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11화
"와아..."
"아름답군요..."
세계수의 숲 중앙
주황색의 투명한 기파가 어지럽게 수놓여 있었다.
수십 종류의 별자리가 한데 모인 듯한 광경이다.
지상에 우주가 내린 느낌인데,템빨신 그리드의 궤적이었다.
여전히 잔상으로 남은 그의 전투 경로가 목격자들에게 위업을 실감시켰다.
"킁킁."
파일볼프는 그리드의 검로를 특정해서 추적했다. 있지도 않은 코에 힘을 주며 냄새를 맡고자 노력했다.
살아생전에 심취했던 금속의 향기를 떠올리면서다.
그리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번진 기파에서 그는 강철을 느꼈다.
자연스러운 작용이었다.
빛의 정령왕은 그리드에게 베일 때마다 빛을 산란시켰다.
마치 강철에 부딪친 일광처럼 반사되어 흩어졌다.
파일볼프는 한 눈에 알아봤다.
그리드의 성질. 즉,신성이 바뀌었음을.
‘아니,신의 성격이라는 게 쉽게 바뀔 리 없지.’
신성의 변학는 배신과 타락을 의미한다.
레베카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그녀가 빛의 신이므로 믿고 섬겨왔다.
만약 그녀가 빛이 아닌 다른 신성을 지니게 된다면,여태껏 그녀를 믿고 섬겨온 사람들을 기만하고 배반하는 행위가 됐다.
`자신의 성격을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고 해석함이 옳은가.’
고대의 거인족이 지혜의 대명사였던 이유는 단순하다.
아는 게 많아서였다.
파일볼프는 변태 같은 기질이 무색하게 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드의 현재 상황을 제대로 분석했다.
탄생한지 얼마 안 된 신이 지금 막 자신의 신성을 자각했음을 엿봤다.
"후우...후우..."
파일볼프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무의 정령왕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 까닭이다.
무돌이는 유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무(無).
이름은 공허를 연상시켰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무돌이는 움직일 때마다 흔적을 남겼다.
금속이 방울 져 후두둑 떨어졌다.
파일볼프는 그것이 그리드의 <탐욕>에 가깝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순수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금속.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아무 것도 아닌 금속.
‘그러므로 무(無)인가.’
과연 그리드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정령왕답다고 할까.
무(無)의 개념을 자유롭게 해석한 눈치인데,사실 저래서야 무가 아닌 금(金)의 정령왕이라고 불려야 옳지 않을까 싶었다.
‘뭐가 됐든 상관없지.’
인식이란 개체 별로 다른 법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같은 것을 봐도 다른 것을 느낀다.
무돌이가 자신을 공허가 아닌 금으로 인식하여 금의 성질을 지녔다고 할지언정 하등 문제가 없었다. 개성의 범주에 속했다.
만약 문제였다면 무돌이는 탄생조차 못했을 테지.
[유라 님,저는 당신과 계약하고 싶어요.]
"...?"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유라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포식한 빛의 정령왕을 역으로 흡수해서 태어난 무돌이.
그는 본래 그리드의 정령이었다.
당연히 그리드와 계약해야 옳았다.
한데 나와 계약하겠다니?
[빛의 정령왕에게 삼켜진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의 의지 덕분이었어요.]
“나의...?”
[네.]
빛의 정령왕이 무돌이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유라는 빛의 정령왕을 적대하고 부정했다.
그리드의 적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녀의 태도는 무돌이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빛의 정령왕의 계약자였으니까.
비록 빛의 정령왕보다 격이 낮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지만,계약자임에도
불구하고 빛의 정령왕을 적대하고 부정한 유라의 의지가 빛의 정령왕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됐다.
빛의 정령왕은 계약의 굴레에 붙잡히고 말았고, 그 탓에 무돌이를 소화하지 못했다.
무돌이에겐 유라가 그리드 못지 않은 은인이었다.
또한 무돌이는 빛의 정령왕을 역으로 흡수한 상태다.
빛의 정령왕이 유라와 맺었던 계약이 희미하나마 흔적으로 남았다.
유라가 아닌 다른 사람과 계약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유라와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파기하면 해결 될 문제였지만,무돌이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라가 마음에 들었다.
“네 마음은 알겠어. 고마워. 하지만 너는 내가 아닌 그리드씨의 곁에 있어야 해.”
긴 설명을 들은 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무돌이가 자신이 아닌 그리드와 어울린다고 믿었다.
무돌이가 울상을 지었다.
[제가 싫으신가요?]
단지 빛의 덩어리에 불과했던 빛의 정령왕과 달리 무돌이는 표정을 지녔다.
수은으로 빚은 구름 같은 모습.
그 중심에 존재하는 ‘얼굴’에 두 눈과 입이 그려져 있었다.
유라와 대화하는 내내 반달처럼 휘어서 빙그레 웃는 듯했다. 보기 좋았다.
한데 이 순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다.
당황하는 유라에게 무돌이가 설명했다.
[저는 그리드님엔 별다른 도움이 안 돼요. 그리드님엔 이미 탐욕이 있으니까요.]
“아…”
유라가 곧바로 납득했다.
안 그래도 무돌이가 탐욕과 닮았다고 느끼던 차다.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금속.
[저는 탐욕과 달았지만 달라요. 더 약하고,제련할 수도 없죠.]
정령은 생명체에 가깝다.
무돌이를 재료로 써서 아이템을 만드는 등의 행위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탐욕보다 강한 것도 아니므로,무돌이는 자신이 그리드와 함께하는 건 썩 효율적이 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리드도 깨닫고 있었다.
‘무돌이는 자체 변형이 가능한 금속쯤으로 여겨야 돼.’
활용도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물질을 변형시키는 스킬이 이미 존재한다.
또한 탐욕이 있다.
무돌이를 최대한 활용해봤자 그리드가 만들고 사용하는 아이템보단 성능이 떨어졌다.
‘나보단 유라가 갖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리드는 유라의 정령을 해쳤다.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무돌이가 빛의 정령왕을 대체한다면?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다.
게다가 유라는 앞으로 월씬 더 강해질 것이다.
소통조차 거부하며 제멋대로 굴던 빛의 정령왕과 지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유라,부디 무돌이랑 계약해줘.”
“…정말로 이게 옳은 거죠?”
“당연하지.”
환하게 웃은 그리드가 유라의 등을 떠밀었다. 상냥한 손길이 유라의 망설임을 완전히 지워주었다.
[저와 계약해주실래요?]
“응... 좋아.”
[기뻐요!]
무돌이가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드는 여러 감회를 느꼈다.
예전부터 자신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던 아이.
저토록 밝은 아이였다는 사실을 나는 끝까지 몰라줬었구나 싶어서 새삼 미안했다.
‘무돌이 너도 앞으론 행복하자.’
* * *
[이런 식으로요?]
“응,완벽해!”
[헤헤 햇.]
무돌이와 계약한 유라.
유라와 계약한 무돌이.
둘은 고작 10분 만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애초에 상성이 너무 좋았다.
무돌이는 유라가 원하는 형태의 아이템으로 변신하는 게 가능했다.
강력한 총탄도 즉시 생성했다.
속성이 무(無)인 탓에 데빌 슬레이어 특유의 마력에 거부반응도 전혀 없었다.
무돌이가 유라의 몸을 감싸는 면적이 커질수록 유라의 전투력이 눈에 티게 상승했는데,‘유라가 무의 정령왕을 무장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잘 어울리는 모습 보니까 기분좋다.’
유라의 표정이 몹시 밝았다.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에 밝은 표정이 더해져 훨씬 더 환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드와 단 둘이 데이트할 때만 보여줬던,그런 예쁜 모습이었다.
마음의 짐을 완전히 덜어낸 그리드가 갱신 된 검무의 정보를 확인했다.
<템빨신의 검무>Lv.l
템빨신 그리드의 검무입니다.
템빨신의 신성으로 물리 공격력이 90퍼센트,마법 공격력이 30퍼센트,치명타 확률이 70퍼센트,치명타 공격력이 150퍼센트 상승합니다.
유대를 맺은 인물과 협동 스킬 전개 시 모든 수치가 3배 상승합니다.
*도검류 무기를 착용할 경우에만 온전히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지팡이,오브류 무기를 착용한 경우 물리 공격력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무기를 착용하지 않았을 경우 의지 스랫에 비례한 피해를 입힙니다.
*보폭을 발지 않고 검무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단,‘공백의 비급’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인해 보폭을 밟을 때마다 검무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1회 보폭 추가마다 검무의 피해량이 50퍼센트,100퍼센트,200퍼센트,400퍼센트 상승)
*2◦개의 융합 검무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오를 때마다 융합검무의 창조 가능 횟수가 5개 추가됩니다.
★6융합 검무까지 창조할 수 있습니다. 단,5융합 검무와 6융합 검무의 창조 횟수는 신위,신격 수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모든 검무의 속성은 무(無)입니다. 다른 모든 속성을 대상으로 항상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며,어떤 개념과 현상이라도 벨 수 있습니다. 단,우위 상성은 없습니다.
★마나가 소모되므로 활성화/비활성화가 가능합니다.
현재 활성화.
가장 큰 변학는 물리 공격력과 치명타 공격력의 대폭 상승.
그리고 속성의 변학다.
무속성.
무속성은 서로 맞물리는 다른 속성들과 달랐다.
어떤 속성을 상대로도 항상 100퍼센트의 위력을 발휘했다.
대신 우위 속성도 없었지만 강점이 월씬 컸다.
모든 속성에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므로 개념과 현상마저 벤다...
이는 Satisfy 세계관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어떤 검술’의 전제를 닮아있었다.
실제로 그리드에겐 기대한 적 없던 칭호가 생긴 상태였다.
<조건부 검성〉
패시브
템빨신의 검무를 전개하는 동안,당신이 ‘베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브라함의 필살기가 메테오였던 이유를 알겠군.’
무속성이 항상 정답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빛과 어둠 속성은 다른 모든 속성에 우위를 지닌다.
단,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빛은 어둠에게,어둠은 빛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약점을 지녔으니까.
반면 무속성은 뚜렷한 약점이 없다.
‘깡딜’을 극한까지 높일 수 있는 그리드에겐 최고의 속성이었다.
‘그러니까 템빨신의 신성으로 채택된 거겠지.’
깨닫는 그리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낙룡극연살파.
6융합 검무에 깃든 치우의 가호를 재차 확인한 뒤였다.
★낙룡극연살파를 전개 시,무조건 <궁극의 무(武)>가 발생합니다.
‘늘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푸른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보던 그리드가 이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존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대상.
언젠가 보았던 유일신 치우를,그리드는 진심으로 숭배했다.
* * *
또 다시 나흘이 지났다.
처음 5일과 달리,일행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선 그리드는 ‘마법이 사라진’ 새로운 검무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거듭 단련했다.
'빛의 정령왕을 상대로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원인은 디텍트 포스의 부재다.’
대상을 추적하는 마법.
검무에 귀속됐던 브라함의 보조마법이 사라지자 빛의 정령왕의 속도를 더욱 따라잡기 힘들어졌었다.
‘한동안 민첩성에 스탯을 최대한 투자하는 편이 좋을까?’
그리드가 고민하는 동안 유라는 무돌이와 합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며,파일볼프는 신의 원의 수리에 집중했다.
신의 원.
일행이 세계수의 숲을 방문한 용건이다.
이제부턴 파일볼프가 가장 큰 책임감을 느꼈다.
어찌다가 빛의 정령왕이 소멸하고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게 된건지...
모든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도 상황이 썩 이해되질 않았지만,아무튼 파일볼프는 잡념을 떨쳐냈다.
임무에 온전히 집중했다.
"..."
그리드와 브라함은 파일볼프의 작업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고대의 거인족이 아티팩트를 제조하는 순간이다.
족히 천 년 이상 볼 수 없던 광경을 목격하게 됐으니 귀중한 경험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공부로 삼았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브라함이었다.
그리드가 이해하기엔 모르는 개념이 너무 많았던 반면 브라함은 지공의 저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모르는 개념을 실시간으로 풀이하고 이해해가며 새로운 아티팩트제작법을 습득했다.
‘넘어섰다.’
브라함이 직감했다.
아티팩트 만드는 재주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던 파울드.
이 순간 자신이 그를 넘어섰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