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10화
검성 비반이 논하길, 검무란 의식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행례의 연출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실제로 그리드가 체험한 환국의 과거 에피소드에서 파그마는 몹시 나약했었다.
다른 양반들과 기질부터가 달랐고,취급도 다르게 받았다.
파그마는 ‘신’이 아니라 ‘신을 보좌하는’ 제사장으로 키워졌다.
일종의 폐기 처분이다.
쫓겨난 신들이 양반을 만든 의도와 다른 성향과 능력을 지닌 탓에 버려졌다고 봐야 옳았다.
그래서일까.
그리드에게 검무란,소외된 자의 흔적이자 유산이었다. 어떤 동질감마저 느꼈다.
강자들에게 한계를 지적당하고 때때로 조롱을 받을지언정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금빛 섬광과 꺾을 수 없는 정의부터 시작해 번헨 열도에서 얻은 스킬들,브라함에게
배운 마법들,룬의 힘과 공의 칭호들,그리고 무패왕의 검술과 혈마법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늘 새로운 힘을 얻어왔고,그 힘들이 검무의 위력과 잠재력을 초월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그리드는 무의식중에 그것들을 외면해왔다.
오히려 더욱 더 검무에 집착하고 단련시켰다.
단점,약점,한계 따위를 논하며 검무를 버리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그리드의 검무>다.
검성 비반의 가르침, 크라우젤이 준 영감,브라함의 마법과 지식이 집착에 가까운 그리드의
집념과 맞물려 파그마의 검무를 몇 차례나 초월시킨 결과였다.
그리드와 함께 성장해온 검무는 ‘쓸모없는 존재’였던 그리드를 가장 긍청하는 증거 중 하나였고,그리드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였다.
[〈그리드의 검무>가 <템빨신의검무>로 승급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이 그리드에게 무한한 기쁨과 활력을 선사했다.
여태껏 없을 정도로 밝아진 시야가 맑아진 정신과 맞물려 그리드의 사고를 가속시켰다.
빠르게 판단한다.
화신의 폭풍을 전개하여 빛의 범람을 막아냈다.
화염이 만든 명암에 빛의 정령왕이 작아지도록 유도했다.
빛의 정령왕은 섣불리 벗어나지 못했다.
마법.
브라함이 마력으로 세운 법칙은 일반적인 술법의 개념을 초월한다.
그리드의 영역이 브라함의 마법과 맞물려 더욱 강력해졌다.
빛과 선.
아스가르드의 신을 상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지크의 룬이 빛의 정령왕을 압박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드는 상황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검무는 나의 일부다.’
그리드의 검무로 진학한 시점부터 그렇게 됐다.
내가 템빨신으로 성장했을 때 검무 역시 함께 성장했어야 옳다.
하지만 검무에 귀속 된 브라함의 마법이 성장을 억제했다.
템빨신의 신성. 즉,속성이 무(無)로 판정됐기 때문이다.
브라함의 마법으로 인해 여러 속성을 지닌 검무와 상성이 나빴고,그로 인해 성장이 발생하지 못했다.
브라함을 탓할 일이 아니다.
파그마의 검무가 그리드의 검무로 성장한 결정적인 계기가 브라함의 마법이었으니까.
브라함의 마법이 없었으면 템빨신의 검무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군.’
지금의 검무를 만든 브라함의 마법이 설마 검무를 억제하는 원인이었을 줄이야.
브라함이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면, 아마 영원토록 묻힐 진실이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당신깬 매번 큰 도움을 받는군요. 감사합니다.”
“흥”
콧방귀 뀌는 브라함의 표정이 불편했다.
기분이 몹시 언짢아 보였다.
당연하다.
여태껏 탐욕에 ‘디스인티그레이트’를 때려 박던 작업이 수포가 됐으니까.
향후 미래를 고려했을 때,앞으론 그리드가 사용하는 장비들 역시 속성을 버리는 게 맞았다.
템빨신의 격이 상승할수록 무속성과 궁합을 이루는 효과들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부터 브라함은 탐욕에 메테오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끔찍하겠네.’
몇 달 동안 해온 작업을 뒤집어엎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브라함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그리드였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거나,조금 천천히 해도 된다는 등의 빈말은 지껄이지 않았다.
마법 제련의 결과물을 빨리 얻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다.
게다가 브라함은 직계의 힘을 되찾은 상황.
정신적으론 몰라도 육체적으론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브라함이 밥 먹고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어서 작업을 끝내주길 바라는 게 그리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왠지 불쾌하군.”
“ 왜요?”
눈살을 찌푸리는 브라함에게 반문하는 그리드의 가슴은 여전히 뜨거웠다.
맑아진 정신과 별개로 들끓는 분노 탓이다.
빛돌이.
정서도,언어도 달라서 제대로 대학조차 나누지 못했지만...
소중한 동료였다.
분명히 교감하며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빛돌이의 목숨을 앗아간 빛의 정령왕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템빨신! 냉정하게 생각해라!!]
빛의 정령왕이 다급히 소리쳤다.
[나를 해치는 순간 어머니와 화해할 기회는 영영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네 어머니가 누군데.”
[이놈이 끝까지...!]
으르렁거리는 빛의 정령왕의 살의가 폭발했다.
그의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그리드를 꿰뚫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광속.
극히 소수의 주신을 제외하곤 대응하지 못할 ‘속도’가 그의 가장 큰 무기다.
빛의 정령왕 스스로 자부하기에,만약 자신이 처음부터 그리드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리드는 진즉에 사늘한 주검이 됐을 터였다.
한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막말을 지껄여대는 태도가 괘씸했다.
[수준이 낮은 탓에 내 자비를 느끼지 못하는 네놈이 가없을 지경이다.]
빛의 정령왕이 미련을 버렸다.
어떻게든 그리드를 죽일 각오로 빛의 형상을 학살로 가꿔갔다.
빛에 ‘쏘아진다’는 개념을 더해 속도의 권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과연 한 차원의 지배자답게 모든 행동에 의미가 담겼고 의미가 곧 실재적인 힘이 됐다.
하지만 빛의 정령왕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었다.
그는 그리드를 쉽게 죽이지 못한다.
만약 처음부터 그리드를 죽이는 걸 목표로 삼았어도 결과는 같다.
세상 모든 초월적 존재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
그리드는 여태껏 매일 충돌해왔다.
평화로운 시기를 거의 겪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처맞고,때리며,막말로 강철처럼 연마됐다.
화룡 이프리트가 그리드를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대한 자’라고 평가한 이유다.
영겁의 삶을 누리며 단지 긴 세월 존재함으로 인해 격을 쌓아온 기존의 초월자들과 그리드는 궤가 달랐다.
결코 만만하게 봐선 안 됐다.
뻐어어어엉!!
실타래가 풀리듯 갈라진 수백,수천 줄기의 빛이 그리드의 전신에 구밍을 꿰뚫었다.
레베카의 적통을 자처하는 빛의 정령왕의 격이 탐욕마저 부순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쓰러지지 않았다.
2종류의 백호 자세,폭풍전야,최초의 황제 등.
온갖 저력을 발휘해서 이를 악물고 충격을 버렸다.
쿠웅!!
양손에 거머쥔 검을 놓치지 않고 내딛는 한 걸음이 무겁다.
꺼지지 않고 도리어 형형한 그리드의 두 눈이 빛의 정령왕에게 은근한 공포를 선사했다.
‘쓰러지지 않는다고?’
빛의 정령왕의 이성이 그리드를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떠나고 싶어도 떠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베리아체의 피를 이은 주제에 신의 하수인이 된 마법사가 광범위하게 펼쳐놓은 중력장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정 범위 바깥으로 위치를 옮기는 순간 빛이 흐려지며 감속했다.
화염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공간.
바로 이곳,템빨신의 심상을 벗어나는 순간 빛의 정령왕은 더욱 더 약해질 것이다.
빛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어둠과 룬어에 집어삼켜질 정도로.
‘우선 마법사를 죽여야 살 길이 생긴다.’
판단하는 빛의 정령왕이 황당해서 실소를 흘렸다.
태초 이전부터 존재했던 빛.
그 빛의 근원 중 하나라고 자부해온 자신이 고작 이딴 곳에서,겨우 세 놈을 상대로 위기를 겪다니?
템빨신의 도발이 뇌리에 멤돌았다.
‘레베카 여신이 정녕 나의 어머니가 맞나?’
당연하게 믿어온 진실에 의문을 품게 된 순간.
___!
거센 풍랑을 맞은 것처럼 빛이 출렁였다.
정령왕의 감정에 동조한 빛이 약해졌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막 그리드가 밟은 진각이 발생시킨 힘의 파장이 빛을 밀어낸 것이다.
원리는 단순했다.
그리드에게 짓밟힌 대지가 갈라졌고,충격에 솟구친 지반이 빛의 투과를 막는 방벽이 됐다.
단지 그뿐이었다.
[...?]
빛의 정령왕이 한 발 늦게 흠칫 놀랐다.
그리드의 모습이 사라져서다.
어지럽게 솟구친 방벽들이 시야에 결손을 일으킨 순간 그리드의 움직임을 놓쳤다.
낙(落).
그리드는 갈라진 대지의 틈새에 떨어져 있었다.
쿠르르르릉!!
정령왕이 딛고 선 땅이 우그러졌다. 바다의 한가운데 발생한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삽시간에 새겨졌다.
수십 킬로미터 두께의 지각(地穀)이 통째로 헤집어진 여파다.
룡(龍).
그리드가 문양의 중심을 꿰뚫고 승천했다.
‘무식한 놈이?’
빛의 정령왕이 질색하는 것과 별개로 조소했다.
빛은 베이지 않는다.
지금 그가 경계하는 대상은 브라함과 지크지,그리드가 아니었다.
필시 그랬는데.
서걱!
빛의 정령왕의 시야가 반으로 갈라져서 어긋났다.
방벽에 가로막혀 응축 됐던 빛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
빛의 정령왕이 경악했다.
힘을 갈망하는 세상 모든 존재가 상상하고 염원하는 무신.
유일신 치우의 모습이 한 순간 그리드와 겹쳐보였던 까닭이다.
극(極).
6개의 호흡으로 분절 된 새로운 융합 검무가 무신의 일격을 완벽하게 체현했다는 증거다.
짤랑一
이곳에 존재할 리 없는 고즈넉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드는 당연히 환청인 줄 알았다.
마치 장송곡을 들은 듯,크게 동요하는 빛의 정령왕의 기색을 읽기 전까진.
[<궁극의 무(武)>가 대상을 억압합니다.]
무신을 만난 자.
무신 치우가 부여한 가호가 그리드를 치하하듯 발생했다.
대상의 종족,지위,격을 무시하고 저항과 회복이 불가능한 스턴을 거는,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 중 가장 위대한 힘이 빛의 정령왕을 경직시켰다.
멈출 리 없는 빛이 멈춘 순간이다.
온갖 시각 정보에 혼돈이 생겼다.
마치 공허가 강림한 듯했다.
꽈차차차창!!
멈춘 상태의 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템빨신의 신성을 등에 업은 연(聯)과 살(殺)이 무적을 자처해야 옳을 대상을 처참하게 분쇄한 여파다.
무(無)가 빛이라는 현상을 부정했다.
[믿을 수 없…]
경악,혼란, 공포.
그리드의 뇌리에 직접 전달되는 빛의 정령왕의 사념이 덧없이 흩어졌다.
검무가 연계되는 과정에서 응축된 검기를 한꺼번에 토해낸 파(派)에 휩쓸려나간 탓이다.
[새로운 융합 검무 <낙룡극연살파〉를 창조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한계를 초월한 당신의 무위에 찬사를 보냅니다.]
[<낙룡극연살파〉에 강력한 가호가 내립니다.]
짤랑.
재차 울리는 방울 소리.
무신 치우가 지켜보고 있음을 명확하게 느낀 그리드가 왼손의 검을 낙월검으로 스왑했다.
궁극의 무의 영향에서 벗어나자마자 순식간에 다시 하나로 뭉치는 빛의 정령왕을 또 한 번 반으로 갈랐다.
[크아악…!]
하지만 과연 빛은 특별했다.
낙월검에 이어 무패왕의 검술과 5융합 검무들을 사용해 몇 번을 다시 베도 회복하길 반복했다.
그리드의 감각에도 잡히지 않는 속도로 분사될 때마다 그리드를 녕마로 만들었는데,
탐욕에 <재구성>기능이 없었다면 매우 큰 위기로 작용했을 터였다.
“잘 버텼다.”
그리드가 한계에 직면했을 때 브라함과 지크가 활약해주었다.
룬과 결합 된 중력장들이 블랙홀로 변해 빛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빛의 정령왕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하지만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그리드의 공격 스킬 대부분이 쿨타임에 걸렸고 자원도 바닥을 기었다.
마무리 일격을 가할 여력이 없었다.
그때였다.
[놈…! 이놈이!!]
브라함에게 기습을 시도하던 빛의 정령왕이 갑자기 멈춰 서서 홀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빛의 정령왕의 내부에서 어떤 희미한 기척을 느꼈다.
소멸한 줄 알았던 빛돌이의 기척이었다.
빛돌이가 여태껏 섬겨온 왕이 아닌 그리드를 돕기 위해 마지막 의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그리드가 그 의지에 호응했다.
타인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싸워온 존재답게 용기를 쥐어짰다.
푸우욱!!
[크아아아아악!!]
빛이 꺼졌다.
[빛의 정령왕을 해치웠습니다!]
[다섯 속성이 지탱하는 정령계의 법칙에 의거하여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합니다.]
드디어 끝났다...
그대로 무너지는 그리드의 몸을 누군가가 지탱해주었다.
방긋 웃는 표정을 짓는 귀여운 정령이었다.
작고,형체가 흐릿했지만 무한한 힘이 담겨있었다.
“빛돌이...? 설마 빛돌이야?”
무(無)의 정령왕.
새롭게 탄생한 정령왕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이제부턴 무돌이에요.]
"..."
애매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의 몸 위로 레벨 업을 상징하는 빛의 기둥이 수십 회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