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권 21화
“적해에서 발견되기 전까진 기척이 전혀 없었다고?”
“그래, 기척을 포착했을 땐 이미 브레스를 몇 개나 중첩시킨 상태였다. 한데 그동안 레이더가 감지하지 못했지.”
“동쪽에서 나타난 거군. 여태껏 동대륙에 숨어있던 게야.”
하야테의 집무실.
비반이 한 발 늦게 입장했다.
회의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고대의 언어와 공식들이 빼곡히 채워진 아티팩트가 점멸하며 이프리트의 상태와 위치를 알렸다.
“이프리트는 트라우카의 자식이니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를 신세이므로 피신해 있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데 하필 지금 돌아왔다는건...”
지혜의 탑이라고 해서 모든 드래곤의 행적을 파악할 순 없다.
미식룡 레이더스처럼 일정 주기마다 활동하거나,지금의 이프리트처럼 노골적인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감시하는 게 힘들었다.
결사들의 뛰어난 기감도,프론잘츠 형제가 만든 드래곤 레이더도 만능은 아닌 것이다.
“...바알의 힘의 파편을 손에 넣은 건가?”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제2의 광룡이 탄생했다고 봐야 옳아.”
“선구자가 실패했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가 하필 상위룡에 화룡인 이프리트인데 무슨 수로 감당하겠나. 만약 이프리트가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고 해도 그리드 혼자서 어찌 해볼 상대가 아니야.”
“내 탓이야. 내 탓에 그리드가 혼쭐이 났어.”
안 그래도 창백한 베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체 같았다. 관에 누워있어야 옳아보였다.
로브에 감춰진 그녀의 몸은 실제로 송장이다. 절반 이상이 백골이었다.
“자책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이프리트의 목적지를 특정해야... 이런?”
라드볼프가 기함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떨렸다.
“이프리트가 서쪽으로...”
“서쪽?”
“코크로 섬… 코크로 섬이 있는 방향이다.”
“템빨국 말인가!”
템빨국은 이제 제국이다.
대륙의 3분의 2 이상이 템빨국의 영토가 된 실정이다.
하지만 요충지라고 할 만한 지역들은 대부분 서쪽에 밀집되어 있었고 코크로 섬이 그중 하나였다.
“이프리트 놈,선구자에게 보복할 작정이구나...!”
이프리트가 브레스를 축적한 이유는 영역 다툼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긴,현재 이프리트가 탐낼 만한 레어는 트라우카의 레어뿐이다.
바알의 힘을 얻었다고 해도 지금 당장 트라우카에게 도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원한이 깊은 듯하다. 바알의 힘을 얻는 과정에서 어지간히 방해를 받았나보군.”
“렘빨국의 인구밀집도는 역사상 최대일세. 템빨국이 이프리트의 표적이 됐다간 인류의 절반 이상이 소멸할 테지.”
소란 속에서.
“출진하겠소.”
하야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실화냐...”
마치 하늘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트라우카의 비행을 환호하며 만끽하던 그리드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눈에 익은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온 까닭이다.
수평선에 걸친 코크로 섬이 보였다.
물리적으론 성사시키기 힘든 대륙 간 이동이 순식간에 끝난 것이다.
‘미사일을 타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는 그리드의 흑발은 헝클어지다 못해 뒤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기름이라도 칠한 듯이 올백이다.
강인한 인상과 맞물려 잘 어울렸다.
[여기까지다. 내가 이 이상 접근해서야 인간들이 두려워하겠지.]
“배려...라는 겁니까?”
[호오라,그런가. 나는 그대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멈춘 것인데,이게 바로미물들이 말하는 배려심인 거였나.]
꿈뻑.
한 번 감겼다 뜨이는 트라우카의 거대한 눈매가 호선을 그리는 듯했다.
[템빨신이여.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대한 자여. 아마도 나는 그대에게 기이한 감정을 품은 듯하다.
하지만 괘념치 마라. 바알의 힘에 노출된 영향으로 잠시 겪는 광증일 것이다.]
“광증 따위가 아닙니다.”
그리드는 혼자였던 시절을 회상했다.
타인의 호의를 의심했던 시절이다.
타인에게 호감을 느낄 때면 불안했던 시절이다.
낯설어서였다.
워낙 생소한 나머지 두려웠고,부정했다.
“완전해서 늘 혼자였던 당신은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오늘 당신은 제게 큰 도윰을 받았고,그래서 고마운 겁니다.
작게나마 호감을 품으셨겠죠. 그건 아주자연스러운 감정이지 한낱 광증따위가 아닙니다.”
[호음…]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교류하고,교감한다면 자연히 커지게 될 감정이죠. 언젠간 선명하게 느끼고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드는 이프리트에게 미래를 제안했다.
그 힘이 탐나서,힘들게 얻은 기연을 놓치기 싫어서,그리고 또 가여워서.
앞으로 쭉 함께하기를 바랐다.
[앞으로도 계속이라…]
미래란,드래곤에게 당연히 보장되는 권리다.
하지만 이프리트에겐 아니었다.
그의 뿔은 그리드가 일시적으로 재현한 것일 뿐.
그는 이미 영생을 잃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다.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스윽.
이프리트가 긴 목을 내밀었다.
이만 작별을 전하는 몸짓이었다.
목을 미끄럼틀 삼아 내려온 그리드가 용의 날개를 펼쳤다.
비행하여 이프리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고,작은 공감대라도 형성되길 바라서였다.
물론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이프리트의 호감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찮은 날개다.]
이프리트가 콧방귀 뀌었다.
그리드는 부정하지 못했다.
이프리트 앞에서 날개를 펼쳤더니 파리가 된 기분이었다.
“...”
그리드가 주먹을 뻗었다.
고개를 기울인 이프리트가 내민 뿔.
거대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한 그 뿔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툭.
그리드의 주먹과 이프리트의 뿔이 맞닿았고,그리드는 자신의 몸속에 스며드 는 어떤 뜨거운 감각을 느꼈다.
이프리트가 설명했다.
[나의 마력을 그대에게 흔적으로 남겼다. 앞으로 일부를 제외한 상당수의 드래곤이 그대를 두려워할 거다.]
순간.
[...!]
[...!!]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멈춰있던 시스렘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 어떤 전설과 신학에도 존재하지 않던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존재입니다.]
[당신의 위대한 업적이 영원토록 유일할 칭호,<드래곤 나이트>를 생성합니다.]
<드래곤 나이트>
등급:유일
드래곤과 교감하는 존재입니다.
하위룡과 중위룡에 속하는 드래곤은 당신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당신을 존중하며 <이프리트와의 일학>를 재현해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화란,당신이 이프리트에게 탑승하여 삼사를 패주시킨 사건을 의미합니다.
★일부 드래곤을 <탈 것>으로 활용 가능.
★드래곤에 탑승하는 동안 격 대폭 상승.
★드래곤에 탑승하는 동안 모든 능력치 상승.
상승하는 능력치 수치는 탑승한 드래곤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음.
★드래곤에 탑승하는 동안 <드래곤 브레스> 스킬 활성화.
브레스의 위력은 탑승한 드래곤의 능력치에 영향을 받음.
★★해즐링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유일...!’
생소한 등급이다.
하지만 신화 등급 이상일 것이다.
무신 치우를 뜻하는 다른 말이 유일신이었고,치우가 세계관 최강의 존재라는 건 거의 명확한 사실이니까.
당장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부터가 유일 등급의 위력을 증명했다.
일부 드래곤과 적대하지 않음.
드래곤에 탑승 가능.
드래곤에 탑승하는 동안 격 대폭 상승.
드래곤에 탑승하는 동안 모든 능력치 상승.
게다가 드래곤 브레스 스킬의 활성화.
이건... 이건 한 마디로 ‘무적’이 되라는 뜻과 다를 바 없다.
전율하던 그리드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옵션을 왜 유독 강조하는 거지?’
별이 무려 4개.
해출링,즉 네3델리나는 탈 수 없다는 ‘정보’를 전달해주는 수준을 넘어서 거의 놀리는 느낌에 가깝다.
‘...착각이겠지.’
기분이 몹시 불쾌했지만,그리드는 마음을 다스렸다.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믿었다.
S.A그룹이 양아치긴 해도 세계제일의 기업이다.
일개 플레이어를 기만할 순 있어도 노골적으로 조통할 리 없다…
“당신의 흔적을 항상 되새기며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
“...이프리트?”
[음... 그대가 말할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려서 기이하구나. 역시 광증이 맞는 듯하다.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떠나야겠다.]
“하하... 레어로 돌아가서 한동안 쉬실 계획입니까?”
[...그래.]
돌아갈 레어는 없다.
트라우카에게 모든 걸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 100년 후쯤에야 재회할 수 있겠군요.
100년 주기로 깨어나는 미식룡 레이더스를 기준으로 삼은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리드에겐 100년도 몹시 긴 세월이었다.
현실 시간으로 셈해도 무려 33년 후의 미래다.
아쉬움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이프리트는 한층 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100년은 너무 짧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니 기다릴 필요 없다.]
“그렇습니까...”
본래의 뿔이 회복하기 위해선 무척 긴 시간이 필요한가 보구나.
그리드는 애써 납득했다. 아쉬운 마음을 털어냈다.
이프리트와의 만남이 증명하듯,인연이란 때때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재회 또한 같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드가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잘 가십시오.”
이프리트는 더 이상 말없이 몸을 돌렸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폭풍을 남긴 채 떠나버렸다.
쿠와아아아앙...
대기가 울부짖는다.
이프리트의 최후를 암시하는 절규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눈치 채지 못했다.
멀리서 경악한 채 그리드를 바라보는 결사들 또한,곧 다가올 사건을 예측하지 못했다.
정상이다.
인간은 드래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드래곤이 모두 비정상인 이유다.
“그리드... 자네...?”
“어...?”
그리드가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하야테와 비반을 비롯한 모든 결사가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심지어 하나 같이 마장기의 어깨에 올라탄 채였다.
“전쟁이라도 나가십니까?”
어안이 벙벙해져서 묻는 그리드에게,
“드래곤하고 친구가 된 거야.”
베티가 특유의 고저 없는 음색으로 반문했다.
다른 결사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하나 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귀족의 표본처럼 늘 고상한 하야테조차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아,네... 아마도... 어찌다 보니…”
“왜. 바알의 힘의 파편을 부숴달라고 했는데. 어쩌다가 드래곤하고 친구가 됐어.”
“그게... 저도 잘... 죄송합니다…”
그리드가 얼떨결에 사과했다.
결사란,드래곤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존재들이다. 드래곤 때문에 자신의 모든 걸 희생했다.
그들을 상대로 드래곤과 친구 먹었다고 고백하는 건... 묘한 죄책감이 생겼다.
“으응. 미안해하지 마. 잘했어. 고마워.”
베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성큼 그리드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장해. 장하다.”
사실 안겼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베티의 신장은 140센티미터를 약간 넘기는 수준에 불과해서 구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
[지혜의 탑의 4좌 ‘베티’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허...”
그리드보다 당황하는 건 결사들이었다.
베티와 수백 년을 함께해온 결사들조차도 그녀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왜 이제야 말하는가.”
비반은 또 헛소리를 장전하고 있었다.
“이프리트와 친구를 먹었다고 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는 가!!”
소리치는 비반의 다리가 작게 후들거렸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안도감의 여파다.
사실 그는 이프리트와 전력으로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지혜의 탑의 존재가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리드와 템빨국을 도울 생각이었다.
탑이 그리드를 위기에 빠뜨렸으니 책임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한데 각오가 무색하게도 모든 사태가 정리 된 것이다.
기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아니 뭘 어떻게 말하라고...”
그리드가 비반의 속내를 모르고 투덜거렸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결사들이 하나둘씩 미소를 되잦기 시작하는 가운데 하야테가 제안했다.
“우선 탑으로 돌아가지 않겠소?
그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구려.
“예.”
그리드가 결사들의 뒤를 쫓았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_____!!!
세상이 흔들렸다.
요란하게 파도치는 바다 곳곳에 소용돌이가 생겼고 코크로 섬이 마치 배처럼 출렁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코크로 섬 너머의 대륙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각변동의 순간이다.
어떤 거대한 힘이,대륙의 위치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반사적으로 드래곤 레이더를 확인한 라드볼프가 침음했다.
“이프리트가… 소멸했다…”
“…?”
“트라우카 또한 중상을 입은 듯 하군.”
그리드의 몸에서 진이 빠져나갔다.
그는 이프리트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살짝 호선을 그렸던 눈매.
그것이 미소였음을,뒤늦게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