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83화 (1,471/1,794)

74권 6화

거인족은 천 년도 더 전에 멸망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그들의 문명은 완전히 소실됐고 당대의 인류는 거인족의 역사를 알 도리가 없었다.

스톰브링거,아르고,신의 원 등등.

악마들을 멸하고 용과 맞섰던 거인족의 위대한 보물들이 잊힌 이유다.

“신의 원은 거인족의 지보 중 가장 뛰어난 범용성을 자랑하는 만큼 구조가 핑장히 복잡하다. 수리가 쉽지 않아.”

"..."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신의 원의 설계를 주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나니까.

“오오...!”

프론잘츠 형제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소멸한 줄 알았던 역사를 마주한 순간이다.

감격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차가운 금속으로 짜인 본인의 가슴을 애무하듯 쓰다듬는 파일볼프의 기행이 더 이상 언짢지 않았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짓을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짐승이 싸지른 대변의 모습으로 악취를 풍겼어도 가치 있을 인물인데.

“다만 문제가 있다. 신의 원은 수십 명의 과학자가 평생토록 쌓아올린 지식으로

구축한 첨단기술과 세계수의 호의로 얻은 정령의 힘을 더해 32종의 금속을 엮어

만든 보물이라는 점이다. 무궁무진한 계산이 진리가 되어 담긴 탓에 작은 어긋남만

있어도 재조정이 필요하지.”

말인 즉.

“신의 원을 고치기 위해선 다시 만드는 개념에 가깝게 접근해야한다는 의미다.

재차 세계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하는데 과연 그 늙은 나무가 도움을 주려고 할까?

숲에 발이나 들일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세계수는 평화에 집착하는 성향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탑의 역할을 설명하면 협력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파일볼프는 탐욕으로 만든 마장기에 빙의하여 부활했다.

완전히 그리드의 통제 하에 있다는 의미로,그리드가 탑에 오를때 동행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노에,랜디,템빨골들과 비슷한 입장인 셈이다.

하여 프론잘츠 형제는 그에게 탑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지혜의 탑의 역사와 역할을 상세히 설명한 직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일볼프는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는 늙고 병들었다. 위명에 걸맞지 않게 나약한 지 오래야.

신의 원에 힘을 보태려면 남은 생의 절반은 손해를 보겠지.”

“그런...”

지상에서 세계수의 역할은 무척 중요했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롭다.

세계수가 사라지는 순간 세상의 공기는 탁해질 것이고 자연이 활력을 잃을 것이다.

세계수의 생명을 깎아가면서까지 신의 원을 수리할 가치가 있을까?

세계수 본인이 판단 할 문제였다.

탑이 함부로 저울질해선 안 됐다.

아무래도 신의 원의 수리는 요원한 듯하다.

프론잘츠 형제가 생각할 때였다.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요.”

잠자코 있던 그리드가 끼어들었다.

“신의 원을 만들 때 필요한 건 ‘세계수의 힘’이 아니라 ‘정령의 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왜 세계수의 수명이 깎인다는 겁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파일볼프는 ‘세계수의 호의로 얻은 정령의 힘을 더해’ 만든 것이 신의 원이라고 설명했으니까.

라드볼프가 나섰다.

“아무래도 정령왕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그것도 다수의 정령왕이.”

파일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총 다섯의 정령왕을 소환해서 힘을 빌려야하는데 그건 세계수에게도 큰 부담이야.

특히 빛의 정령왕이 워낙 고고한 점이 큰 문제다.”

“빛의 정령왕...?”

“들어본 적 없겠지. 안 그래도 만나보기 힘든 정령,그중에서도 가장 드문 빛의 정령들에게도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은 지극히 적을 것이다. 놈들은 오직 마기의 정학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계엔 별 관심이 없...”

말하던 파일볼프의 붉은 안광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불쑥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 빛돌이.

그리드와 계약한 ‘상급 빛의 정령’을 쫓는 것이다.

“아... 자네는 빛의 정령왕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겠군. 만나보진 못했을 테지만...?”

정정하던 파일볼프가 재차 말문을 닫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그리드의 반응에서 이질감을 느낀 까닭이다.

원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기에,잠자코 기다려보았다.

그리고 곧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제 연인이 빛의 정령왕하고 계약했는데... 그것도 예전에.”

“뭣...!”

“그게 무슨…!”

프론잘츠 형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툭 튀어나온 눈구덩이 아래에 박힌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풀었다.

파일볼프 또한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 말이 사실인가? 연인? 매일 붙어 다니는 여기사를 말함인가?”

“아뇨. 메르 말고.”

“아,얼마 전에 봤던 궁성을 말하는 거군. 성격이 화통한 것이 정령왕과 교감할 만도..."

“아니,지슈카 말고 유라요. 지옥에 머물고 있어서 본 적이 없으시구나.”

“지옥에?”

연인의 숫자가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점에 대해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드는 황제이고 신이므로 삼천궁녀를 거느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인들은 지옥이란 단어에 주목했다.

“설마... 설마 데빌 슬레이어?”

“맞습니다.”

“허...! 그렇군! 빛의 정령왕이 혹할 만해!”

프론잘츠 형제가 그리드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메르세데스,지슈카,유라.

그리드의 여자들이 죄다 전설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한 시대에 한 명 탄생하기도 힘들 전설 셋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과연 그리드는 보통 능력자가 아니었다.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엔 안들었다.

반면 파일볼프의 생각은 달랐다.

“근데 왜 탐욕을 놔두고 인간하고 교제하는 거지? 기껏 지상최고의 광물을 만들어놓고,굳이 왜...?”

"..."

그리드는 무시했다.

* * *

상처 입은 드래곤은 보기 드물다.

드래곤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는 건 대부분 고룡에게 당했다는 의미가 되며,

고룡의 표적이 되고도 살아남는 드래곤은 거의 없었으니까.

말인 즉 이프리트는 천하에 둘도 없을 영약이었던 것이다.

한데 사냥에 실패하고 말았다.

원인은 그리드였고,그리드를 자유롭게 놓아준 미르에게 절대적인 책임이 있었다.

“태형으로 다스리도록 하죠.”

사건의 규명을 끝낸 소별왕이 제안했다.

삼사를 만족시키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삼사는 여태껏 없던 ‘광신광룡’을 목격하고 패주한 까닭에 격을 크게 잃었다.

앞으로 족히 반년은 요양해야 할 처지였다.

한데 이번 사태를 만든 미르를 고작 태형으로 다스리겠다고?

“안 될 말씀입니다.”

“한울을 배신한 아이를 어찌 살려두시겠다는 겁니까?”

툭,툭,툭,태사의를 두드리던 규칙적인 소리가 뚝 멎었다.

“허면 죽이라고요? 삼사께서 그만한 아이를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시는 말씀이겠죠?”

소별왕의 얼굴엔 여전히 상냥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6개로 나뉜 동공 전부에 삼사의 모습이 담기고 말아서,삼사는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지상에서 천사를 수급할 수가 없어요. 직접 만들고 육성하는 수밖에 없으니

한 명,한 명이 귀중한데 대책도 없이 죽이자고 지껄이시면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송구합니다... 저희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실언을...”

시선을 내린 삼사가 몸을 덜덜 떨었다.

태초신 한울이 가장 먼저 만든 주신들조차 한울의 피를 직접 이은 소별왕 앞에선 작아지는 것이다.

“미르에겐 충분한 경고가 될 테니 염려 마십시오.”

왼쪽 눈에 4개,오른쪽 눈에 2개.

태극을 반으로 가른 모양새로 분열했던 소별왕의 눈동자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흑요석보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다.

민간에서 떠올리는 인자한 신의 모습이 형상화 된 느낌이었다.

***

"..."

형틀에 묶여 볼기를 얻어맞는 미르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사라져갔다.

상실과 망각으로 엮인 매다.

미르가 그간 쌓아온 소중한 기억들과 감정들이 희미해졌다.

* * *

유라는 빛의 정령왕의 존재를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정령왕의 도움을 받은 횟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일단 소통이 안 됐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활용하기 힘들었다.

정령왕과 계약하고 얻은 스킬 중 상당수가 제멋대로 비활성화되기 일쑤였다.

재사용 대기 시간부터가 ‘내킬 때’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인지 통제가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현상이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유라는 그리드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세계수 앞에서 정령왕을 소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었지만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부탁을 받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고,빛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했으니까.

‘반드시 해낼 거야.’

그리드,파일볼프,유라.

불편한 동행이 시작됐다.

유라는 자꾸만 거친 숨결을 토하며 본인의 몸을 쓰다듬는 금속 로봇이 핑장히 거슬렸다.

지옥에서 추악한 마물과 악마를 셸 수 없이 만나온 경험이 무색하게도 비위가 조금 상했다.

그런 유라를 파일볼프가 타일렀다.

“무릇 남자란 자신의 몸을 사랑해주는 손길에 호감을 느낀다네. 그대처럼 목석 같은 여자는 오래토록 사랑 받기 힘들어."

"...!?"

변태가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였다.

하지만 유라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주인의 생각을 어느 정도 대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큰 위기의식을 느낀 그녀가 그리드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

은근히 허리와 허벅지를 스치는 유라의 어설픈 손길이 그리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이곳은 지각 변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군요."

“당연하지. 세계수는 하늘을 떠받치는 신물이니까. 세계수가 곧 세계의 중심이고 중심이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일세."

세계수의 숲은 예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안도하는 가운데 달려온 엘프들이 일행을 반겼다.

"템빨신을 뵙습니다.”

그리드와 템빨단은 세계수와 엘프들의 은인이었다.

템빨단원들이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이유다.

최근엔 다크 엘프 군단을 격퇴하고 인마대전을 승리로 이끈 템빨제국을 향한 엘프들의 호감도와 존경심은 최대치에 이르러 있었다.

“귀 긴 놈들의 저런 태도는 처음보는군...”

그리드를 마주칠 때마다 공손히 읍하는 엘프들의 모습에 파일볼프가 감탄했다.

콧대 높은 엘프의 성격을 반증하는 반응이었다.

“신의 원을 재구성하기 위해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소. 다섯 정령왕의 소환을 요청하는 바이오.”

세계수 앞에선 파일볼프도 예의를 갖췄다.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요청했다.

별 효과는 없었다.

-저는 이미 먼 과거에 거인족과 의 언약을 지켰습니다. 파일볼프 당신에겐 제게 요청할 권리가 없어요.

“말이라도 들어주시오.”

엘프들과 유라를 물린 파일볼프가 구구절절 설명했다.

지혜의 탑의 존재와,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결사들의 노고를 논했다.

유라가 빛의 정령왕과 계약했으니 당신의 부담이 적을 거라는 말도 당연히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망했군.”

예상했던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파일볼프가 침음했다.

프론잘츠 형제가 지켜온 낡은 팔찌를 씁쓸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다.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

조국의 멸망을 지켜본 형제.

단 둘만 남아 누구보다 고독하고 힘들었을 톈데도 인류를 위해 싸워온 그들이 파일볼프는 자랑스럽고 딱했다.

조금쯤은 도움이 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세계수는 결국 자연일세. 인간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한계가 있지.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더 이상 있어봤자 시간 낭비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파일볼프가 돌아가자고 말하는 그때였다.

“세계수 님.”

그리드가 직접 나섰다.

고개를 빳빳이 들어도 끝을 볼수 없는,천공을 가로지르는 그 신령스러운 거목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재고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세계엔 결사들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그들이 더 강해지길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

부탁하는 그리드도,포기하고 있던 파일볼프도 당황했다.

세계수가 재차 말했다. 부드러운 음성이 더없이 상냥했다.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섯 정령왕을 호출하겠습니다. 제가 시드는 한이 있더라도,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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