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74화 (1,463/1,794)

73권 19화

힘,권위,생명,영원.

‘뿔’의 상징적 의미는 매우 강력하다. 시대와 문학를 막론하고 숭상했다.

트라우카가 이프리트의 뿔을 자르고 포식한 행위는 거세와 약탈을 의미하며, 이는 이프리트를 약화시킨 가장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이프리트는 힘과 권위,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권리를 상실했다.

트라우카가 남긴 상처와 저주에 앓다가 서서히 죽어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건 이프리트가 보존하고 있는 무력과 별개의 문제로,일종의 필연이었다.

이프리트는 바알의 힘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바알의 힘의 파편.

유희에 집착하는 바알의 집념이 만든 산물이다.

대상이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재기를 노리지 못하고 있던 이프리트 입장에선 거부하지 못할 유혹이 었다.

바알의 장난감이 될 거란 사실을 뻔히 알고도 외면할 수 없는,유일한 선택지였다.

이프리트는 결국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리드가 나타났다.

바알의 힘의 파편보다 더 큰 희망으로,이프리트를 좀먹고 있던 필연을 뒤엎을 운명으로 다가왔다.

템빨신 그리드.

그의 존재감은 몹시 강력했다.

짧은 삶이 무색하게도 위대했다.

자신의 모든 서사가 과장 없는 진실임을,살아 숨 쉬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해주었구나.]

서서히 눈 뜨며 말하는 이프리트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리드가 만든 창을 미간에 꽂아 뿔을 재현한 그의 모습은 볼품없지도,처량하지도 않았다.

대지 위에 일렁이는 그의 그림자는 도리어 거대해져서 지평선까지 닿았다.

대지가 비명을 지른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이프리트의 전신 근육이 2배,3배,4배까지 부풀어 오르자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아아아아...

이프리트를 중심으로 낮과 밤이 나뉘었다.

태산보다 높게 솟은 이프리트의 두상이 태양을 가린 여파였다.

쿠와아아앙...!

폭풍이 휘몰아치며 파괴 된 도시의 잔재를 사막으로 날려 보냈다.

수천 명의 백성이 살아갔던 도시가 이프리트의 날갯짓 한 번에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남겼던 흔적조차 지워졌다.

찌릿...! 찌릿!!

그리드의 피부가 미친 듯이 경련했다. 살과 가죽이 분리되는 게 아닐까,그런 황당한 걱정을 품게 될 정도로 진동했다.

드래곤.

신조차 경계하는 궁극의 초월종은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결코 마주해선 안 될,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파멸로 보였다.

‘미친...’

그리드는 레이더스의 미식 가이드를 수행했던 날을 떠올렸다.

가슴 깊은 곳에 애써 묻어뒀던 그날의 공포를 생생하게 상기했다.

새삼 깨닫는다.

드래곤은 너무 강력하다.

단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위협적이었다.

“드래곤 중에 정상은 없다.”

언젠가 들었던 조언이 떠올라 그리드를 괴롭혔다.

나는 어쩌면, 작은 학를 모면하려다가 더 큰 학를 불러온 것이 아닐까...

이프리트 역시 뒤틀린 성격을 지닌 탓에,저 강력한 힘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재앙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그리드가 자신의 선택에 불신을 품는 순간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

이프리트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단순히 뜨거운 숨결 따위가 아닌,순수한 마력의 덩어리였다.

붉은 기둥이 되어서 솟구친 그것은 우사를 표적으로 삼았다.

비를 내려 이프리트의 학기를 억누르려던 참인 우사가 기함하며 뒤로 물러났다.

꽈르르르르르르릉!!

우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브레스가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을 헤집고,증발시켰다.

운사가 불러왔던 구름들이다.

우사가 손쉽게 비를 내리도록 보조할 심산이었는데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쏴아아아아...

붉은 유성우가 쏟아졌다.

성층권까지 돌파한 후에야 소멸한 브레스의 잔재가 만든 풍경이었다.

무시무시한 위력과 상반되게 아름다워서,그리드는 그 광경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앞서 도시를 떠나 사막에 선 황길동과 노검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거요?”

노검마는 순순히 물러난 황길동의 태도에 의문을 느끼던 차다.

기껏 그리드를 돕겠다고 달려와선 뒤도 안 보고 되돌아갔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노검마야 실력이 부족하다지만 황길동은 달랐다.

황길동은 무려 수백 년 동안 자신보다 강한 적들과 싸워온 인물이다.

온갖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 큰 저력을 발휘했다.

그리드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는 게 가능했다는 의미다.

“맞소.”

황길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꺼낸 낡은 서적을 펼치면서다.

도원요술서.

황길동이 무릉도원에 올랐을 때 가져온 신물이다.

신선들의 조언이 담긴 서적으로,예언서에 가깝다.

어떤 특별한 상황마다 공란에 미래시가 적혀 황길동의 행보에 큰 도움을 줬다.

전설이라고 하나 일개 인간에 불과한 황길동이 환국을 상대로 싸워올 수 있던 이유다.

“옳게 될 거라고 적히더군.”

“드래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는데 정녕 옳게 된 것이 맞소...?”

“의심하지 마시오. 그간 나는 이 책 덕분에 수많은 양반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현무의 부활에 일조할 수 있던 게요.”

과장이다.

도원요술서가 필시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활빈당을 세우고 활용한 황길동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황길동 개인의 무력이야말로 황길동이 세운 위업들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황길동은 도원요술서에 모든 공을 돌렸다.

이 책을 건네준 신선의 정체가 바로 벤타오이기 때문이다.

신탁을 받고 칠선인에게 칠악의 누명을 씌운 원흉.

뒤늦게 진실을 깨닫고 후회에 휩싸인 그는 황길동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신선이었다.

“어서 떠납시다. 이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소.”

구름 뭉치를 불러와 올라타는 황길동의 시선이 파국이 있는 방향

“가야와 파국의 연결을 끊어 백호창을 고립시킬 기회요.”

* * *

브레스에 스쳐 녕마가 된 우사의 도포가 빠르게 재생했다. 이내 다시 펄럭이는 그것엔 주름 한 점 없었다.

“한울께서 그대에게 은근한 기대를 거는 눈치셨지.”

사늘하게 식은 우사의 시선은 이프리트가 아닌 그리드에게 꽂혔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몸으로 치우의 시련을 통과하고 급기야 신이 된 그대에게 어찌 기대가 없을까.”

쏴아아아아.

아직은 약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대는 아스가르드를 적대하는 입장이지 않나.”

우사의 두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투명해서 보이진 않았지만,칼과 창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빗방울이 닿는 순간 부스러져 형태가 어렴풋하게 추측됐다.

“넁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라. 그대에겐 용과 손잡을 이유가 하등없다. 그대의 동반자로 적합한 것은 이 넓은 누리에서 오직 우리뿐이다.”

우사의 주장은 필시 합당했다.

지상과 지옥,아스가르드와 환국,그리고 용족.

세력을 크게 5개로 나눴을 때,지옥과 아스가르드는 상호 협력하며 지상을 위협하고 환국을 억압한다.

지상과 환국은 각각 독립 된 채 고립 된 형국인데 여기서 용족을 의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용족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으며 심지어 통일되지도 않았다.

개체별로 개성이 강해서 의견이 모이질 않는다.

각자 활개 치는 건달로 비유할 수 있었다. 협력을 꿈꾸기는커녕 도리어 경계함이 옳았다.

같은 적을 둔 지상과 환국이 손을 잡는 편이 가장 현명하고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지상은 환국의 제안에 마음이 끌려야 옳았다.

하지만 지금 지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그리드다.

그리드는 표면적인 구도에 연연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체험을 토대로 구도의 내면을 이해하고 있었다.

우사가 그리드를 재촉했다.

“무얼 고민하나. 그 사악한 용의 눈치를 살피는 거라면 관둬라. 놈은 회광반조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곧 꺼질 불씨에 불과하다.”

과연.

한 번의 브레스를 토한 반동으로 이프리트의 몸은 잠시 작아졌다.

기껏 윤기를 되찾고 빛을 산란시키던 붉은 비늘이 검게 죽어갔다.

이내 다시 회복하긴 했으나 정상적인 상태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프리트의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섰다.

당장 이프리트의 눈치를 볼 필요도,이프리트를 빌미로 용족과 협상을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그리드는 이프리트를 선택했다.

이프리트를 신뢰해서가 아니다.

환국을 불신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강해서였다.

“너희야말로 가장 사악할 텐데.”

“...?”

“다른 신들의 영토를 일방적으로 침략해서 빼앗고,그 신들을 섬겨온 인간들을 기만하여 기생하는 주제에 죄책감조차 못 느끼는 너희야말로 뒤틀려있지 않나.”

그리드는 떠올린다.

동대륙에서 겪었던 모든 사건들 아무 것도 모른 채 학대 당해온 사람들,상처 입고 숨어 지내온 청호와 토순이들,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존중하기는커녕 조롱해 온 양반들...

이곳 또한 지옥이다.

심지어 신이 만든 지옥이다.

상기하는 그리드의 두 눈에 분노가 들끓었다.

한때 덕신이라 불렸던 신의 감정이다.

“적어도 드래곤에겐 상식 없는 짐승이라는 핑계거리라도 있지,인간의 법도와 도리,바람을 이해하고도 이용만하는 네놈들은 구제불능의 쓰레기다.”

“...”

적막이 내렸다.

그리드의 원색적인 비난이 삼사를 크게 당혹시켰다.

침묵을 깨뜨린 건 이프리트의 대소였다.

[크하…! 크하하하하!! 상식 없는 짐승이라. 맞다. 너희에겐 그리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리드의 말에 금수로 전락한 이프리트는 분노해야 옳았다.

하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도리어 그리드를 이해했다.

쿠우우웅!

이프리트의 긴 목이 그리드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타라.]

“…네?”

타라고?

뒤늦게 말실수를 깨닫고 위축되었던 그리드가 당황했다.

선택권은 없었다.

이프리트는 어느새 꼬리로 그리드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덜미에 강제로 태웠다.

[우리가 만든 미물을 길들여 드래곤 나이트를 자칭하는 인간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비룡 기사단을 말하는 듯하다.

[우습지. 모든 세상을 통틀어도,진정한 드래곤 나이트는 이 순간의 그대가 유일할 것이다.]

단언한 이프리트가 날개를 활짝펼치자 광풍이 일어났다.

모래와 자갈로 뒤덮였던 지면이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이 황사로 뒤덮였다.

“미친 신과 미친 용이 만났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삭풍을 쳐낸 풍사가 침음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목덜미에 올라탄 신.

황사 너머 그림자로 새겨진 그리드의 모습은,그 어떤 전설과 신화에도 기록된 바 없는 최초였다.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신들의 지혜와 상상력마저도 아득히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틀어졌던 구름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노력하던 운사가 우사를 설득했다.

“피해야 하네.”

미지란,신에게 매우 치명적인 위협이 다.

전지전능해야 할 신이 불가해를 겪는다?

스스로 신을 부정하는 행위다. 신격이 크게 훼손됐다.

우사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점차 거대해지며 다가오는 그리드와 이프리트의 그림자를 발악적으로 뿌리치며 현장을 탈출했다.

[...!!]

[...!!!]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는중입니다...]

그리드의 알림창은 진즉부터 오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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