 있는 그의 입장에선 데미안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무척 오래 전의 그리드와 싸우는 느낌이랄까.
공략법도 충분해서 상대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레가스는 최근 수행의 강도를 올린 상태였다.
체다카 길드 최고의 기재라고 불렸던 시절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실력을 연마하고 기연을 얻었다.
남이 봤을 땐 순전히 기행에 가까워서,그를 예전부터 알아온 사람들은 ‘레가스가 다시 병이 도졌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효과는 컸다.
템빨신교 교인 특유의 높은 스탯에 템빨을 더해 인위적으로 ‘공방일체’를 구현한 데미안을
레가스가 비교적 쉽게 공략한 비결은 이번 수행 기간 동안 숙달한 패링에 있었다.
레가스는 아직 몇 종류 안 되는 템빨신교의 검무를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애초에 템빨신교의 검무는 템빨신의 검무의 하위 호환 버전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다는 검무 최대의 단점이 더욱 부각되어 있었다.
‘콤보’를 주력으로 삼고 끝없는 공격을 퍼붓는 레가스와 상성이 너무 나빴다.
“우와아아아아!!”
관중들의 환호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리드가 보기엔 다소 아쉬웠던 장면들도 그들에겐 학려하게 비치는 중이다.
사람들은 대회의 내용에 충분히 만족했다.
반용족 로드,오크 로드,다크엘프 왕.
이제 남은 3명의 군주들에게 훨씬 더 큰 기대감을 품게 됐다.
후로이와 휴렌트마저 예상을 초월하는 활약을 보여준 상황이다.
3명의 군주는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의 충격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한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카츠.
하필 테루찬과 매칭 된 그는 폭탄을 떠안은 셈이었다.
운이 너무 나빴다고 밖엔 볼 수 없었다.
‘기왕이면 반용족 로드와 겨뤄보고 싶었다.’
테루찬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세상 모든 오크 위에 군림하는 군주였다.
그리드를 섬기지 않았다면 진즉부터 오버로드를 자처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템빨단원들은 듬직한 장수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떤 일을 믿고 맡길 수는 있어도,자신의 적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무대 아래 대기석에 앉아있는 번츠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이유다.
테루찬은 바로 앞에 서있는 카츠를 신경조차 안 썼다.
굳이 싸울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시시하다고 느꼈다.
그때 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돼지 멱 따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야.”
템빨단원 중엔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사람이 많다.
그리드가 그랬듯 인성에 하자가 있는 인물도 드물지 않았는데,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카츠였다.
물론 옛날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순해졌지만,자신을 무시하는 상대에게까지 착하게 굴 정도로 호구가 된 건 아니었다.
이죽거리는 카츠에게 테루찬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전사의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어스름족 오크는 지배종이다.
모든 오크를 지배하며,한때는 인간마저 지배하려 했었다.
무력을 숭상하는 만큼 전사를 존중했다.
테루찬이 고개를 숙인 행동엔 큰 의미가 없었다.
자존심을 굽히는 게 아니라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했다.
“너도 나름 전사일 텐데 말이다.”
자연스럽게 도발하는 테루찬이었다.
지배종 특유의 흉포함이었다.
촤르르르륵!!
카츠의 손에 붉은 빛이 명멸한다싶더니 검이 나타나 쥐어졌다.
테루찬은 짙은 혈향을 느꼈다.
“좋아.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너를 반쯤 죽여 놔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어.”
카츠가 말했고,
투콰앙!!
테루찬이 돌진했다.
겁먹은 짐승이 먼저 이를 드러내듯,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코를 찌르는 피냄새가 너무 짙었다.
꽈아아아앙!!
실패작의 상위 버전.
새카만 상어 모양의 대검이 혈검과 충돌하며 폭음을 발생시켰다.
실제로 카츠의 혈검은 폭발했다.
날카로운 검의 형태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더니 핏물을 분수처럼 뿜어댔다.
테루찬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폭발에 휩쓸려 뒤로 밀려난 대검을 어서 회수하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늦었다.
그의 두꺼운 양팔에 들러붙은 핏물이 그의 상체를 등 쪽 지면으로 끌어당겼다.
“끅...!”
목에 핏대를 세운 테루찬이 이를 악 물고 버렸다.
양팔과 함께 뒤로 넘어가려는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퍼엉!!
카츠는 대포를 맞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새로운 혈검을 생성해 테루찬을 찌르려던 그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테루찬이 내지른 발차기에 복부를 얻어맞은 까닭이다.
은밀한 공격이었다.
테루찬의 두 눈은 카츠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으며,발을 들어 올릴 때 전혀 기척을 흘리지 않았으니까.
카츠 입장에선 완전히 사각에서 날아온 공격이었다.
“후우!”
콧김을 내뿜은 테루찬이 양팔을 구속하는 핏줄기를 끊어냈다.
카츠의 집중력이 떨어진 순간 핏줄기의 힘도 약해졌음을 간파하면서다.
“카츠! 너를 위대한 전사로 인정한다!!”
테루한의 두꺼운 핏줄이 도드라지며 전신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폭발하는 검은 마력은 악마들의 마기와 달랐다.
어스름족 오크 특유의 용력이 발생시키는 기파였다.
콰앙!
테루찬이 내딛은 한 걸음이 무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라빗 행정관이 탄식했다.
가장 비싼 금속을 구해다가 특수제작한 무대가 엉망이 된 것이다.
거액을 투자한 보람이 없었다...
꽈르르르릉!!
테루찬의 두 번째 도약이 무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카츠와의 수십 미터 거리를 불시에 좁히는 동작은 순보 그 자체였다.
초월자 번츠델이 증명하듯,군주들에겐 초월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순간.
“일식(日蝕).”
밤이 도래했다.
카츠의 머리 위로 떠오른 붉은 달이 태양을 가린 여파다.
더욱 하얗게 질리는 피부.
길게 뻗는 어금니.
붉게 빛나는 안광과 상대방의 피를 빼앗아 펼치는 망토...
직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순혈을 이은 뱀파이어.
어쩌면 최초의 직계라고 표현해도 좋을,베리아체의 기사가 태양에 의한 제약을 인위적으로 없애고 완전한 힘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꽈아아아앙!!
붉은 피와 검은 용력의 충돌이 수십 회 연쇄됐다.
붉은 피는 흩어졌다가 다시 물결을 이루기를 반복했고 검은 용력은 계속해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양쪽 다 소멸할 것 같지 않았다.
그야말로 호각지세였다.
몇 분 동안 화려한 장면이 셸 수 없이 연출됐다.
끝나지 않을 싸움처럼 보였다.
하지만 카츠가 걸친 피의 망토가 처음보다 월씬 더 길어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자각했을 쯤.
털썩!
테루찬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갑옷처럼 둘렀던 검은 용력이 갈려나가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초췌했다.
수십 일을 굶은 것처럼 피골이 상접해져 있었다.
전투 내내 피를 빼앗긴 여파다.
베리아체의 기사에게 흡혈이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
직접 이로 물거나 마법을 수단으로 흡혈하는 다른 직계들과 엄연히 달랐다.
아무런 절차가 필요치 않았다.
베리아체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답게 완전에 가까운 불사를 이룬 것이다.
지켜야 할 대상보다 먼저 쓰러져서야 의미가 없으니까.
“...저 위로 여섯 명이나 더 있다고?”
태양이 가려진 순간부터 표정을 굳히고 있던 반용족 로드 번츠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템빨신의 개가 되기로 결심한 김에 가장 가까운 충견이 될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을 듯했다.
템빨신의 진정한 사도들은 이번 대회에 참가조차 안 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
인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반용족 일동이 침묵했다.
이후.
반용족 로드는 다크엘프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다크엘프 왕을 잡기 위해 피아로와 전 적기사단이 힘을 합쳤던 점을 고려하면,반용족 로드의 힘은 최소 사도급이 맞았다.
템빨단원들은 번츠델이 마지막 사도가 되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프리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급격히 눈이 높아진 그는 마지막 사도를 정말로 신중하게 뽑을 생각이었다.
‘최소한 나보단 강해야지.’
...무후총을 방문해 봐야 하나?
아무튼 이날 12명의 대장이 정해졌다.
템빨제국의 힘을 여실히 느낀 사람들은 앞으로 시작 될 지옥 원정을 크게 기대했다.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냈다.
라우엘의 의도대로였다.
한편 지옥에선.
“호오...?”
수백 년 동안 미동조차 않던 베리아체의 영혼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저자가 백호창의 수호자... 우리 둘이 저자를 쓰러뜨리는 거요?”
“줄초상 치를 일 있소? 십이지신과 사방신의 협조를 구할 생각이외다.”
“템빨신을 부르는 건?”
“템빨신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사안은 아닌 듯한데.”
“하기야. 저자는 미르보다 훨씬 못하다고 했지.”
동대륙에선 황길동과 노검마가 파국 잠입에 성공했으며,
“기대 이상의 성능이네요? 이쯤되면 조만간 템빨신보다 더 훌륭한 대장장이가 되겠어요.”
“감히 아스가르드에 반기를 든 인신보다 못해서야 안 되겠지요. 한데 옆에 그분들은…?”
“신참이에요. 이들이 쓸 무기를 제작해줘요.”
아스가르드에선 새로운 천사들이 본격적인 활약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