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3권 - 11화
세희는 메르세데스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혔었다.
너무 예뻐서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을 정도다.
뚜렷한 표정이 없음에도 그랬다.
인형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이 순간 더 크게 놀랐다.
‘표정이...?’
그리드와 바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메르세데스의 두 뺨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늘 차분했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물기를 머금는데 가련하게 느껴졌다.
Satisfy와 현실을 구분 짓는 유라, 지슈카와 달리 그리드의 혼인에 상당히 동요하는 눈치였다.
표정이 무척 풍부했다.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지금의 메르세데스는 영락없이 소녀였다. 늘 짊어져온 무장(武裝)이 오늘따라 무겁고 어색해 보였다.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린이었다.
누구보다 큰 슬픔을 느껴야 할 그녀가, 도리어 웃으며 메르세데스를 달래주었다.
“아쉬워하지 말아요. 두 번째든, 세 번째든 순서는 상관없어요. 당신을 향한 폐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랍니다.”
그리드의 사랑을 직접 체험해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차가운 건틀렛으로 눈가를 훔친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삿날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 죄송하다.
주군의 입장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등등.
메르세데스는 그런 말들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이상 말했다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였다.
며칠 전 나를 사랑해주셨던 주군께서.
앞으로는 여왕님과 둘이서 나누게 될 거라고 믿었던 주군께서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모습은... 메르세데스 본인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슬프고 질투가 났다.
그날 밤.
푸른 달빛이 비추는 성벽 위에서.
“메르세데스.”
한쪽 무릎을 꿇은 그리드가 투명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줘.”
얼마 전.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카오스 산맥의 만년설을 모조리 녹여 버렸을 정도로 두 사람은 뜨거웠다.
마주본 두 사람은 괴수들의 비명이 아닌 서로의 숨결을 들었다.
두 사람의 몸을 적신 건 괴수들의 피가 아닌 서로의 땀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이하 생략.
...그러므로 그리드에겐 메르세데스를 책임 질 의무가 있었다.
설령 의무가 아니라고 해도 의무로 만들고 싶었다.
반드시 메르세데스와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드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혼인식은 성대하지 못할 거야...”
그리드의 정실은 아이린이다.
바사라에겐 전 황제라는 지위와 제국의 적통이라는 입지가 있어 혼인식을 성대하게 열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매우 특수한 경우에 속했다.
메르세데스와의 혼인은 되도록 단출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게 아이린을 향한 예의였다.
“그래도 괜찮다면. 아니, 꼭 나와 결혼...”
그리드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끄덕.
메르세데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내린 채였다.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느낀다.
낮의 혼인식에서 등 뒤에 선 그녀의 기분을 느꼈듯, 그리드의 초월적인 감각은 이 순간의 메르세데스를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힘껏 끌어안아주었다.
자신의 마음도 전해지게끔.
“...사앙해요.”
그제야 안도감을 느낀 메르세데스가 가슴속에 맺혀있던 말을 토했다.
흐느낌에 발음이 뭉개지자 민망한 듯 귀를 붉히는 모습이 그리드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나도.”
답하며,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머리를 턱으로 문질렀다.
기사들의 왕은 의외로 작았다.
그녀의 정수리가 그리드의 명치에 간신히 닿을 정도다.
사람들은 몰랐던 부분이다.
메르세데스가 평소에 풍기는 위압감은 자신을 커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니까.
두 사람을 축복하듯 수만 개의 별이 빛났다.
***
“정녕 구경만 할 거요? 그대는 죽어봤자 어차피 다시 살아나면서 뭘 그리 겁을 내오?”
“손해가 커서 그렇소. 그대야말로 전설이라 잘 안 죽지 않소? 그대가 나서는 편이 좋을 듯한데.”
“오호통재라. 만약 천하제일의 쌍놈을 뽑는 대회가 있다면 그대가 1등일 것이오.”
“그대가 아니라?”
“나는 한 3등쯤 되지 않을까 싶소.”
“일말의 양심조차 없구려.”
동대륙.
노검마와 황길동은 여전히 함께 모험 중이었다.
신들이 만든 울타리에 갇혀 가짜 신앙을 믿는 가여운 백성들을 해방시키고자 온 나라를 떠돌았다.
초월성을 타고난 양반들과 싸우며 그간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다.
함께 그 많은 사선을 넘고도 섣불리 서로에게 등을 맡기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
그들의 정의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타인을 위해 싸우되 본인을 희생하진 않는다.
도리를 따르고자 노력은 하되 상황에 따라서 외면했다.
비난할 순 없다.
그들의 정의가 현실적이라고 해서 거짓인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들에겐 양반을 멸절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다. 그때까진 절대로 죽어선 안 됐다.
“이쯤하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두 번 다신 신을 모욕하지 마라.”
가야의 한 도시.
영주를 멍석에 말아 짓밟던 양반들이 드디어 분이 풀려 돌아갔다.
멀찍이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길동과 노검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죽이진 않았구려. 걱정했는데 참으로 다행이오.”
“그러게 말이외다.”
최근 양반들이 난폭해졌다.
주작과 현무의 봉인이 풀려 초조함을 느끼는 눈치였다.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 건 예전과 같았으나,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을 겪으면 참지 않고 화풀이를 해댔다.
불쾌한 이유도 대체로 하찮았다.
방금 영주가 멍석말이를 당한 이유만 봐도 싸구려 술을 대접해서였다.
“숫자가 3명만 적었어도 냉큼 달려가 도왔을 텐데 아쉽구려.”
“난 2명만 더 적었어도 나섰을 거요.”
“사실 난 1명만 적었어도 나섰을 것 같긴 하오.”
“유치하구려.”
“본인에게 하는 말이오? 그대가 먼저 시작한 일이잖소?”
티격태격하는 노검마와 황길동의 표정이 어두웠다.
양반들의 폭력을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무력함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놈이 조금만 더 셌어도...’
‘이자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서로를 원망하며 한숨 쉬는 두 사내는 결코 약하지 않다.
노검마는 비공식 랭커 중 최강을 논하는 인물이고, 황길동은 동대륙을 대표하는 전설이니까.
평범한 양반쯤이야 홀로 두셋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었다. 황길동은 그 2배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마주친 양반들의 숫자는 무려 11명이었다.
심지어 그중 다섯이 갓을 벗고 있었다.
환국에서 새로운 숭배의 대상으로 내려 보낸 놈들이었다.
주작과 현무가 부활한 여파로 양반들의 무위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나 나서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후... 그래서 언제까지 이 도시에 머물러야하는 거요?”
상처투성이가 된 영주가 흙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 그 누구도 그를 부축해주지 않았다.
양반들이 떠난 방향으로 절을 올리기 바쁜 까닭이다.
영주가 발버둥치는 이유 또한 같았다.
그가 망가진 몸으로 흙바닥을 쓸어가며 발버둥 친 이유 역시 양반에게 절을 올리기 위함이었다.
몹시 역하고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그리드 덕분에 해방된 초국과 씽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백성들은 여전히 처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머지않았소.”
불쾌한 광경을 애써 외면한 황길동이 대답했다.
“서쪽을 돕기 위해 떠났던 군대가 슬슬 돌아올 무렵이니.”
서대륙에서 발발한 인마대전 소식은 동쪽까지 전해졌다.
귀 뾰족한 사내가 초국과 씽국의 군대를 데리고 빛과 함께 사라졌다는 목격담이 속출하면서였다.
“그들 중에 정녕 악마가 끼어있을 것 같소?”
“무조건이오. 한낱 요괴조차 인간에게 빙의하곤 하는데 악마에게 그런 능력이 없겠소? 목숨을 부지하고자 사람들 틈에 섞인 놈 일부가 반드시 이 땅에 당도할 거요.”
“흠...”
며칠 후.
황길동의 예상은 적중했다.
개선한 초국과 씽국의 병사들 중엔 인간의 탈을 쓴 악마가 섞여있었고 놈들은 주작과 현무의 신성에 큰 고통을 받았다.
급히 두 나라를 탈출해서 흩어졌는데 그중 상당수가 가야에 집결했다.
봉인 된 청룡의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그 힘을 어떤 괴물이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망했다.
그리고 현재 노검마와 황길동이 자리 잡은 도시가 바로 가야의 입구였다.
“음...?”
인성은 쓰레기지만 역시 유능한 사내다.
홀로 수백 년을 양반들과 싸워온 거물답다.
황길동에게 새삼 감탄하며 점차 다가오는 악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노검마가 짐짓 당황했다.
인간으로 위장하고도 악취 같은 마기를 풍기는 악마들.
놈들 틈에서 도드라지는 녹발을 발견한 까닭이다.
“아그너스...!”
노검마의 두 눈에 귀기가 서렸다.
몇 년 전.
아그너스가 동대륙에서 벌였던 대량 학살극.
그때 놈에게 희생당한 사람 중엔 노검마의 벗들도 포함돼 있었다.
노검마가 전쟁에서 간신히 구출했던 부녀, 가난의 늪에서 구원했던 모자, 키다리아저씨가 되어 보살폈던 소년소녀들을 포함한, 무려 백여 명의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아그너스에게 살해당했다.
쓰레기처럼 땅에 묻혀 썩어가다가 흉측한 몰골로 부활해 병사로 부려졌다.
여행 중에 그 소식을 듣고 느꼈던 분노와 고통은 여전히 생생해서,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죽인다...! 갈가리 찢어 개먹이로 던져주마!!”
“어어? 지금 뭐하는...”
황길동이 말릴 틈도 없었다.
노검마는 이미 대로변으로 몸을 던졌다.
뒤따라 나서려던 황길동이 멈칫했다.
‘이런 빌어먹을!’
대낮의 거리다.
놀란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자 도시 곳곳에 흩어져있던 양반들의 기파가 즉시 터졌다. 흥미를 품고 달려오는 듯했다.
“이건 위험하군... 이보시오, 노검마! 난 피해있을 테니 알아서 잘 죽든가, 살든가 하시오!”
황길동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고,
“너는...?”
“노검마다! 새끼야!”
“...!”
아그너스는 재앙을 맞이했다.
템빨단과 랭커들이 지옥 원정 준비로 바쁜 틈을 노려 동대륙에 잠입했다가 곧장 괴물을 조우한 것이다.
이건... 이건 정말로 운이 나빴다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아니, 비단 요즘뿐일까.
내 인생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잘못되었다.
아그너스는 다만 실소할 뿐이다.
***
지혜의 탑.
이사 온 탑의 규모가 쓸데없이 크다며 투덜거리던 비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베티.
정례회의에 참여할 때를 제외하면 방에서 나오는 법이 없던 그녀가 비반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드를 만나야 해. 데려다 줘.”
“갑자기 말이오? 할멈, 자고로 우리 결사란 함부로 탑을 떠나선 안 되며 절차에 따라 움직여야...”
“바알의 계약자가... 자격을 잃게 될 거야.”
“...!”
기함한 비반이 걸레를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