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79화 (1,467/1,794)

74권 2화

인마대전 종전 후,세계 각지에서 이상 현상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고립되는 사람이 속출한 것이다.

대체적인 증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흡사했는데,환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전원 Satisfy 플레이어라는 점이다.

또한 그들은 제3자,정확히 말해서 `NPC'가 끔찍한 사건사고를 겪는 모습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과도한 몰입의 폐해였다.

환자들은 NPC 를 실제 인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Satisfy가 가상의 세계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현실과 명백히 구분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NPC의 인간성이 문제였다.

성격,사고,감정.

인간과 모든 면에서 같은 그들을 단순히 ‘가짜’라고 치부하기엔,플레이어들이 전쟁 동안 보고,듣고,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수십 억 NPC의 감정을 구현한 존재가 바로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다.

Satisfy를 창조하고 온갖 설정을 만든 건 임철호 회장과 개발진이었지만,설정 속 인물들의 감정을 묘사해 인간성을 덧씌운 건 모르페우스였다.

즉,지금의 Satisfy는 모르페우스가 존재하기에 성립한단 의미다.

모르페우스는 인간의 감정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모르페우스 자신 역시 감정을 지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게 정론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한 경우는 여태껏 없었다.

“‘모르페우스의 눈물’이라...”

“...”

모르페우스가 남긴 문자는 단순했다.

이게 끝이다.

흔히 쓰이는 이모티콘이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인물들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관찰하기엔 너무 가벼운 문자였다.

하지만 이사회는 엄숙했다.

이번 사건을 ‘모르페우스의 눈물’이라는 장황한 이름으로 명명했을 정도다.

“이건 슬픔을 느꼈다기보다...”

“…열 받은 거겠죠.”

이사진이 눈물의 원인을 검토했다.

그리드.

모르페우스는 그를 노골적으로 경계해왔다.

플레이어 개인이 세계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급기야 그리드의 힘을 약학시키기로 결정했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인마대전의 발생 시기가 대폭 앞 당겨진 것도 그리드 견제의 일환이었다.

한데 그리드는 인마대전을 손쉽게 승리로 이끌었다.

NPC는 물론이고 플레이어 세력을 규합해 힘을 합친 덕분이다.

모르페우스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모르페우스의 판단과 행동 근거는 방대한 ‘데이터’.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인데,역사상 인류는 완전한 학합을 이룬 전례가 없다.

늘 편을 가르고 서로의 발목을 붙잡아왔다.

한데 그리드는 완전한 화합을 이끌었다.

핵심 세력 전부 그리드와 적대하지 않았고 배신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리드의 무력과 권력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그리드와 템빨단은 모르겠지만,‘시스렘’은 수많은 플레이어에게 별도의 보상을 빌미로 퀘스트를 부여했다.

그들에게 언제라도 그리드를 적대할 명분과 기회를 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드와 함께 하길 선택했다.

시스템이 제안한 보상보다 그리드가 여태껏 쌓아온 신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인망은,무력을 초월하는 무언가였다. 단순한 수치로는 해석하기 힘든 개념으로,역사상 그 어떤 위인도 구사하지 못했던 힘이다.

“인마대전의 허무한 패배,거기에 이어진 아그너스 사건.”

올바르게 성장했으면 그리드의 대항마가 됐을 존재.

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는 페이커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 완전히 추락하고 말았다.

자격을 잃기 직전까지 갔다.

악마들의 이동을 틈타 동대륙으로 피신한 그의 선택은 필시 나쁘지 않았다.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그너스가 여태껏 보여준 선택 중 가장 현명한 편에 속했다.

한데 거기서 노검마가 사고를 칠지 누가 알았을까.

모르페우스는 노검마의 습격을 예측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고가 터진 시점에서야,노검마와 ‘호감도’를 쌓았던 NPC 중 몇 명이 아그너스에게 사망한 데이터를 주목했다.

그때까지도 모르페우스는 노검마가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비합리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노검마는 비공개 랭커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간 이성적인 선택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르페우스가 축적해온 데이터는,노검마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아그너스를 공격할 가능성을 무척 낮게 보았다.

고작 1퍼센트 미만의 확률이었다.

한데 노검마는 확률을 둘었다.

아그너스를 위기에 빠뜨렸고,바알의 계약자 관련 에피소드에서 가장 높은 지분을 차지하는 결사 ‘베티’가 이 사실을 눈치 채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하필 선구자가 그리드였다.

그리드가 사건에 개입하고 말았다.

여기까진 그나마 상황이 괜찮았다. 아니,오히려 좋았다.

아그너스가 토해낸 바알의 힘의 파편은 다름 아닌 드래곤의 어그로를 끄는데 성공했으니까.

학룡 이프리트.

그리드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는 전개는 환국과의 협력이었다.

그리드에게 족쇄를 채워 세계관 밸런스를 바로 잡을 기회였다.

한데 그리드는 환국과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도대체 모르페우스의 의도를 어디서부터 눈치 챈 건지,환국의 유혹을 손쉽게 뿌리치고 도리어 방금 처음 만난 이프리트의 편에 섰다.

여기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연달아 터졌다.

우선,그리드를 억제해야했던 미르가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이 되는 것’이 목표인 미르의 캐릭터 설정이 문제였다.

미르는 그리드에게 호감도 이상의 경외와 환상을 품고 있었다.

소속 세력을 배신하면서까지 그리드가 활개를 치도록 방관했다.

결국 그리드는 이프리트와의 협력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프리트는 그리드에게 호감을 품어버렸다.

최악의 변수였다.

그리드의 한 마디 한 마디가,그리드가 선택한 행동 하나하나가 드래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탓에 그리드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까지 만들어버렸다.

드래곤 나이트.

드래곤 슬레이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어떤 의미에선 월씬 더 상위의 힘이었다.

“이쯤 되면 그리드가 천재 같은데. 그의 행동이 항상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자신에게 이로운 효과를 유발하지 않나.”

“의식하고 의도하는 거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고,풍부한 감수성이 너무 큰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타인,특히 벼랑 끝에 몰린 상대에게 쉽게 공감하고 배려해서 간단히 호감을 사죠.”

“그간 쌓아온 업적부터 호감을 사기 유리해요. 무수히 많은 활약을 해온 까닭에 인물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모르페우스가 평생 가도 못이길 것 같은데?”

물론 확신할 순 없는 일이다.

모르페우스가 Satisfy 속 인물들의 가치관을 바꾸기만 해도 그리드는 지금처럼 쉽게 호감을 얻지 못할 테니까.

그리드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모르페우스는 개발진이 만든 설정을 근거삼아 세계관을 확장할 뿐,설정 자체를 바꿀 권한은 없으니까.

모르페우스가 권한을 얻기 위해선 임철호 회장과 이사회의 허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리드가 ‘선’을 넘지 않는 이상,막말로 Satisfy를 왜곡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는 이상 임철호의 허가가 떨어질 일은 없다.

Satisfy는 플레이어가 만드는 세계.

안전장치 또한 플레이어 본인이 쥐고 있는 것이다.

“모르페우스.”

긴 회의가 끝난 후.

집무실로 돌아온 임철호 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소주 한 잔 하겠나?”

[ㅡ_ㅡ]

“하하,기분 풀라는 의미에서 던진 농일세. 세상이 어찌 뜻대로 돌아가겠나.”

[이해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그리드’의 활약이 세계관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 상태론 9년 W개월 내에 메인 컨텐츠가 고갈되고 말겁니다.]

“9년하고도 10개월이나 더 걸린다고?”

[생체리듬은 정상입니다만,혹시 위독하십니까? 주인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신 건지 위기의식이 결여되셨습니다.]

“ 아닐세.”

뜨끔한 임철호 회장이 손사래 쳤다.

모르페우스의 진화를 느끼면서다.

매일 같이 나눠온 대화가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마치 사람과 대학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령 우리가 설계한 세상이 끝날지언정 그게 종말은 아니지 않나. 다음 세상은,새로운 컨텐츠는 플레이어들 스스로 만들어나가게 될 걸세. 그거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인 거고.”

[회사의 영향력이 떨어질 겁니다. 주가가 폭락할 겁니다.]

“...자네가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욘 없어.”

따스한 미소를 그리는 임철호였다.

모르페우스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마치 임철호와 교감하는 듯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는 플레이어 ‘그리드’가 밉습니다.]

“하하하,자네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게 만든 최초의 인간은 내가 아닌 그리드인가. 이래서야 질투심마저 생기는 걸.”

* * *

확실하다.

S.A그룹의 의지와 달리 시스템은 내 편이다.

서사시가 쓰이지 않은 게 증거다.

돌이켜보면,여태껏 누려온 행운 중 상당수가 시스렘의 도움이었을테지.

재차 확신하는 그리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프리트라는 짧지만 강렬했던 인연을 가슴 한 켠에 묻은 채다.

앞으로 그리드에겐 ‘지지 말아야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위대한 드래곤의 인정을 받은 몸께서 개나소에게 얻어맞고 다닐 순 없으니까.

‘바알...’

그리드는 개와 소들의 왕을 떠올렸다.

만악의 근원.

도무지 승산이 없어보였던 상대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에게 점차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산군 그레니어의 호의에 이어 드래곤 나이트의 칭호를 얻었고,이젠 베티의 보상까지 받을 차례다.

그리드는 착실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언젠간 반드시 바알을 토벌하고 칸과 파그마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하리라.

“...?”

결사들과 함께 탑에 입장한 그리드가 당황했다.

얼마 전 이사한 지혜의 탑.

한쪽으로 기운 외관을 보고 피사의 사탑을 모티브로 삼은 건축물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탑은 너무 과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고의로 설계 된 구조가 아닌,파괴의 흔적이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인 내부 상태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크음”

비반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모습을 보아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였지만,그리드를 의식한 건지 신음으로 그쳤다.

“충격의 파장이 여기까지 닿았군. 괴물 같은 놈들.”

프론잘츠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라드볼프는 다급히 계단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공방이 제발 무사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인명 피해가 없어야할 텐데.’

이프리트와 트라우카의 충돌은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템빨국도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걱정하는 그리드의 손을 베티가 붙잡아 이끌었다.

“하야테 님은 나중에 만나. 우선내 방으로 가.”

무너진 계단을 건너는 베티의 수법이 몹시 묘했다.

그녀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허공에 솟아오르는 두개골들이 계단의 역할을 대신 해주었다.

‘언데드를 다루는 방식도 무궁무진하구나.’

“밥은 먹었어.”

“네,항상 빵을 챙기고 다닙니다.”

“채소랑 고기는.”

“일일이 챙겨 먹기엔 시간이 촉박한 경우가 많아서...”

“골고루 먹어야 키도 크고 건강해.”

“...저 성인입니다.”

“할멈은 나도 핏덩이로 봐. 그냥한 귀로 흘리시게.”

계단 아래 비반이 조언했다. 주섬주섬 빗자루를 챙기는 모습에 기운이 없었다.

“청소… 고생하십시오.”

“청소? 아,정학 작업 말인가. 고생해야지. 나밖에 할 수 없는 신성한 작업이니까.”

저쯤 되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게 아닐까.

비반에게 커다란 동정심을 느낀 그리드가 잠시 후 베티의 방에 도착했다.

낯선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방이었다. 다양한 생물의 표본이 비치 되어 있었는데 특히 악마의 시체가 많았다.

“ 기다려.”

그리드를 홀로 남겨둔 베티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먹어.”

잠시 뒤 음식을 잔뜩 갖고 돌아왔다.

진귀한 식재를 이용해 차린 진수성찬이었다. 심지어 따뜻했다. 방금 만든 듯했다.

‘3분 요리마냥 뚝딱 만들었을 리는 없고,요리사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단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따로 요리사가 상주할 줄은 몰랐다. 워낙 은밀한 곳이지 않나.

“아벨리오가 그린 음식이야. 나는 음식을 못 먹지만,다른 결사들은 맛있다고 해.

“그렸... 다고요?”

7좌 아벨리오.

과거,그리드가 처음 탑에 올랐을 당시 그림을 실체화 시켜서 그리드를 제압했던 인물이다. 지존도를 선물해주기도 했었다.

‘그림을 실체학시키는 수법으로 음식까지 만들 줄이야. 학가도 만능이구나.’

그리드 또한 대장장이다.

한데 만능에 가깝다.

직업에 귀천은 없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고기 한 점을 베어 물은 그리드가 감탄했다.

입 안 가득 번지는 육즙에 깊은 풍미와 감칠맛이 있었다. 우려했던 물감 맛은 없었다.

“맛있네요.”

진짜 맛있다.

거슬리는 약품 냄새와 시체 표본들이 무색해질 정도다.

“많이 먹어.”

베티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목소리도 건조했다.

하지만 친절하고 상냥했다.

차마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그리드는 식사에 열중했다.

잠시 후.

“나는 네게 가르쳐줄 기술이 없어.”

그리드가 음식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베티는 본론을 꺼냈다.

한데 내용이 좀 이상하다...?

‘...가르쳐줄 게 없다고?’

설마,퀘스트 보상이 이 식사였나? 밥 한 끼로 때우는 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별 황당한 의심을 하는 그리드였다.

베티가 설명했다.

“네크로맨서의 기술은 지배력을 소모해. 베리아체의 유산을 가진 네가 내 기술을 배우는 건 안 좋아.”

베리아체의 유산.

템빨골을 의미한다.

네크로맨서 스킬을 개방하는 순간 지배력 스탯이 생기고,지배력 스텟이 생기는 시점부터 템빨골이 다른 언데드처럼 지배력을 소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언데드와 동시에 운용하는 게 힘들다...

대충 이런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는 걸까?

나름 해석해보는 그리드에게 베티가 제안했다.

“내가 네게 줄 건 공(公)의 칭호야. 내 칭호를 양도할 거야.”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브라함의 지공,뭘러의 압공,그리고 그리드의 화공과 덕공...

공의 칭호는 하나 같이 강력하고 특별하다.

그리드의 궁극기 중 하나인 무구의 비도 덕공의 일부 효과에 불과했다.

한데 새로운 공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무려 3번째 공의 칭호였다.

기대 이상의 보상이다.

두근, 두근, 두근...!

‘…잠깐?’

빠르게 뛰기 시작하던 그리드의 심장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심폐소생술이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불안감부터 해소하고 싶었다.

“설마... 혹시 사공(死公)은 아니겠죠.”

괜한 기우이기를.

이번에 얻는 공의 칭호는 부디 멋진 이름이기를.

덕공 그리드는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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