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75화 (1,464/1,794)

73권 20화

신영우 위인전까지 나온 마당이다.

굳이 TV를 켜거나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아도,세상에는 그리드의 이름 석 자가 범람했다.

그리드의 심력 절반이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쓰이는 이유다.

언젠가부터 그리드는 조심했다.

부풀어 오르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항시 집중하고 노력했다.

그건 의외로 힘든 일이었다.

작은 기쁨을 누려도 환호하고,기념하고,흥분하는 게 인간의 본질이지 않나.

본질을 억누르는 게 쉬울 리 없다.

하지만 그리드는 기어코 해냈다.

보통 사람이 평생 한 번도 겪지 못할 기쁨을 숱하게 누리면서,매번 해일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목석처럼 견며냈다.

혹은 한번의 환호로 흩어냈다. 결코 매몰되지 않았다.

그래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어깨에 짊어진 운명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냉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신중해야했다.

그리드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날 때마다 공손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괜한 오기를 부렸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까 염려해 ‘어쩔수 없이’ 자세를 굽히는 거지,결코 비겁해서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그리드가.

“끼얏호오오오오오--!”

부풀어 오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환호했다.

“흐핫! 으하하하하핫!!”

환호하고도 기쁨을 털어내지 못한 채 매몰되어갔다.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이 순간만을 만끽했다.

부모 손을 붙잡고 놀이공원에 방문한 아이처럼 순수하게 즐겼다.

언젠가 탐욕으로 만들 비행정이 이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품게 될 정도로 거대하고 빠른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였다.

신과 용.

결코 어우러지지 못했던 두 존재의 인연을 ‘뿔’이 이어주고 있었다.

그리드가 만든 이프리트의 뿔이다.

뜨겁고 단단한 그것을 고삐처럼 거머쥔 덕분에 그리드는 드래곤의 시야와 속도를 체험했다. 여태껏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였다.

이프리트는 뿔에 담긴 그리드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자신이 삼사의 결계에 갇힌 동안 그리드가 어떤 생각으로 뿔을 만들었고,어떤 심정으로 미르와 싸웠는지 선명하게 떠올렸다.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치열했고 감사했다.

또한 위대했다.

갓 태어난 신이 무려 드래곤의 뿔을 재현해낸 것이다. 물론 불완전했지만 충분했다.

세상 대부분의 존재와 사건을 하찮게 보았던 이프리트가 태어나 처음으로 전율하며,감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표정이나 감정을 읽는다는 건 그리드에게 힘든 일이었다.

개미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격이 다르고 종이 달랐다.

쿠왕!

이프리트의 비행은 순보의 상시 전개에 가까웠다.

한 번의 날갯짓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데,삼사가 뿌리치지 못할 속도였다.

하지만 쉽게 잡혀주지도 않았다.

급기야 주술을 완성하고 환국으로 귀환하는 삼사를 이프리트는 더 이상 뒤쫓지 못했다.

환국은 절대신 한울의 근거지다.

심지어 무신 치우가 함께였다.

드래곤에게 몇 안 되는 금지(禁地)중 하나인 것이다.

[속이 후련하군.]

이프리트는 삼사가 공무니 빠져라 도망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리드 역시 같았다.

이프리트의 비행이 멈추자 한 발 늦게 발생하는 폭풍.

그조차도 잠잠해지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힌 그리드가 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바알의 힘의 파편을 부숴야합니다.”

취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바알의 계약자가 될 생각 따위,그리드는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인 이프리트가 다시 날갯짓을 시작했다.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되돌아가 새카만 구슬이 덩그러니 놓인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여전히 그리드를 태운 채였다.

쿠우응...

작은 도시가 있던 땅.

이제 개미 한 마리조차 남지 않은 그 빈터를 그리드가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이프리트가 말했다.

[십년,백년의 세월도 찰나에 불과하다. 상식 없는 짐승의 입장에선 인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게 불가능하지.]

상식 없는 짐승.

그리드가 드래곤을 표현할 때 썼던 말이다.

설마 마음에 담아둔 건가.

다소 불안감을 느끼는 그리드였지만,할 말은 했다.

“가끔씩 집에 침입하는 곤충들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인간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오히려 이로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익충이 더러 있죠.

한데 공교롭게도 그 사실을 몰라서,혹은 겁먹고 흥분해서 얼떨결에 해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아주 잠시나 마 죄책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곤충을 짧게나마 애도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나 또한 그래야한다?]

“당신이 인간보다 나은 존재라면 응당 그래야하는 거 아닙니까?”

[글쎄. 애초에 그대는 인간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

[과연 그들이 익충의 정체를 모르고 해쳤을까? 알고도 편의에 의해서 해친 게 아니라?]

“...”

방에 나타난 거미를 휴지로 붙잡아 변기에 내리는 영희의 모습을 상상한다.

영희는 거미가 해충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살려준답시고 집 밖까지 데리고 나가 풀어주기엔 귀찮았다.

방에 나타난 돈벌레를 파리채로 잡아 죽이는 철수의 모습을 상상한다.

철수 또한 돈벌레가 해충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돈벌레의 생김새에 혐오감을 느꼈다. 붙잡아서 살려주기엔 더러워서 손쉽게 처리했다.

그리고 세상엔 너무 많은 영희와 철수가 있다...

[설령 익충의 정체를 몰라서 실수로 해쳤다고 해도,일일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애도하는 인간은 또 몇이나 될까.]

[그런 거다. 곤충이 인간을 이해하지도,비난하지도 못한 채 단순히 재앙으로 여기듯,

인간은 드래곤을 재앙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다. 설령 드래곤이 인간을 해친다고 해도 그 행위를 비난하는 건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것이지.]

“...제가 만약 비유를 곤충이 아닌 동물로 했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

[내가 공감하지 못했을 거다. 드래곤에게 인간은 너무 작은 존재이니까. 단순하게 생각해라. 인간을 이해해줄 드래곤이 존재할 거란 기대는 버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저를 이해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대학도 나누는 거 아닙니까? ”

[그대가 인간인가?]

“...!”

그리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반문하는 이프리트의 태도가 너무 순수해서였다.

그 어떤 의도도 실리지 않은,단순한 의문.

그렇다.

그리드 본인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실이지만,이 세상에서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이다.

한때 인간이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에 불과했다.

자꾸 인간을 대변하듯 말하는 그의 태도는 이프리트 입장에서 사뭇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선문답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이프리트가 재촉했다.

거듭 기운을 증폭시키며 유혹하는 바알의 힘의 파편이 영 거슬리는 눈치였다.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콰직!

구젤의 도가 힘의 파편을 관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노검마가 온 힘을 다해도 꿰뚫지 못했던 구슬이 수백,수천 갈래의 균열을 발생시키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템빨신...

묘한 흥분이 담긴 역겨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고,

[선구자 퀘스트 <힘의 파편 파괴>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상황을 분석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메시지를 티운 채 멈춰있던 알림창이 갱신됐다.

[지혜의 탑으로 돌아가 보상을 받으십시오.]

[...!]

[...!!]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도대체 왜 맛탱이가 간 거지?’

그리드는 삼사가 퇴각한 이유를 모른다.

단순히 뿔을 되찾고 힘을 되찾은 이프리트를 두려워한 거라고 해석할 뿐,자신이 이프리트에 탑승한 행위가 문제가 됐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특별하고 의미 깊은 사건인지,이프리트의 말만 들어선 실감하지 못했으니까.

누군가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정작 설명해줄 시스템이 먹통이다.

[이곳에 더 볼 일이 남았나?]

“당장은 없습니다. 일단은 서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타라.]

이프리트가 다시 목덜미를 내렸다.

그리드는 서숨없이 올라탔다.

처음이야 당황스러웠지,두 번이야 익숙했다.

이프리트가 큭큭 웃었다.

[유쾌한 녀석이다.]

"...?"

타라고 해서 탄 건데 뭐,실수했나?

그리드가 고개를 가웃거리는 순간.

쿠왕!

크게 날갯짓한 이프리트가 동대륙을 벗어나 적해를 건넜다.

"...?"

“저,저게 무슨...”

이날.

동대륙 곳곳에서 붉은 용이 목격됐다.

너무 빨라 모습을 드러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나,크기가 워낙 큰 탓에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됐다.

용의 대가리 위에 사람이 섰는데 그 모습이 흡사 템빨신을 닮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

“내 탓이야.”

“...”

“괜찮을까.”

“...”

“혹시 실패하면 어찌지.”

“...”

지혜의 탑.

비반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복도 청소를 끝낸 뒤 왁스를 칠하고 있는데 베티가 자꾸 훼방을 놓는 것이다.

왁스의 생명은 광을 내는데 있다.

칠한 뒤 균일하게 문질러야 반짝반짝 광택이 났다.

한데 베티가 자꾸 왁스를 밟아서 광택을 망쳤다. 엉겨 붙은 왁스가 오물처럼 보였다.

“누가 할멈 아니랄까박 노파심이 지나치구려. 그리드는 이미 진즉에 떠났는데 자꾸 여기서 걱정해봤자 당최 무슨 의미가 있소?

쓸데없이 걱정할 시간에 미리 마중이라도 나가있던가 하시오.”

“목소리가 사나워. 당신도 그리드가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학를 내는 거야.”

“너무 오래 산 나머지 눈치가 먼저 죽었소? 어휴 진짜. 이 늙은이가 청소를 해봤어야 내 입장을 알지.”

“청소는 잘못한 사람이 하는 거야.”

“암,맞지. 그러니까 다음 청소 당번은 할멈이 될 게요. 바알의 계약자가 그 꼴이 될 때까지 방관했으니 프론잘츠 공이 좌시하지 않겠지.”

“그리드를 마중 나가야겠어.”

“가랄 땐 안 가고 불리해지니까 도망치는 거 보게.”

어느새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베티의 뒷모습을 비반이 황당하게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화룡 출현. 등급 상(上).]

[이프리트다. 적해 부근에서 이프리트의 기척이 감지됐다.]

[브레스를 대량으로 축적 중이다. 전쟁을 일으킬 기세야.]

[모든 결사는 하야테 님의 집무실로 신속하게 집결하라.]

탑 곳곳에 설치 된 마력 확성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하필 비반은 최상층 복도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하야테의 집무실이 위치한 층이다.

비반이 가장 공 들여서 청소할수밖에 없는.

“영역 다툼인가?”

“현재 화룡이 가장 탐낼 만한 레어는 트라우카의 둥지죠?”

“아무리 이프리트라도 트라우카에게 싸움을 걸진 못할 텐데.”

“그건 모르는 거지. 놈들을 이해하려고 들지 마라.”

“탈리마가 위험해. 난쟁이들이 전멸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라고.”

“...”

우르르!

신속하게 달려온 결사들의 거친 발걸음이 복도를 더럽혔다.

비반의 반나절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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