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78화 (74권) (1,466/1,794)

1화

와장창창...!

머릿속에 환청이 울린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듯,사고가 박살난 여파다.

“웁...!”

헛구역질하는 그리드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의 마음은 녕마였다.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행복의 크기에 비례하는 고통이다.

[템빨신이여.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대한 자여. 아마도 나는 그대에게 기이한 감정을 품은 듯하다.]

이프리트의 음성이 귓전에 맴돌았다. 생생했다. 방금 전까지 온 기를 나눴던 상대다. 희미하게 떠올리기엔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괘념치 마라. 바알의 힘에 노출된 영향으로 잠시 겪는 광증일 것이다.]

낯선 호감을 병으로 착각하던 자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으면서,평생토록 홀로 고독했단 증거다.

[앞으로도 계속이라…]

함께라는 단어를 어색하게 곱씹던 자다.

눈가에 맺힌 희미한 미소를,아마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했겠지.

[그대가 말할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려서 기이하구나. 역시 광증이 맞는 듯하다.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떠나야겠다.]

그는 정녕 마지막 순간까지 호감과 광증을 구분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드래곤은 한 번 배운 개념을 쉽게 이해하며 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알면서도 부정했을 뿐이다.

‘두려웠구나.’

삶에 미련이 남을까 봐.

[100년은 너무 짧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니 기다릴 필요 없다.]

그는 이미 진즉에 각오했던 죽음을 피하고 싶어질까 두려워,새롭게 피어오른 감정을 부정하며 도망쳤던 거다.

재회가 불가능할 것을 알기에 기약하지 않고.

‘그에게 기억 될 나는 어떤 모습이었지?’

그리드는 돌이켜 보았다.

“오늘 당신은 제게 큰 도움을 받았고, 그래서 고마운 겁니다.”

생색을 내고 말았다.

내게 호감을 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지껄이며,은근한 탐욕을 드러냈다.

언젠간 그가 내게 은혜를 갚길 바라며,권리를 누릴 생각에 들떴었다.

최악이다.

혐오감이 피어올랐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전했어야 했는데.’

그리드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 역시 결과적으로 큰 도움을 받지 않았나.

한데 인정하지 못했다.

본인의 활약에 도취되어 은인 행세를 한 게 전부다.

활약이라고 해봤자 이프리트의 뿔을 어설프게 재현한 게 전부였는데.

꺼져가는 그의 생명을 잠시 붙잡아뒀을 뿐인데.

“그리드...”

결사들이 술렁였다.

숨죽인 채 오열하는 그리드의 모습에 당황했다.

“허... 크흠...”

눈치 없기로 유명한 비반 역시 헛기침만 해댔다.

드래곤의 죽음.

인간이라면 응당 기뻐해야 할 소식을 듣고도 슬퍼하는 그리드를 감히 비난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들 모두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프리트의 왜소한 뿔과 맞닿았던 그리드의 주먹을.

이프리트와 교감하며 미소 짓던 그리드의 얼굴을.

드래곤을 인류의 위협으로 상정하는 결사들 입장에선 섣불리 이해하기 힘들었지만,이프리트는 필시 그리드의 벗이었다.

혹자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두 존재가 함께한 시간은 찰나처럼 짧았으니까.

하지만 때때론 찰나가 영원보다 빛나는 법이다.

긴 세월을 살아온 결사들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았다.

“마음껏 울어.”

토닥토닥.

베티의 작은 손이 그리드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아마도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나본데,키가 워낙 작은 탓에 위치가 영 좋지 못했다.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결사들에게 그리드가 고백했다.

“동쪽의 쫓겨난 신들이 말했습니다. 이프리트는 회광반조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한데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삼사를 신뢰하지도 못했을 뿐더러,이프리트가 워낙 건재했으니까.

...저열한 핑계다.

이프리트에게 한 번쯤은 물어봤어야 했다.

괜찮은 거냐고.

사실은 힘든 거 아니냐고.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만큼 관심이 적었다는 뜻이다.

그리드는 단지 이프리트의 무력에 심취하여 열망했을 뿐,이프리트라는 개체에겐 큰 흥미가 없었다.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멋대로 미래를 논했다.

함께 인연을 쌓아가자고 지낄였다.

불가능하단 사실을 모르고,이프리트의 입장을 헤아려보지도

“되돌릴 겁니다.”

그리드가 품에서 낡은 책자를 꺼냈다.

<훼손 된 단탈리안의 서>

지옥의 현자가 유품으로 남긴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단 한 번의 기적을 행사한다.

<시간 역행>

단 1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최소 5초 전에서 최대 3분 전까지 되돌립니다.

정확한 시간은 지정할 수 없으며,사용시 훼손 된 단탈리안의 서의 모든 지식이 소멸합니다.

이때 훼손 된 단탈리안의 서의 ‘모든 스킬 레벨업’ 효과가 삭제됩니다.

정말 만약.

만에 하나라도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그때 쓰기 위해 간직해온 물건이었다.

‘제발.’

행운이 따르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을 펼치는 그리드의 손목을,

“관두게.”

라드볼프가 붙잡았다.

거인족의 우묵한 눈이 그리드를 똑바로 마주한다.

“지금 자네는 심하게 감정적이야. 신중하게 생각해보게. 이프리트를 꼭 되살려야하나? 자네가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가 맞는가?”

과연 거인족이었다.

라드볼프는 단탈리안의 서가 어떤 물건인지 꿰뚫고 있었다.

“죄책감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지. 죄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끔 도와주는 양심이니까.

하지만 매몰되어선 안되는 감정이기도 하네. 자,심호흡하게.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해 보시게.

자네가 이프리트를 되살리려는 이유가 뭐지? 정녕 소중해서인가,아니면 순간의 죄책감 때문인가?”

“...”

그리드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를 더욱 더 괴롭혔다.

이프리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 미안해 죄책감을 느끼면서도,단탈리안의 서를 쓰는 게 망설여졌다.

다른 소중한 존재들과 이프리트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됐다.

무게 추는 당연히 이프리트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기울었다.

그 사실이 그리드의 죄의식을 한층 더 키웠다.

바로 그때.

“이프리트를 되살리는 건 무의미하오.”

하야테가 나서주었다.

그는 라드볼프와 달랐다.

용살자만이 알 수 있는,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되살려봤자 그녀는 같은 운명을 되풀이할 뿐이오. 결국 다시 트라우카에게 찾아가겠지. 학룡이란 그런 존재요.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법이 없소.”

“혹시 설득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의미 없소. 내가 본 시점의 그녀는 이미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었소. 만에 하나 운명이 바뀐다고 해도 죽음을 며칠 유예하는 수준에 불과하오.”

하야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애초에 가장 큰 문제는,트라우카가 시간의 역행을 눈치 챌거란 점이오. 이프리트에게 습격 당했던 과거,혹은 습격당할 미래를 없애기 위해 역으로 선수를 칠 테지.”

“...”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고룡의 초월성을 제대로 가늠한 것이다.

도대체 감각도가 얼마나 예민하기에 시간의 역행까지 눈치 챈단 말인가?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리드는 납득했다.

예상과 상상을 웃도는 이프리트의 강함을 목격하지 않았나.

그조차도 압도하는 존재가 고작 대악마가 만든 비술을 인지하지 못한다면,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이프리트는 자신이 곧 죽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소.”

“우리가 급히 출동한 이유는 이프리트가 대량의 브레스를 축적했단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일세.

브레스란 마력을 대량으로 방출하는 개념으로,드래곤은 심장의 마력을 한 바퀴 순환시키는 방식으로 브레스를 시동하거든.

한데 이프리트의 심장엔 마력이 최소 아홉 갈래로 순환하고 있었네.

당장 심장이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어. 처음부터 트라우카와 동귀어진 할 각오였겠지.”

“...복수,입니까.”

동대륙으로 피신하는 드래곤은 대게 영역 다툼에서 패배하고 부상을 입은 드래곤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프리트는 뿔을 잘려 힘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다.

그를,그녀를 그 꼴로 만든 게 바로 트라우카다.

“복수일 수도 있고,자식의 미래를 위해서일 수도 있지. 어쩌면 단순히 레어에 집착한 결과일 수도 있네만,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네. 드래곤은 우리와 워낙 다른 존재니까.”

“자식...? 이프리트에게 자식이 있습니까?”

“그래,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네. 이프리트가 출산한 시기를 고려하면 자식도 슬슬 성체가 됐을 무렵인데...

솔직히 잘 모르겠군. 화룡의 생존률은 드래곤 중에서 도 유독 떨어지는 편이라.”

“트라우카 때문입니까?”

“맞네. 놈은 태초부터 자신의 핏줄을 포식하는 방식으로 힘을 축적해왔거든.”

그것 참 개새끼다.

결사들과 대학하는 내내 표정을 굳혔던 그리드가 급기야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그리드는 결사들을 존경한다.

제아무리 학가 났다 한들 결사들 앞에선 원색적인 욕설을 자제하고 싶었다.

애초에 지금은 너무 흥분한 상태다.

이프리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크게 동요했다. 진정할 필요가 있다.

“트라우카가 중상을 입은 틈에 노려보는 건... 당연히 안 되겠죠.”

“자살 행위에 불과하오.”

“...”

다 죽어가던 이프리트가 홀로 삼사를 감당했다.

결사 전부와 그리드가 힘을 합쳐도 트라우카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드는 뻣속까지 새겨야만 했다.

드래곤,그중에서도 고룡에 속하는 개체는 결코 적대해선 안된다.

이는 Satisfy가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쭉 변치 않는 법칙이다.

“일단 진정하게. 자네의 슬픔과 별개로 상황은 썩 나쁘지 않아. 이프리트의 희생 덕분에 트라우카는 긴 세월 동면에 들 걸세.”

“이프리트는 자신의 시체를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만약 트라우카가 이프리트의 시체를 포식했다면 상처를 즉시 회복하는 것으로 모자라 더욱 강해졌을 테니까.”

레이더스가 100년에 한 번씩 미식의 주기를 맞이하듯, 고룡들은 일정한 패턴을 갖고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트라우카는 학룡 사냥에 힘을 쏟는 편인데,그때마다 발생할 천재지변이 앞으로 수백 년은 발생하지 않게 됐다.

결과적으로 이프리트가 인간들을 도운 셈이다.

“게다가 다행히 탈리마가 무사하다. 레어를 최대한 튼튼하게만드는 드래곤의 습성 덕분일 거다. 대륙을 통째로 뒤흔든 폭발조차도 트라우카의 레어를 파괴하진 못한 거겠지.”

그리드가 안도했다.

안 그래도 탈리마가 멸망해서 드워프의 명맥이 끊길까 걱정하던 차였다.

차츰 마음을 가라앉힌 그의 사고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사시가 발생하지 않았어. 이것도 큰 행운이다.’

만약 이프리트와의 서사가 세상에 공개됐다면,당장 트라우카의 표적이 되는 걸 걱정했어야 할 판국이다.

혹시 시스템의 도움이 아닐까?

내가 서사시를 썼다간 큰 위기에 빠질 걸 알고 억제한 게 아닐까?

‘S.A그룹의 의지와 별개로 시스템은 내 편인 걸 수도...’

실없는 생각을 해본 그리드가 결사들과 함께 지혜의 탑으로 이동했다.

베티의 보상을 받을 차례다.

심장에 각인 된 이프리트의 온 기를 느끼며,그리드는 미래를 그렸다.

같은 시각,S.A그룹 본사.

서버 관리팀이 술렁였다.

모르페우스의 상태를 표시하는 패널에 ‘ᅲ’라는 문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팀장님,얘 우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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