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권 3화
“증폭공(增幅公).”
베티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바알과 계약한 인물이다.
그녀의 재능이 바알의 관심을 사로잡을 정도로 출중했다는 뜻이다.
바알이 내민 손을 거부하지 못했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대가로 얻은 재능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녀의 실력은 현재도 가시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탑의 결사라는 지위.
그녀는 바알에게 버려지고도 탑의 일원이 된 지고의 실력자다.
그 힘의 원천 중 하나가 바로.
“증폭공의 마법과 기술은 이론보다 2배 더 강해.”
스킬의 위력 증대.
증폭의 권능이다.
타인과 똑같은 공식을 봐도 다르게 재단하는 베티의 지식과 사상이 만든 신비였다.
‘브라함의 강화 마법과 닮은 듯 다르다.’
강화 마법의 술식은 '마법’의 위력을 3배 이상 증폭하는 반면 증폭공의 해석은 ‘모든 종류의 기술’ 위력을 2배로 증폭시킨다.
범용성이 뛰어난 대신 한도가 낮았고 부작용도 있었다.
위력뿐만 아니라 재사용 대기 시간까지 2배로 늘린다는 점이다.
굳이 차등을 매긴다면,베티의 재능이 브라함의 재능보단 살짝 못하다는 증거가 됐다.
‘베티가 못난 게 아니라 브라함이 대단한 거야.’
브라함의 높은 콧대가 뭉개질 일은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 인물은 역사상 무무드 한 명이 유일하다.
‘무무드... 지금쯤 그도 윤회의 강을 떠돌고 있겠지.’
지옥의 진실을 알게 된 브라함은 눈에 티게 말수가 적어졌다.
무무드
애석하게도 단명한 그의 짧은 삶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어려서 고아가 됐고 이후 유일하게 의지했던 스승에게 배신당했다.
죽어선 언데드가 되는 치욕을 겪은 그는,드디어 원념에서 해방되고도 영면에 들지 못했다.
이 세계의 인간에겐 영면을 누릴 권리가 없었으니까.
브라함도 예측하지 못했던 세상의 순리다.
바알이 왜곡시킨 지옥이 만든 저주가 무무드를 마지막 순간까지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브라함은 분노하고 있었다.
[퀘스트 보상으로 칭호,<증폭공〉을 얻었습니다.]
< 증폭공 >
활성화 시,사용하는 마법과 스킬의 위력을 2배로 증폭시킵니다.
단,소모 자원과 재사용 대기 시간도 2배 증가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을 단축하는아이템과 스킬의 효과를 65퍼센트만 받습니다.
심플하고 강력한 새로운 공의 칭호.
신장과 신격의 효과가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지만 단기결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원할 때 일격필살의 위력을 낸다는 건 무조건 활용도가 높았다.
한층 더 강해졌음을 느낀 그리드가 심유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이 힘으로 반드시 바알을 죽이겠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베티를 위한 선언이었다.
오늘 베티와 함께하면서 그리드는 눈치 채고 말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빛을 제대로 투영하지 못한단 사실을.
가판대 아래에 떨어져 나뒹구는 썩은 생선의 눈처럼,그녀의 두 눈은 죽어있었다.
로브에 가려진 몸도 마찬가지다.
“응... 힘내.”
대답하는 베티의 입가가 작게 뒤틀리며 경련했다.
미소를 짓기 위한 노력 같았다.
하지만 차라리 눈물이 어울릴 표정이다.
웃는 방법조차 잊은 건가.
그리드는 베티의 떨리는 작은 손을 꽉 붙잡아주었다.
“제가 노력하는 만큼 당신도 힘내주세요.”
* * *
드래곤.
성숙하지 못한 절대자들은 잠언없는 파괴를 반복해왔다.
세상 만물을 하찮게 깔보는 그들에게 인류가 바랄 건 없었다.
재앙. 그 이상도,이하도 아닌 존재들.
그들을 상대로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복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그들은 섬길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한데 오늘.
"..."
하야테는 목격하고 말았다.
드래곤과 교감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그건 하야테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광경이었다.
드래곤은 이혜할 수 없으며 공감이 불가능한 생물이다.
차라리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고 피하는 게 옳다.
수천 년의 경험과 공부로 정립시킨 탑의 논리가 깨지고 말았다.
절망이 아닌 경사였다.
"...희망,인가."
드래곤과 교감하는 존재.
그리드를 떠올리는 하야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베티는 그리드에게 증폭공을 ‘양도’한다고 표현했었다.
하지만 증폭공은 그녀가 만든 권능에서 비롯한 칭호다.
칭호를 양도한다고 해서 권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안도한 그리드는 베티와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아그너스였다.
그리드는 베티와 여러모로 닮은 아그너스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건지 궁금했다.
“바알과 계약하는 사람은 대가로 영혼을 지불해야하지만 그건 죽었을 때의 이야기야. 산 채로 계약이 파기당할 경우엔 바알에게 영혼을 요구할 권한이 없어.”
심지어 바알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계약을 지키지 못했으니 오히려 보상을 줘야 옳았다.
하지만 바알은 만악의 근원이다.
약속 따위 멸시하고 조롱한다.
다른 악마들과 달리 계약의 강제성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격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권한이 없으니까 억지로 영혼을 강탈하려고 시도해. 하지만 영혼은 살아있는 육체로부터 쉽게 박리되지 않아. 영혼보다 육체가 먼저 뜯겨나간 거야."
"..."
베티가 본인의 가슴을 가리켰다.
언젠가 보여줬던 몸을 떠올리라는 듯이.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죽었어.”
“굳이 따지면... 리치인 겁니까?”
“조금 달라. 리치를 유지하는 건 마력과 뚜렷한 목적의식이지만 우리는 영혼의 가역성으로 유지돼.”
“영혼의 가역성...?”
“바알이 강탈을 시도한 탓에 영혼이 헐거워졌어. 헐거워진 영혼은 다시 똑바로 자리 잡기 위해서
무한히 운동하게 되는데,이 성질이 유지되는 이상 우리는 죽지도,살지도 못한 채 계속 존재해. 소멸하지 않아.”
“그러다가 결국 영혼이 자리를 잡으면요?”
“그럴 일은 없어. 영혼이 기억하는 육체와 지금의 육체는 달라. 영혼이 똑바로 자리 잡지 못해.”
“...”
결론은,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축복이 아닌 저주일 것이다.
몸의 절반이 백골이 된 채로 누리는 영생이,산 자와 죽은 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누리는 영원이 기쁠 리 없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플레이어다.’
그리드는 베티를 동정하는 한편 아그너스를 경계했다.
‘플레이어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권한을 조금이나마 누리게 된다면...’
극단적인 예로 사망 페널티를 받지 않거나 덜 받는다면.
그건 엄청난 메리트다.
물론 바알의 계약자 시절과 비교하면 종합적인 혜택은 크게 떨어졌겠지만.
아그너스는 바알의 계약자가 되기 전부터,심지어 광증을 앓는 상태로도 한 자릿수 랭커였다.
그 압도적인 재능을 고려하면 여전히 상당한 저력이 남아있다고 봐야 옳았다.
‘뭐... 별 일이야 없겠지.’
템빨단이 아그너스를 견제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바알의 계약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아그너스에겐 자유가 생겼다.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됐다.
마냥 걱정하기 보단 한 번쯤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린과 로드를 구해줬던 녀석이니까.’
교황청 습격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그리드였다.
* * *
베티와 헤어진 후.
하야테에게 불려간 그리드는 또 다시 긴 대화를 나눴다.
동대륙에서 겪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이야기했다.
하야테는 대화 내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몸시 그윽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을 닮아있었다.
‘이렇게까지 큰 호의를 얻어도 되는 건가.’
선구자와 지혜의 탑은 상호 협력하는 관계다.
하지만 사실상 그리드는 활약 이상의 호의를 얻어왔다.
안 그래도 늘 도움을 받았는데 무한한 애정까지 보태지자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리드는 모른다.
용살자 하야테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악몽을 꿔왔다.
언젠가 ‘반드시’ 세상이 멸망할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부터 악몽이 끝날 것 같다는,그런 믿음을 품게 됐다.
그리드 덕분이었다.
그리드는 하야테의 은인인 셈이다.
“한데 쌍검술이라.”
그리드는 자신의 무용담을 숨기지 않았다.
양팔을 쓸 수 있었다면 미르에게 본때를 보여줬을 거라고 은근히 자부했다.
실제로 미르를 이길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민망해서였다.
이프리트를 마주하고 위축 된 이야기.
삼사가 한 번 손짓할 때마다 천지가 뒤집혀서 곤욕을 겪은 이야기.
미르가 사정을 봐준 이야기...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패배감만 느껴지고 부끄러웠다.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약간의 허풍을 가미했다.
하야테는 쌍수검에 관심을 보였다.
“쌍수검은 필시 강력하지만 약점이 명확하오. 능숙하게 다루면 2개의 검법을 동시에
구사하여 홀로 이인인 것처럼 싸울 수 있으나 필연적으로 경지가 낮아지지.”
실제로 역대 검성들과 하야테는 쌍수검을 애용하지 않았다.
한 자루의 검을 양손으로 다루는 편이 활용도가 높은 까닭이다.
검의 위치와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방식으로 검술을 심도 있게 구사할 수 있다.
그리드가 긍정했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검술에 딱히 재능이 없어서요.”
그리드의 검술은 빠르고 강력하다.
그게 전부다.
검을 왼손과 오른손에 번갈아가며 쥐는 식으로 혼란을 가미하거나,
불쑥 역수로 쥐어서 변수를 유발하는 등의 묘기를 쉽게 부리지 못한다.
사실상 스킬 의존도가 높았다.
그러므로 쌍수검에 집착해온 것이다.
파괴력을 극대학시키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
그 사실을,검성 비반은 즉시 간파했다.
“본인의 강점을 파악하고 연마하는 건 필시 옳은 수련법일세.
하지만 약점을 연마하여 극복하는 수련 또한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더 큰 성과를 얻기도 하고.”
“드디어 청소가 끝나신 겁니까.”
그리드가 비반을 반겼다.
청소가 아니라 정화 작업...
작게 중얼거린 비반이 걸레를 내려놓고 검파에 손을 얹었다.
“내게 자네의 쌍수검을 견식 할 기회를 주시게.”
비반은 그리드의 얕은 노림수를 파훼할 계획이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효용이 떨어지는 쌍수검의 약점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만들어서,그리드가 험난한 검도의 길을 걷게 하려는 의도다.
그리드의 재능이 점차 발전해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반은 그리드를 신뢰했다. 한계를 넘어 더욱 더 정진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므로 새끼를 벼랑에 떠미는 야수의 심정으로,그리드를 몰아붙 일 각오였다.
“영광입니다.”
마침 쌍수검의 위력을 제대로 시험해보고 싶었던 그리드가 흔쾌히 수락했다.
“장소를 옮기는 편이 좋겠소.”
하야테가 제안했다.
냉정,침착,통찰
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귀족적인 눈동자가 드물게 반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비무에 핑장히 큰 흥미를 느끼는 눈치였다.
“굳이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뭐... 방주인께서 원하시면 어쩔 수 없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비반의 태도가 몹시 거만했다.
전력이 아닌 ‘검술’을 겨루는 비무인 이상 손쉬운 승리를 확신하는 눈치였다.
자격 있는 자신감이다.
비반은 검성이기에.
더구나 그리드에겐 쌍수검이라는 제약까지 있었다.
비반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
“참관인 하야테가 비무의 결과를 공증하겠소.”
탑의 정상.
비스듬히 기운 원형의 옥상에 나란히 마주보고 선 그리드와 비반에게 하야테가 선포했다.
구젤의 검을 뽑아 든 비반이 하하 웃었다.
“됐습니다. 비록 비무라고 하나 템빨신의 패배를 굳이 기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오시게. 선공을 양보하겠네.”
“그럼 사양 않고.”
[아이템 합체의 효과로 <구젤의도>와 <무형검>이 하나가 됩니다.]
[아이렘 합체의 효과로 <염룡검>과 <열망의 무아검>이 하나가 됩니다.]
[<산용수상(山容水相)>의 효과로 쌍수검 페널티가 삭제됩니다.]
[칭호 <증폭공>이 활성화됩니다.]
그리드는 어디까지나 쌍수검의 위력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비반에게 이길 생각도,자신감도 없었다. 필요성조차 못 느꼈다.
그러므로 직진했다.
매끄러운 보폭에 더해,양손에 거머린 신검을 힘껏 휘둘렀다.
뒤는 없다.
후회를 남기지 않고자,일격에 전부를 담았다.
그 단순한 선택과 행동의 결과는 무지막지했다.
산용수상의 영향으로 양손에서 동시 전개 된 <초연살파극>과 <연살학극락>에 증폭공의 위력이 보태졌다.
"...!"
두 눈을 부름든 하야테가 급히 무한의 검기를 전개했다.
심상의 현현.
세 사람이 선 장소가 탑의 옥상이 아닌 하야테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무량대수의 검기가 펼친 장막 일부가 소멸해버렸다. 즉시 회복하긴 했지만 한 순간 명백히 심상이 무너졌다.
새어나간 충격파에 탑이 통째로 휘청거렸다.
단순히 물리력에 의해서였다.
석상룡 구젤이 최후의 발악으로 쏘았던 브레스를 웃도는 파괴력이었다.
“훌륭...하..”
“구에엑!”
비반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있었다.
기껏 신음을 삼켜놓고 입과 코에서 피를 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