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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69화 (1,458/1,794)

73권 14화

나를 느껴라.

보아라, 탐하라, 집어삼켜 너의 것으로 삼아라.

새카만 구슬의 의지가 거듭해서 증폭된다.

현장의 양반들과 악마들은 순식간에 매료되어갔다.

과거와 현재를 잊고, 자아를 상실하며, 구슬이 제안하는 미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구슬을 삼킨 미래가 대단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구슬에 담긴 막대한 에너지가 근거였다.

`저 힘만 있으면 다음번 치우의 시련에선 내가 반드시 1등을 차지할 거야.'

`인간들의 숭배 따윈 필요 없다.

저것. 저것을 손에 넣는 순간 나는 신이 된다.'

`지옥으로 돌아가 왕관을 쓰겠노라.'

`복수할 거야... 반드시 복수할 거야...'

바알의 힘의 파편은 용광로와 같았다.

주변 모든 생물의 욕망과 원한을 끄집어내고 담아 들끓었다.

그 열기에 이성과 지성이 사멸했다.

양반들과 악마들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구슬을 향해 뻗은 손이 동포의 뇌수를 헤집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구슬을 바라보는 눈이 동포의 손에 뽑혀나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구슬 앞에선 모든 게 하찮았다.

구슬 외의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구슬만을 열망했다.

크롸라라라라라!!

하늘에서 떨어진 용이 토한 불꽃에 뼈와 살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불바다로 변한 지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양반과 악마들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기괴한 지옥도를 보는 듯했다.

“죄다 미쳤구나.”

노검마가 탄식했다. 세계의 얼개가 망가졌다. 섬뜩하고 혼란한이 상황에서 당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캬아아아!!

아그너스의 해골 병사들은 불길에 뛰어들고 있었다.

허망하게 소멸하는 녀석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그너스가 말했다.

"불길이 형성되고 3초가 지난 뒤부턴 데미지 계수가 급격히 줄어단다. 불길의 발생 순서를 잘 기억해서 이동하도록 하지."

저벅.

아그너스가 활활 타오르는 불의 장벽으로 몸을 던졌다. 그대로 잿더미가 되는 게 옳아 보였는데 무사히 건너편에 도달했다.

그제야 뒤를 쫓아 몸을 날린 노검마가 혀를 찼다.

`내가 이놈이랑 뭘 하고 있는건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도처럼 번지며 미로처럼 얽히는 불길, 불길만큼 뜨거운 미치광이들의 열기, 태산인 양 우뚝서서 학살을 일삼는 드래곤의 뒷모습,

그 모든 광경을 차분하게 살피며 나아가는 아그너스,도무지 피할 길이 안 보이는 멸망...

절망뿐이다.

노검마는 좌절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아그너스가 제시한 방법대로 불길을 공략하며 미로 속에 갇힌 백성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어느새 그의 몸엔 화상이 가득 번졌다.

아직 약해지지 않은 불길에 위협 받는 사람들을 구줄하고자 자신의 몸을 불태우길 반복한 탓이다.

“비웃으려면 비웃어라. 네까짓게 뭐라고 조롱해봤자 나는 눈하나 깜짝 않으니까.”

아그너스와 눈이 마주친 노검마가 으르렁거렸다.

불길 너머 소년들에게 뻗은 손이 활활 불타는 고통을 견디면서다.

재가 되어가는 그의 손을 차마 붙잡지 못하고 고립된 소년들의 곁으로.

“잠자코 있어.”

아그너스가 다가갔다.

불덩이가 들러붙은 로브를 벗지 않고 오히려 감싸 안으며,소년들이 놀라지 않게끔 주의하며 붙잡아 끄집어냈다.

“감사합니다...!”

눈물범벅이 된 소년들이 아그너스에게 의지했다.

그가 앞으로 백만의 사람을 더 구해도 죄를 씻지 못할 살인귀 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불타는 로브에 감춰진 그의 흉측한 몸똥이를 보지 못했으니까.

“...가증스러운 놈.”

눈살을 찌푸린 노검마가 아그너스를 비난했다.

힘을 잃고 나서야 선의를 베푸는 놈의 가식이 가소로워 콧방귀 뀌었다.

힘을 되찾기 전까진 몸을 사릴 생각인가 본데 그래봤자 소용없다.

앞으로 네놈이 어떤 수작을 부려봤자 네놈의 과거가 세탁 될 일은 없어. 만인이 너의 악행을 기억할 거고 영원토록 증오할 거다.”

“너희들 부모는 어디에 있지?”

아그너스는 저주에 가까운 노검마의 비난에 맞서지 않았다. 고개를 조아리는 소년들에게 물을 뿐이었고 소년들은 힘겹게 대답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내가 죽였을 수도 있다.”

“...?”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들로부터 시선을 뗀 아그너스가 노검마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내 과거를 지울 생각 따위 없어.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도,착한 놈이 될 생각또한 추호도 없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 투정에 가까웠다.

“단순히 내키는 대로 살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일말의 책임감 따위 없는,혐오감을 유발하는 투정 말이다.

그 태도가 역겨워 울컥하던 노검마가 문득 생각했다.

조금 전 자신은, 아이들을 구하는 아그너스의 모습을 보면서도 구역질을 느끼지 않았던가.

놈이 어떤 소리를 지껄였든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란 뜻이 된다.

그래,돌이킬 수 없는 관계인것이다.

놈을 상대론 감정을 소모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차라리 무시하자.

지금은 이 상황에 집중하는 게 맞다.

‘저놈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다. 개가 싸질러 놓은 똥이다.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다...’

되뇌며 마음을 다잡은 노검마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했다.

불길의 미로에서 사람들을 신속하게 구줄하는 동시에 구슬과 점차 가까워지는 드래곤의 주의를 역방향으로 끌었다.

어쎄신의 함정 설치 스킬을 활용하는 것인데,함정이 발휘하는 효과가 형태에 따라서 무궁무진했다.

얼핏 만능으로 보일 정도였다.

‘ 한두 해 연구한 솜씨가 아니군.’

드래곤의 상태가 온전치 않은 것이 주요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불을 내뿜을 때마다 섞여 나오는 토혈이 놈의 내상을 짐작시켰다.

‘그리고 이 불은 브레스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원소 계열 마법으로 착각한다.

브레스가 속성을 티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브레스는 순수마력 덩어리에 가깝다.

덧씌워진 속성은 부가적인 요소로 상태이상을 유발하는데 특화되었고,실질적인 데미지는 마력량에 비례하는 트루데미지다.

온갖 내성과 저항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의미다.

저 이프리트라는 이름의 드래곤이 만약 브레스를 남발했다면 현장의 양반들은 진즉에 전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놈은 브레스를 쏘지 못하고 숨결만 토하는 중이다.

그마저도 각혈을 동반한다.

아그너스는 확신했다.

‘판단력까지 흐려진 상태이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

아그너스의 목적은 드래곤을 죽이는 게 아니다.

애조에 그건 불가능하다.

플레이어가 드래곤을 위협하지 못하는 건 상식이다. 여태껏 아그너스가 쌓아온 정보와 지식이 도출하는 결과였다.

아그너스는 바알의 힘의 파편을 파괴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크롸라라라라!!

바알의 힘의 파편은 기본적으로 마기의 결속체다.

양반들이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이유였고,흑마법이 귀속된 아티팩트를 활용한 노검마의 함정이 드래곤의 주의를 끄는 비결이었다.

힘의 파편에 눈이 먼 양반과 드래곤들은 매우 단순해진 상태였다.

파편과 닮은 기운을 생성하는 행위만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며 시간을 버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아그너스는 네크로맨서다.

그가 소환하는 언데드들은 기본적으로 사기와 마기를 품는다.

시체 폭발을 활용하는 순간 증폭되는 마기로 혼선을 주는 게 가능했다.

퍼평!

퍼퍼퍼평!!

사방팔방에서 폭발하는 해골 병사들이 눈 먼 양반들과 드래곤을 현혹한다.

조금 전까지 쫓던 구슬의 위치를 망각한 놈들이 전혀 동떨어진 방향을 배회했다.

다만 악마들은 달랐다.

놈들은 마기와의 상성이 좋다.

이미 진즉부터 구슬에 가까워져 있었고 유인책에 쉽게 속지 않았다.

“음...”

노검마가 초조함을 드러냈다.

힘의 파편이 악마들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며 불길을 무리해서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그를 아그너스가 제지했다.

“녀석들은 무시해도 된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카아아아아악!!

힘의 파편은 악마들을 거부했다.

가까이 다가온 놈들을 역으로 집어삼켜서 자신의 기운을 부풀렸고 악마들은 허망하게 소멸했다.

“바알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원하니까.”

자조적인 냉소를 머금는 아그너스의 주위로 새카만 마력이 요란하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룬에 몇 개 남지 않은 힘 중 하나를 꺼낸 여파다.

마기를 내뿜은 그가 드래곤과 모든 양반들의 표적이 되었다.

“지금이다. 어서 파편을 부숴라.”

“...!”

노검마가 뒤늦게 눈치 했다.

시야에 가득 찼던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힘의 파편까지 이어지는 최단의 거리가 열렸다.

드래곤이 뒤늦게 토해낸 숨결들은 대부분 아그너스의 주변을 감싼 상태였다. 아그너스가 시체폭발을 활용해 만든 형세였다.

크롸라라라라라!!

“내놔라! 내 것이다!!”

드래곤의 숨결과 양반들이 아그너스에게 쇄도한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눈치 챈 노검마가 급히 몸을 날렸다.

저 뒤에 선 아그너스의 단말마를 느끼며,힘의 파편을 향해 온 힘을 담은 검을 찔렀다.

쩌어어어어엉!!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끼긱! 끼기기기긱!!

노검마의 검이 조금씩,느리지만 착실하게 구슬을 꿰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부족했다.

어느 시점에서 벽에 가로막혔다.

한 사람의 전심전력이 담긴 일격이, 바알의 작은 유흥거리에 불과한 구슬을 부수지 못하고 막혔다.

“크윽...!”

이를 악 문 노검마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구슬에 박힌 검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넣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다.

하지만 무용했다.

“...아.”

내가 망쳤다.

내가 부족해서 실패했다.

이 도시는 멸망할 것이다...

좌절하는 노검마의 귓전에.

“내가 버티지 못해서 망쳤다.”

아그너스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음성.

빠르게 잦아드는 그것은 아그너스가 죽기 전 남기게 될 마지막 말이었다.

마치 노검마를 위로하는 듯했다.

시간을 충분히 벌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노검마는 황당해서 실소했고,아그너스의 시야는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한 방 먹여주고 싶었는데...’

나를 버린 놈에게.

한 번쯤은 후회를 맛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무가치하다는 사실만을 되새겼을 뿐이다.

‘내겐... 정녕 아무런 가치도...’

불과 수십 분 전에 새로운 시작을 꿈꿨던 아그너스.

옛 연인의 죽음 이후 최초로 열기를 띠었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빛을 잃고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정신력은 강할 수가 없다.

마음을 굳건히 세우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엔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왔다.

모래성이다.

덧없이 흩어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운명이 바뀐다.

“아니,망치지 않았어. 솔직히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버터줘서 고맙다. 정말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거친 숨결을 토하는 그 음성을,아그너스는 평소와 다르게 느꼈다.

불편하지도,불쾌하지도 않았다.

시기,질투,열등감 따위가 끓어오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차갑게 식어있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감정이,부풀어 오른다.

“...이런 거였군.”

[사망하였습니다.]

챗빛으로 일렁이던 시야가 급기야 암전되는 순간.

드래곤이 흘린 피를 뒤집어 쓴 아그너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랫동안 잊어온 동경을 되찾았음에 기뻐서 짓는 미소였다.

“아니,무슨...”

노검마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작금의 재앙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다.

동대륙에 숨어든 아그너스를 자신이 우연히 발견해 운 좋게 죽여서 벌어진 일이다.

누군가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타이밍 좋게 달려와 도움을 준다는 건 확률적으로 불가능했다.

한데 그리드는 해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도래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현장에 나타났다.

이쯤 되면 만화나 소설 속 전개였다.

지혜의 탑,베티, 선구자 등을 모르는 노검마의 입장에선 이 상황이 기적으로밖에 안 보였다.

반면 그리드에겐 필연이었다.

반드시 일어날 사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짊어졌다.

“파편을 지켜주십시오.”

드래곤의 기다란 목덜미를 가르며 강림한 그리드가 노검마를 등지고 서며 말했다.

전황을 토대로 상황을 분석한 그는 희망을 관측했다.

오늘,용을 죽일 각오다.

콰르르르릉...

폭풍처럼 밀려드는 학기가 지옥같은 풍경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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