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8화
이름은 때때로 큰 힘을 갖는다.
존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템빨왕, 템빨신, 템빨제, 그리고 그리드.
그리드를 뜻하는 모든 이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뭐지?’
불의 정령왕이라는 이름 또한 같았다.
세상 모든 불씨의 근원.
불이 있는 곳에는 응당 그의 이름이 뒤따랐다. 결코 소멸할 수 없었다.
한데.
‘대체 뭐냔 말이다?’
조금 전 불의 정령왕은 소멸의 공포를 느꼈다.
주제 파악 못하는 인간 놈의 검에 베인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더니,허망하게 흩어지는 불꽃을 확인하고 죽음을 직감했다.
휘몰아치는 검풍이 워낙 거셌던 까닭이다.
‘검을 휘두른’ 인간의 동작이 발생시킨 물리적인 현상이 무지막지하게 강력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더 황당했다.
‘괴력난신이라고?’
불의 정령왕은 종종 인간 세계를 체험해왔다.
수백 년에 한 번 꼴로 자신과 계약을 맺을 자격을 지닌 인간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결코 인간계에 무지하지 않았다.
하여 주제파악 못하는 인간들이 괴력난신이란 표현을 쉽게 남발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신’을 직접 체험한 불의 정령왕은 괴력난신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를 절실히 안다.
불의 정령왕이 떠올리는 괴력난신과 인간들이 말하는 괴력난신은 엄연히 다른 개념인 것이다.
무감한 손짓으로 재해(災害)를일으키는 존재.
지금의 그리드가 바로 정령왕의 뇌리에 박힌 괴력난신이었다.
“쉬엄쉬엄 해. 자,김밥 먹어.”
“웬 김밥이에요?”
“내가 방금 만들었어. 떠나기 전에 장을 좀 봐왔거든.”
[...]
잠시 혼절했다가 의식을 되찾은 불의 정령왕.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몹시 낯설었다.
한 쌍의 인간이 바람의 정령왕을 돗자리로 이용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순환하는 미풍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꼴이 마치 신선놀음을 즐기는 듯했다.
그들 곁에 선 물의 정령왕은 맑은 술을 주조하는 분수로 전락해 있었고,
땅의 정령왕이 제 몸으로 빚은 식기엔 희귀한 요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
불의 정령왕이 황당해서 넋을 잃었다.
반면 그리드와 유라를 감싼 분위기는 훈훈했다.
매 끼니를 빵으로 대충 때워온 그리드가 친히 장을 보고 음식을 마련한 상황이다.
어디까지나 유라를 위해서였다.
그리드는 유라와 함께하는 여정동안 그녀가 한 끼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미식 일정을 계획했다.
유라는 감동했고 그리드는 보람을 느꼈다.
요리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리드는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손재주와 감각을 겸비했으니까.
[〈고급 요리> 스킬이 개방되었니다.]
그리드의 손재주는 김밥이라는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밥을 감싼 김은 실크처럼 반질거렸고,속 재료의 색감은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손재주의 힘이다.
김을 바르게 다듬는 솜씨부터가 미슐랭 3스타 세프의 솜씨를 넘어섰다.
게다가 그리드는 초월적인 감각의 소유자였고 감각엔 당연히 미각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간을 보는 솜씨는 실로 완벽했다.
세상 모든 요리사가 스승으로 섬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처음 만들어본 김밥에 의해서 요리 스킬,그것도 고급 요리 스킬이 개방 된 이유다.
“이 김은 뭐죠? 바삭거리면서도 감태처럼 사르르 녹네요?”
“극검이 추천해준 최고급 김이야.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날 갈레스트의 해풍으로 말린
김이라는데,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까 어렵게 공수해온 보람이 있네.”
“치아에 닿는 순간 낱낱이 흩어지는 밥알과 속 재료들이 혀의 모든 면에 맛을 전달해요.
입 안에서 맛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지는 것 같아요. 김밥이라는 요리가 갖는 강점이 극대화 됐네요.”
“그,그래...?”
그리드는 사실 미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풍족하게 자라지 못한 까닭에 다양한 맛을 체험하지 못했고 입맛은 자연히 조미료에 길들여졌다.
수십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값 비싼 육수보다 라면 국물을 더 맛있게 느꼈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입맛도 유라와 지슈카 덕분에 조금씩 변해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두 사람과 함께 자주 식사를 즐기면서 미각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여태껏 몰랐던 맛을 체험하고,익숙해지면서 다양한 맛을 추구하게 됐다.
그런 소중한 경험들이 요리에 반영이 된 듯했다.
Satisfy에만 존재하는 다양한 식재를 활용해서 김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Satisfy 가 미식의 천국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그리드가 Satisfy에서 식사를 소홀히 했던 이유는 단순히 바빠서 였다.
할 일은 태산 같이 많은데 일일이 식사를 챙기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앞으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되도록 꼭 챙기자고 다짐했다.
지혜의 탑에서 즐겼던 만찬이 교훈이 된 것이다.
손주 챙기듯 밥을 먹였던 베티의 따뜻한 마음씨와 아벨리오가 체험시켜준 미식의 향연에서 그리드는 상당히 큰 행복감을 느꼈다.
그 행복을 다른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추억으로 삼고 싶었다.
“화이트 와인이 어울리겠어요.”
“그래? 물의 정령왕.”
[이미 준비했답니다.]
쪼르르...
땅의 정령왕이 빚은 술잔에 물의 정령왕이 투명한 와인을 채운다.
세계수의 가지를 한 바퀴 감싸고 돌아온 상쾌한 미풍은 바람의 정령왕이 준비한 서비스였다.
현실에서는 억만금을 줘도 체험하지 못할,말 그대로 환상의 파인 다이닝이었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유라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리드가 불의 정령왕을 불렀다.
조금 전의 다틈은 잊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설득 할 의도였다.
정령왕들과 가까이 지내서 나쁠게 없었으니까.
[넵! 어떤 고기를 구워드릴깝쇼?]
"..."
굳이 설득 할 필요가 없겠다.
냉큼 달려와 불꽃을 살랑거리는 정령왕을 보면서,그리드는 침묵했다.
***
[빛의 정령왕이 당신의 부름을 무시합니다.]
세계수의 숲에 머문 지 어느덧 사흘째다.
요즘 요리에 취미를 붙인 그리드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고,엘프들과 세계수는 친절했지만 유라의 마음은 점차 불편해져갔다.
빛의 정령왕이 소통을 거부했다.
평소보다 차가운 태도였다.
정령왕을 얻고 발생했던 패시브 스킬까지 전부 비활성학 됐을 정도다.
“괜찮아. 여유를 갖자. 너와 함께라면 나는 여기서 몇날며칠을 더 지내도 좋으니까.”
조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유라를 그리드가 다독여주었다.
방금 막 불의 정령왕과 합작해서 만든 꼬치구이를 건네주면서다.
[빛의 정령왕은 예로부터 싸가지가 없었소. 정령계에서 오직 자신만이 레베카 여신의
적통이라고 믿는 까닭이오. 만사가 제멋대로여서 우리와도 자주 다투곤 했는데,
이참에 피력난신께서 참교육을 시켜주시면 참 좋을 것 같소.]
불의 정령왕도 덧붙였다.
빛의 정령왕이 잠잠한 이유는 유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유라는 정령왕들에게도 큰 감사를 느꼈다.
정령계에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 주겠노라 약속했으니까.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요.”
“마침 잘 왔습니다. 여러분 몫도 준비해놨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엘프들도 그리드가 만드는 요리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육식을 꺼려했지만 최근엔 오히려 즐겼다.
정녕 자연을 소중히 여긴다면,동물이 아닌 식물을 먹는 게 도리어 잘못된 일 아니냐는 그리드의 순수한 질문을 받은 뒤부터다.
식습관의 변학 때문인지 엘프들의 늘씬한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우락부락해졌다는 게 아니라 말랐던 허벅지에 살집이 붙고 탄탄한 십일자 복근이 생긴 수준으로,날렵한 여전사의 느낌을 줬다.
실제로 육체능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어쩌면 엘프는 식습관을 제한해서 스스로의 힘을 봉인했던,구도자에 가까운 일족이 아니었을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보게 됐을 정도다.
‘고마운 사람들.’
그리드가 차린 식탁 앞에 모인 엘프들과 정령들을 보면서,유라는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냠.
어느새 식은 꼬치구이를 입에 한입 베어 물어본다.
어젯밤 현실에서 그리드와 단둘이 먹었던 밥과 비교하면 덜했지만,그래도 맛있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엘프들의 미소 덕분일 수도,은근히 격려해주는 정령왕들의 배려 덕분일 수도 있었다.
‘그래,초조해하지 말자. 다 잘될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
정작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의심해서야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다.
마음을 다잡는 유라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가장 빛나는 별이 상실했던 것.
그리드의 애매모호한 태도 탓에 한동안 곤두박질 쳤던 유라의 자존감이 이 순간 회복됐다.
어깨를 감싸 안는 그리드의 손길을 느끼면서다.
“아무래도 자네 때문인 듯하네.”
“역시 그랬습니까.”
빛의 정령왕이 불통하는 원인은 그리드에게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드는 아스가르드와 적대하고 있는 입장이니까.
레베카의 적통을 자처하는 빛의 정령왕이 그리드에게 적개심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는 빛의 정령왕이 유라와의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어.”
지난 5일.
잠자코 추이를 지켜보던 파일볼프가 신중하게 내놓은 의견이다.
좌시하지 못한 그리드가 세계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당신께서 직접 정령계로 넘어가 빛의 정령왕을 설득하시죠.
“제가 직접 정령계로...”
-마침 다른 정령왕들은 당신께 협조적이니 정령계로 넘어가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을 겁니다.
“빛의 정령왕을 설득하는 방법은요?”
-불의 정령왕을 설득한 것과 같은 방법을 쓰십시오. 제가 봤을 땐 그 방법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
정령왕들은 대화보다 폭력에 더 매력을 느끼는 걸까.
진지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소환에 성공했어요.”
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리드가 고개를 돌리자 상처투성이의 유라가 보였다.
한 손에 빛의 정령왕의 멱살을 붙잡은 채로.
‘소환...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