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3권 - 9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세상은 떠들썩했다.
템빨단의 통제구역 완화, 수만 명의 사람이 참가한 헬가오 레이드, 종교 세력 구도의 변화, 제7회 국가대항전 등등.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끄는 이슈가 끊이질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히 국가대항전에 집중됐다.
『국대전은 월드 클래스 강자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무대죠. 그해 최고의 실력자를 뽑겠다는 취지가 강합니다. 하지만 올해부턴 동일한 조건에서 실력을 겨루는 종목들을 추가해 보다 다양한 플레이어에게 참가 기회를 주겠다는 S.A그룹의 발표가 있어 화제입니다.』
『AOS 장르와 배틀로얄 장르 등을 신규 종목으로 추가할 계획이라죠?』
『네, 각국에서 온라인 예선을 진행해 선수를 선별하여...』
국가대항전은 국가의 위신이 걸린 대회다.
자국 랭커가 세계에서 어디까지 통용될지, 사람들은 기대하며 응원한다.
하지만 상당히 큰 보상이 의외의 문제를 발생시켰다.
국대전에 참가해 메달을 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지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에 단 한 번뿐인 축제.
국기를 짊어진 대회이니만큼 자격 있는 사람들의 무대여야 함이 옳다.
보상이 큰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바람에 S.A그룹이 응답했다.
인마대전으로 나빠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올해 국대전에 추가되는 신규 종목은 총 7개.
그중 무려 5개 종목이 ‘동등한 조건에서의 경쟁’을 전제로 삼는다.
Satisfy가 출시되기 전까지 지속적인 흥행을 기록했던 AOS 게임, FPS 게임, 몇 년 전 국대전에서 이벤트로 진행했던 베틀로얄 게임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참가자는 매 시합마다 특정 직업 중 하나를 선택, 1레벨로 게임을 시작해 다른 참가자와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식으로 승리를 노린다.
게임의 배경은 당연히 Satisfy다. 여러 장르의 게임을 가상현실 버전으로 플레이하는 거라고 이해하면 쉽다.
사람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를 위한 축제였던 국대전에 자신들 역시 참가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솔직히 우리도 돈이랑 시간만 있었으면 랭커 됐지.
-맞아. 운만 따라줬어도.
-조건만 같으면 우리에게도 경쟁력이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랭커들의 실력과 업적을 인정하는 한편 자신에게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저들처럼 되지 못한 이유는 환경의 차이, 결과적으로 운이 없어서였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며 의욕을 불태웠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이 ‘내가 마음먹고 공부했으면 명문대 갔다.’고 믿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전문가들이 그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최근 여론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랭커를 특권 계층으로 왜곡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더군요. 한 가지만 명심하십시오. 랭커 역시 과거에는 대부분 평범했습니다. 랭커란 돈과 시간만으로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겁니다. 그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기회를 얻었다고 해서 들떴다간 반드시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될 테니 주의하십시오.』
『교수님께서는 새로운 참가자들과 랭커들의 격차가 클 거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당연합니다. 저는 참가자의 실제 랭킹과 성적이 정비례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정비례라... 쉽게 말해서 그리드가 참가하는 종목은 무조건 그리드가 금메달을 딸 거라는 말씀이 되는군요?』
『그렇죠.』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의견이 대동소이했다.
랭커들의 압도적인 선전을 예측했다.
랭커들의 ‘타고난 재능’보단 ‘경험’을 높이 평가하면서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사건사고를 무수히 겪는 과정에서 연마된 통찰력과 컨트롤, 센스 등이 범인의 예측을 넘어설 것이며, 이 격차를 좁히기 위해선 족히 몇 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주장했다.
여론이 발끈했다.
-정비례 지랄ㅋㅋ 랭커 아닌 사람한텐 꿈도 희망도 없단 거냐?
-개소리지. 전문가가 X문가 짓거리 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선수나 프로게이머도 결국은 신인한테 밀려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마련인데 무작정 경험을 우선시하네... 게임은 경험보다 재능이다. 이 겜알못들아.
-랭커는 죄다 렙빨, 템빨이야. 렙빨이랑 템빨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남들보다 잘한 건 인정하는데 랭커가 되고나서 쌓은 경험이 졸라게 중요하다는 건 너무 심한 비약 아니냐?
-쟤네들 거의 꼰대라서 그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랭커들을 존중하며 응원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랭커들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태도라는 건 주어지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서 바뀌게 마련이다.
당장 저번 주까지만 해도 재밌게 읽은 만화나 소설을 오늘은 쓰레기라고 욕하는 독자들의 모습이 증명한다.
바뀔 만하니까 바뀌는 거다.
국대전에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종목이 추가 된 시점부터, 랭커가 별세계 존재가 아닌 경쟁상대가 된 시점부터 사람들의 태도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국대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유례없이 높습니다. 신규 종목 참가자를 선발하는 온라인 예선 참가자의 숫자가 무려...』
『벌써 수차례 대회에 불참한 그리드와 작년 대회에 불참한 크라우젤의 올해 참가 여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죠. 이에 대해 S.A그룹은 두 사람의 참가 신청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밝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상당수의 랭커가 신규 종목엔 참가 의사를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를 놓고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네임드 랭커 극검의 인터뷰가 논란이 됐죠. ‘일반인을 위한 잔치에 굳이 참가해서 초를 칠 랭커가 어디 있겠냐.’고 했던가요?』
『맞습니다. 랭커와 랭커가 아닌 사람을 확실히 구분 짓는 듯한 태도였죠.』
『여론의 반응은요?』
『매우 부정적입니다. 극검의 태도에서 랭커의 권위의식을 느꼈다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랭커가 대단한 건 맞죠. 맞는데 벼슬은 아니니까요.』
『네, 게다가 랭커가 인정받는 이유는 실력에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실력이란 대부분 스펙이 뒷받침 돼야 발휘되는 거라 여론의 반응이 더 차가운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그런 댓글 많이 봤어요. 일부분은 공감도 되더군요. 랭커의 강점은 스펙이며, 랭커가 대단한 건 그 스펙을 쌓았다는 점에 있다... 라고 하던가요. 스펙을 잃은 랭커는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꼬집는 느낌이더라고요.』
『맞습니다. 게다가 일반인 중에도 재능 있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 실정이죠. 그들이 랭커가 되지 못한 이유는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 혹은 Satisfy를 너무 늦게 시작해서일 확률이 무척 높은 겁니다. 그들이 랭커와 같은 조건에서 싸웠을 때 이기지 못하리란 법은 없는 거죠.』
『랭커들이 신규 종목에 불참하는 이유는 패배가 두려워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겁니까?』
『네, 힘겹게 쌓아올린 스펙을 버리고 일반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겨루는 종목에 참가하는 건 랭커 입장에서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뿐더러 패배했다간 명성이 곤두박질칠 테니까요.』
『그런데 일반인이라는 표현은 좀 부적절한 거 아닙니까? 수억분의 일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진출할 재능이면 프로라고 불려도 손색없는 사람들 같은데. 설령 랭커가 패배해도 일반인에게 진 게 아니라 프로에게 지는 격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또 큰 망신은 아닌데요?』
『하지만 극검은 본선 진출자들을 일반인이라고 구분 지었죠.』
『‘랭커의 권위의식’이라는 키워드가 화제로 떠오를 만하군요.』
***
“하이~”
“굿모닝.”
“...?”
Satisfy에 접속한 극검이 짐짓 당황했다.
인사를 건네오는 동료들의 태도가 평소와 같았기 때문이다.
왜 또 소동을 일으켰냐고 한 마디씩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극검의 얼떨떨한 표정을 읽은 토반이 피식 웃었다.
“네 인터뷰 소식 듣고 속 시원한 애들 많았을 걸.”
랭커들이 신규 종목을 기피하는 이유는 크게 2개다.
우선 국대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국대전은 국가의 위신을 올리는 무대이기에 앞서 참가자 개인의 명성과 몸값을 올리는 기회의 장이었다.
랭커 입장에선 신규 종목에 참가하기보다 자신의 강점을 활용하고, 어필할 수 있는 종목에 참가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편이 훨씬 큰 이득이었다.
국대전처럼 큰 무대에서 이미지 메이킹을 해두면 장기적으로 활용 가치가 높았으니까.
한편으론 분위기를 읽는 것도 있다.
기껏 대중을 위해 만든 종목에 끼어서 양민 학살을 벌이고 목에 메달을 걸면?
메달 보상 외엔 남는 게 없다. 오히려 손해다.
여론과 언론은 눈치 없는 놈이라며 비난을 일삼을 것이고 인지도에 심각한 타격을 입어 몸값이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본인들이 먼저 랭커를 도발했단 사실은 당연히 잊거나 외면하겠지.
뻔히 알기에 그들만의 이벤트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거다.
그렇다.
랭커와 일반인의 격차는 까마득하게 컸다.
몇 년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던 부분이지만,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랭커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재능이 없어서다.
운 좋게 랭커가 됐던 사람들은 랭킹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본래 자리로 내려갔음이 증거다.
그런 축적 된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랭커들은 프로라는 자각을 지니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론 그리드가 국대전에 참가해주길 바랄 정도야.”
토반이 궁전에 들어서며 말했다.
성의 분위기는 몹시 분주했다.
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한창이었다.
멋진 예복을 갖춰 입은 그리드를 발견하고 엄지를 치켜세운 극검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선 넘는 말이 너무 많긴 하다.”
전문가들의 평가가 반발심을 자극한 게 화근일까.
사람들의 랭커 혐오가 그리드 혐오로 확산되는 추세다.
그리드의 컨트롤 실력이 미숙했던 시절을 근거로, 만약 그리드가 신규 종목에 참가하면 망신을 당할 거라는 주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아직은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하지만 여태껏 그리드가 보여준 모습들이 있는데 새삼 또 헛소리를 지껄이는 무리가 적게나마 존재한단 사실이 극검을 분노케 했다.
“뭐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리드가 다가왔다.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게...”
토반이 상황을 설명하자 그리드가 하하 웃었다.
“뭘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고 그래? 지구 인구가 100억이 넘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한테 호의를 얻겠냐고. 그중 몇 명은 우리를 싫어할 수도 있는 거지.”
“랭커한테 경쟁심 느끼는 것까진 이해해. 근데 그 틈을 타서 아무 잘못도, 관계도 없는 널 물고 늘어지는 놈들이 있다는 게 열 받는 거다.”
“이유 없이 남 헐뜯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야? 무시할 건 무시하자.”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달래듯 말하는 그리드의 표정이 잠시 씁쓸해졌다.
열등감에 휩싸여 타인을 쉽게 비난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 것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공인이 돼서 그들에게 노출 된 이상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 때때로 도를 넘는 비난은 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고.
“곧 황제가 도착할 거다. 그녀가 제국의 종속을 선포하는 순간 국대전 이야기는 시들해지겠지. 그러니까 너희도 그만 신경 끄고 마음 좀 진정시켜.”
그리드의 예언은 적중했다.
“사하란 제국은 템빨국에 종속되어 그리드 폐하를 황제로 섬길 것을 선언합니다.”
대륙 각지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바사라 황제가 선포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대륙 최초, 유일의 제국이며 최대의 국가가 플레이어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여론과 언론은 더 이상 국대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플레이어 출신의 황제, 플레이어가 세운 제국, 전쟁 없이 이룬 통일 등을 주제로 그리드와 템빨단의 지난 행보와 업적을 분석하기 바빴다. 거의 찬양에 가까웠다. 극검을 비난하던 여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정도다.
손바닥 뒤집는 듯한 태세 전환이었다.
여태껏 몇 번이나 보여준 모습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러다가 국대전이 다가오면 또 태도가 바뀌겠지. 살짝 괘씸하기는 하네.’
그리드는 오랜만에 국대전에 참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마대전 승전 기념, 템빨제국 탄생 기념 등 명분은 많다.
성난 랭커들을 대표해서 신규 종목에 참가해 잔칫상을 엎어버리는 것도 재밌을 거다.
‘...아니, 굳이 내가 나서는 건 너무 심한데.’
라우엘 정도만 내보내도 신규 종목에서 금메달을 독식하지 않을까?
어차피 다른 랭커들의 참여율은 저조할 테고, 새로운 환경에서 라우엘의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괜히 천재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에 현역에서 물러난 라우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드였고,
“...?”
라우엘은 이유 모를 오한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뭐지? 어제 꾼 악몽 탓인가?’
왕국에서 제국으로 거듭난 템빨국엔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템빨사하제국.
어젯밤 꾸었던 악몽에서 들은 이름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를 것이다...
라우엘은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드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주길 바랐다.