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권 15화
Satisfy는 한계를 쉽게 논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신화에 도달할 수 있음이 명백한 증거다.
부활과 초월을 반복하는 플레이어의 잠재력이란 무한한 것이다.
단,용살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선 <절대방어>가 문제다.
그것은 이름 그대로 무적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드래곤은 어떤 형태의 공격을 맞아도 단 1의 피해만 입는다.
심지어 트루데미지의 위력조차 반감시켰다.
‘절대로 못 죽인다.’고 단언해야 옳은 상대였다.
물론 그리드는 <영웅왕>과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의 보유자다.
드래곤의 절대방어를 철저히 무력학시켰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드래곤을 두려워했다.
결사들의 입을 통해서 드래곤의 강함을 실감해온 까닭이며,국가대항전에서 목격한 번헬리어의 능력치를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99,999.
번헬리어는 지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각’ 10만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드의 전투 관련 능력치 총합보다 번헬리어의 단일 능력치 하나가 월등히 높다는 의미다. 체급부터 달랐다.
드래곤 앞에서 그리드는 오우거정도에 불과했다.
오우거가 몽둥이로 그리드를 후려쳐봤자 별 데미지를 입히지 못하는 것처럼,그리드가 번헬리어의 절대방어를 무시하고 공격을 가해봤자
큰 데미지를 입히는 게 불가능했다.
‘...오우거는 비약이 너무 심하고, 오우거 로드 정도로 하자.’
아무튼 그리드는 번헬리어를 상대로 절대로 승산을 논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감안해야할 부분이 있다.
번헬리어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고룡 중 하나라는 점이다.
드래곤 중에서도 유독 특별했고,강력했다.
반면 이프리트는 고룡이 아니다.
이름조차 처음 듣는다. 크기는 번헬리어와 비교했을 때 머리 2개 이상 작았다. 능력치도 훨씬 뒤떨어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숨결을 토할 때마다 입과 코에서 피를 질질 흘렸다.
동속성 드래곤과 영역 다툼을 하다가 패배하고 피신했을 거라는 비반의 추측을 토대로 생각해 봤을 때,염룡 트라우카에게 복날
개처럼 얻어맞고 도망친 녀석 중 하나라는 뜻이 됐다.
고룡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약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출링은 아니야.’
네펠리나와 비교하면 월씬 크다.
결코 만만하게 봐선 안 될 상대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승산을 엿봤다.
가장 큰 근거는 이프리트가 이성을 상실했다는 점에 있다.
바알의 힘의 파편이 드래곤을 현혹하는 단내를 풍긴다지만,아무리 그래도 앞뒤 분간 못하는 짐승처럼 집착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드래곤은 마법의 종주 아닌가.
흉포하고 이기적인 성정과 별개로 지혜롭다.
브라함의 도둑질에 분노했던 염룡 트라우카와,바알의 함정에 빠져 광룡이 된 네바르탄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드래곤도 분명히
있긴 했지만,대부분의 드래곤은 미식룡 레이더스처럼 냉철했다.
‘한데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는 건 그만큼 수세에 몰려있다는 뜻이겠지.’
죽일 수 있다.
아니,죽여야만 한다.
용살의 자격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다.
‘강해져야 돼. 그래야 바알과 싸울 수 있다.’
바알은 고룡과 전투가 성립될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다.
태초신 야탄의 직계답게 무력 외의 강점도 많을 것이다.
인류에게 야탄을 악신으로 인식시키고, 지옥이라는 하나의 차원을 왜곡시킨 솜씨만 봐도 놈의 저력이 무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드래곤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바알의 힘의 파편에 집착하는 거 아닐까.
그리드는 학신의 폭풍을 전개했다.
“파편을 지켜주십시오.”
등 뒤 노검마에게 부탁하면서다.
노검마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건...’
도시 전체가 학마에 집어삼켜진 상태였다.
모든 백성이 위기에 처한 셈인데,노검마가 구출한 백성은 고작 한 줌에 불과했다. 스스로를 희생하며 큰 상처를 감수했음에도 그랬다.
지독한 무력감을 느끼던 차다.
한데 그리드가 붉은 폭풍을 일으키자마자 만백성이 구원을 받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던 학마가 불시에 진학되었고,그 위로 피어난 새로운 불꽃은 상처 입은 백성들을 따스하게 감싸며 치료해주었다.
노검마는 전율했다.
언젠가 체험했던 황길동의 심상세계를 떠올렸다.
수백 개의 분신과 수천 개의 구름을 일으켜 양반들을 고립시켰던 황길동의 심상세계는 가히 무적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느껴지는 그리드의 심상이 월씬 더 강력했다.
믿기지 않았다.
의지란 무력과 별개의 힘이다.
반드시 세월이 동반돼야만 축적되고 연마되는 것이다.
한낱 플레이어의 의지가 수백 년동안 살아온 초네임드 NPC의 의지를 상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는 상회하고 있었다.
이건 재능의 영역과 다르다.
그리드가 쌓아온 ‘경험’이 세월마저 초월해서 황길동의 경험을 앞섰다는 의미가 됐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건과 시련을 겪어온 걸까.’
그리고 얼마나 힘들게 극복해왔을까.
노검마는 섣불리 추측하지 못했다.
다만 선망어린 시선으로 그리드의 등을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알겠소. 내 어떻게든 지켜내리다.”
사실 노검마는 거부할 생각이었다.
이번 사태의 원흉이 바로 이 구슬이다.
상황을 진정시키기 의해선 구슬을 파괴해야만 했다.
한데 그리드는 구슬을 미끼로 드래곤을 레이드할 계획으로 보였다.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만일 실패해서 구슬이 드래곤의 손에 들어갔다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당연히 제지해야 옳았다.
하지만 노검마는 그리드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 신뢰에 호응하듯.
터엉-!
그리드는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구슬을 향해 재차 달려들기 시작한 양반들을 일직선으로 관통해서 베어낸 뒤,어느새 이프리트의 턱밑까지 치달았다.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테마곡과 어우러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됐다.
‘어쩌면...’
오늘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던 드래곤슬레이어가 탄생하는 거 아닐까.
그리드가 양손에 거머쥔 두 자루 검이 빛처럼 명멸하는 광경을 보면서,노검마는 기대했다.
키야아아아아아악!!
천지가 격동했다.
두 줄기 섬광으로 학해 꽂힌 그리드의 검에 울대를 베인 이프리트가 기괴하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수백 톤의 무게에 짓눌린 대지가 붕괴되거나 해일마냥 일어났다.
어지럽게 솟구친 수백 개의 암석이 도망치는 백성들의 머리 위로 탄환처럼 쏟아졌다.
이도류를 구사하는 그리드의 솜씨에 감탄하던 노검마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는 구슬을 지켜야했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단 사실에 괴로웠다.
성급했다.
그가 괴로워할 이유 따위,어디에도 없었다.
번쩍!!
백성들을 뒤쫓아 날아간 갓 핸드들이 일제히 마장기로 변신했다.
칠흑의 갑주를 무장한 레이더스 수십 대가 떨어지는 암석들을 몸으로 막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이어서.
철컥! 철컥!!
거대한 창을 뽑아 손아귀에 쥐고,
쿠우우응!!
한 번의 진각을 밟아 수백 미터의 거리를 좁혀 이프리트에게 쇄도했다.
키야아아아악!!
이프리트가 재차 울부짖었다.
용족을 도살하는 구젤의 도와 염룡검에 벌써 수십 회를 베이고,대 드래곤용 결전병기로 만들어진 레이더스 수십 대의 협공을 받으며 새빨간 피를 철철 내뿜었다.
치이이익!!
“...!?”
이프리트의 피가 그리드의 갑옷을 부식시켰다. 피부를 뚫고 들어와 뼈를 녹이고 혈액을 증발시켰다.
하지만 그리드가 당황한 이유는 그 예상치 못한 반격 때문이 아니다.
이프리트의 생명력 게이지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부분에 있다.
5융합 검무가 3번 연속 크리티컬로 발동하긴 했지만,명색이 드래곤이 벌써부터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프리트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상했다.
‘뭐지?’
물론 그리드는 강하다. 특히 공격력이 고강해서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을 수분 내에 격파했을 정도다.
하지만 드래곤과 가미긴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뭔가 잘못 됐다.’
그리드가 깨닫는 순간이었다.
키야아아아악!!
수십 대 레이더스가 팔 방위를 점하고 찔러 넣은 창이 이프리트를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창에 꽂힌 놈의 거대한 몸이 고깃덩어리로 전락해 축 늘어졌다.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프리트의 몸 곳곳이 투명하게 점멸한다 싶더니 점차 실체하지 않게 된 까닭이다.
마치 홀로그램을 보는 듯했다.
“감싸...!”
그리드가 급히 내리는 명령에 레이더스들이 즉각 반응했다. 일제히 몸을 던져 이프리트를 감쌌다.
순보를 쓴 그리드는 노검마의 곁이었다.
기껏 노검마에게 지켜달라고 부탁했던 힘의 파편에 망설임 없이 검을 꽂았다.
늦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앙!!
이프리트가 폭발했다.
감싼 수십 대의 레이더스를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그리드의 귀가 먹먹해졌다.
세상이 고요에 잠긴 것 같았다.
반면 도시의 건물들이 챗더미로 변해 흩어지는 광경은 두 눈에 선명하게 각인됐다.
노검마가 뭐라고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빠르게 멀어져갔다. 충격에 휩쓸린 그의 몸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끝내 도시 바깥까지 날아가버렸다.
그리드의 상황도 비슷했다.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나고 있었다.
구슬을 향해 내질렀던 검과 함께였다.
구슬은 저 멀리 보였다.
홀로 폭발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히 선 모양새가 거슬렸다. 바알의 비웃음이 귓전에 울리는 착각을 느꼈다.
[찰나조차 살지 못한 놈이 감히…]
손상된 청각을 꿰뚫고 어떤 음성이 난입했다.
어마어마한 초월성이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아주 먼 하늘 위에서,혹은 바로 곁에서,또는 지하에서,등 뒤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위치를 식별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드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게 진짜다.
진짜 이프리트다.
쿠오오오오오...
소름 돋는 압박감과 함께 밤이 찾아왔다.
시선을 올려 본 그리드는 어느새 가까이 내려온 드래곤을 보았다.
지상에 닿을 듯 다가와 하늘을 등진 녀석이 그리드의 시야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놈은 자신의 거대한 체구를 위협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나의 환영이 비록 나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지만... 스스로 자폭하게 만들 정도로 몰아붙일 줄이야...]
사아아아아...
조금 전 폭발했던 환영의 잔재가 서서히 본체를 향해 날아가 흡수됐다.
이프리트의 붉은 비늘이 더욱 선명한 색깔을 띠었고,급기야 지상에 내려앉은 놈의 발아래서 화염이 번졌다.
영역의 전개였다.
쌓아온 세월조차 격이라는 것일까.
강력했다.
이프리트의 영역에 밀린 화신의 폭풍이 처참하게 밀린 끝에 소멸해나갔다.
삐질,그리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너무 건방졌다.’
상황을 의심했어야 옳았다. 욕심내지 말고 파편을 부쉈어야 옳았다.
‘이렇게 된 이상 사도들을 소환해야 그나마 승산이 생기겠어.’
사도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혼자서는 파편을 부수는 게 불가능하다.
판단하며 뒤늦은 후회에 휩싸이는 그리드의 코앞으로 이프리트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길게 뻗은 목덜미에 날 선 비늘 하나하나가 보검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군,네놈.]
“...?”
온갖 상태이상을 유발하던 이프리트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리드는 드래곤의 표정을 읽는게 불가능했지만,그 눈빛에 차오르는 흥미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을 초월한 힘… 네놈이 바로 템빨신이로구나.]
“나를... 아십니까?”
[만물이 네 설학를 떠벌리고 다니거늘,내 어찌 너를 모를까'. 마침 잘 됐다. 내 네게...]
말하던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울님의 땅에서 이 무슨 횡포란 말인가.”
우사,풍사,운사.
한울을 섬기는 삼사가 황금색 구름을 타고 강림하고 있었다.
한쪽 손에 청룡도를 늘어뜨린 미르가 호위로 따라붙었다.
그렇다.
이곳은 동대륙.
심지어 가야다.
쫓겨난 신들의 영역이었다.
놈들이 이번 소란을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이프리트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선택해라. 내가 바알의 힘의 파편을 흡수하도록 도울 것인지,아니면 내 뼈와,가죽과,피로 새로운 무기를 만들 것인지.]
“그게 원…”
[너를 설득하기엔 시간이 없으니 그냥 이렇게 하자.]
“...!”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를 악 문 이프리트가 자신의 한쪽 팔을 찢고,뽑아 그것을 그리드에게 던져준 까닭이다.
[너는 알아야한다. 용살은 네 발목을 붙잡을 저주다. 세상에 유일한 용살자 또한 우리를 피해 숨어지내는 실정이다. 너는 괜한 집착을 버리고 지금은 내게 협조하는 편이 낫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앞으로 30분 내에 드래곤 웨폰을 제작하십시오! 실패할 경우 삼사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아니,자꾸 이게 원...”
전개가 영 황당했다.
그리드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휴대용 용광로를 꺼냈다.
삼사가 어떤 주술을 외우기 시작하자 '공간 이동 불가’ 페널티가 발생한 까닭이다.
무려 세 명의 신이 협력해서 발생시킨 주술답게 효과가 엄청났다.
귀환 주문서는 물론이고 순보까지 먹통이 됐다. 도망치는 것도,사도들을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긴급 탈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었다.
지금은 이프리트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공짜로 드래곤 웨폰을 만들 기회이기도 해.’
용살은 저주라는 발언 역시 신뢰할 만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현재 그리드가 용살자가 된다고 해도 득보단 실이 더 컸다.
드래곤에게 선전포고 했던 그리드의 서사시를 하야테가 비화로 만든 사건도 있지 않은가.
‘일단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보자.’
그리드가 심호흡하는 그때.
학르륵!
휴대용 용광로에 멋대로 불이 붙었다. 초대형 용광로에 맞먹는 열기가 발생했다.
이프리트가 숨결을 불어넣어준 덕분이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무용했다.
그리드가 이프리트의 팔을 용광로에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